•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2. 상회사 설립과 상권수호운동
  • 2) 상권수호운동
  • (2) 광무년간의 상권회복운동

가. 상무사 복설운동과<개정상무회의소규례>

 수출품의 최초 매집상인 동시에 수입품의 최종 매출상이기도 하였던 보부상들은 개항 이후 惠商公局(1885 이후 商理局)으로 조직되어 정부에 일정액의 信票代를 납부하는 대가로 시장세를 징수하는 등의 영업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396)全遇容, 앞의 책, 67∼69쪽. 보부상들의 독점권 행사는 한편으로 지방의 물가를 등귀시키고 소생산자들을 압박하는 등의 문제도 발생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外商의 불법적인 내륙 행상을 억제하는 기능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갑오개혁으로 상리국이 해체됨으로써 보부상은 개별화된 영세상인으로만 남게 되었다.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세력이 일정하게 후퇴하자, 보부상들은 이를 계기로 예전의 권리를 회복함으로써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는 고종의 황권 강화책을 뒷받침하면서 그 반대급부를 얻어내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보부상들은 1897년경부터 負商廳 및 任房 복설을 집요하게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계속되는 견제와 비난 속에서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임방 복설문제는 상당 기간 잠복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898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정부와 독립협회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보부상들은 이를 임방 복설의 호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마침 정부에서도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보부상들을 이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양자의 이해는 자연스럽게 합치되었다.

 그리하여 보부상단체인 皇國協會가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기 전날인 11월 20일, 정부는 商務社의 복설을 인가함으로써 그들의 오랜 숙원을 해결해 주었다.397)≪독립신문≫, 1898년 11월 22일. 이 조치는 황국협회가 독립협회와 함께 혁파되면서 바로 취소되었지만,398)≪독립신문≫, 1898년 11월 26일. 이는 독립협회 해산조치에 상응하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 독립협회 탄압을 마무리한 다음해 2월에는 다시<商務所章程>을 인허함으로써 임방 복설을 공식화하였던 것이다. 다만 과거의 상리국이 적지 않은 폐단을 낳은 바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이를 보완하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안으로 강구된 것이<商務會議所規例>를 개정하여 상무사에 보부상 단체로서의 성격과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을 보조하는 기구로서의 성격을 아울러 부여하는 방안이었다.399)≪독립신문≫, 1899년 3월 20일, 잡보<부상사건>.
≪皇城新聞≫, 1899년 3월 20일, 잡보<農部告示>.

 <改正商務會議所規例>에 의하면 상무사는 전국 상업 일반을 통할하는 기관으로서, 전국의 상민은 누구나 이에 의무적으로 가입하여야 했다. 상무사는 또한 상공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간하며 회사를 설립하는 등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을 보조해야 했다. 상무사는 단순한 보부상 단체가 아니라 전국의 상공업 일반을 관장하는 강력한 기구가 된 것이었고, 정부는 이를 통해 식산흥업과 상권보호의 두 과제를 동시에 달성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상무사는 애초 의도한 바의 식산흥업 추진기구로서는 거의 기능하지 못하였다. 상무사가 비록 시장세 등을 징수할 수는 있었지만, 그 정도 재원으로 민간단체가 정부의 일을 대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상무사는 강력한 행상독점권과 조직력을 기반으로 外商의 불법적인 내륙 행상을 저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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