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2. 상회사 설립과 상권수호운동
  • 2) 상권수호운동
  • (3) 국권회복운동기의 식산흥업운동

(3) 국권회복운동기의 식산흥업운동

 러일전쟁 이후 한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한 일제는 특권적 상업체제를 해체하여 일본 상품의 자유로운 유통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04년 2월 상무사가 철폐되었으며, 개항장의 객주회사에 대한 收稅도 폐지되었다. 이들 조치로 인해 특권적 상업질서는 사실상 해체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외상의 상권 침투를 저지할 수 있는 조직적 기반도 와해되었다. 더욱이 정치권력이 사실상 일본인에게 장악된 상황에서는 상권 수호를 위한 정치적 방안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통감부시기에는 한인 자본가들 스스로 일본인 자본가와 경쟁하여 승리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었다. 또 이 무렵에는 지식인들도 사회진화론을 적극 수용하면서 교육과 산업의 장려를 통한 실력양성을 주창하였다. 그리하여 大韓協會·西北學會 등 이 시기에 설립된 계몽운동 단체에는 대개 實業部가 조직되었고, 그와는 별도로 식산흥업운동만을 목적으로 한 연구단체, 실행단체도 속속 설립되었다.

연도 실 업 단 체
1908 江原實業會, 經濟硏究會, 工業硏究會, 共濟會, 農工硏究會, 農商工實業會,
東洋實業獎勵會, 商工勸務社, 商興會, 實業獎勵會, 湖南鐵道株式募集硏究會
1909 國民經濟會, 婦人經濟會, 國民興業會, 大邱藥商立規興業會, 大韓工業會, 大韓農商協會,
大韓商務部, 大韓實業會, 蠶業同志會, 貯金共濟會, 濟州民海業保管會, 興業會
1910 金融合資會, 農林硏究會, 大韓婦人蠶業會, 明農會, 蠶業同志硏究會, 靑年實業俱樂部

<표 4>1908∼1910년간 실업단체 일람

*全遇容,≪19世紀末∼20世紀初 韓人會社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7).

 1905년에는 평양의 지식인들이 協同社를 조직하였고, 역시 평양에서 상무사 支社의 후신격인 商民共同會가 설립되었다. 또 1906년에는 서울의 고위 관료와 유력 자본가들이 大韓殖産獎勵會를 설립하였으며, 1907년에는 牧畜營業會·實業硏究會·帝國實業會·大韓工業會 등이 각각 해산 군인·관료·자본가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중 대한공업회는 해산 군인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서 장기적으로는 대규모 공업회사로 확장할 계획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실업 단체의 설립은 1908년 이후 한층 활발해져서,<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년 10여 개 안팎의 단체가 전국 각지에서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들 단체 중에는 제국실업회나 明農會, 大韓商務部와 같이 일제의 침략 책동을 방조하는 활동을 벌인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회복의 기틀을 다진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식산흥업론이 확산되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실업단체가 설립되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직접 회사를 설립하여 일본 자본의 침투에 대항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서북 일대의 新民會 회원들이 중심이 된 平壤瓷器製造株式會社는 鄭仁叔·李昇薰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李昇薰이 제창한 關西資門論이 큰 영향을 미쳤다. 관서자문론은 우선 서북지방의 자산가들이 자본을 모아 대자본을 이루고, 그를 기반으로 각종 근대적 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여 일본 자본에 대항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일본 세력을 몰아내자는 논리였다.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가 이러한 취지에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설립 당초에는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켜 식산흥업운동을 전개하던 계몽운동가들이 다수 주주로 참여하였고, 서울·인천 등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상인들도 열렬히 호응하였다. 이밖에도 韓一銀行·湖南鐵道株式會社·湖上館商會·彰興社·廣信交易會社·彰信社 등이 자본규모의 증대를 통해 일본의 경제침투에 대응하고자 설립된 주요 회사들이었다.

 1907년부터 전개된 국채보상운동 역시 경제주권 수호운동의 일환이었다. 처음 이 운동을 발기한 이들은 대구의 지식인들이었지만, 운동의 확산을 주도한 것은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었다. 특히 인천·원산·평양·부산·진남포·개성 등의 상업도시에서는 국채보상의연금 모집을 紳商會社 등의 그곳 상인단체가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통감부시기의 식산흥업운동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었다. 식산흥업운동을 주도한 지식인·자본가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진화론의 입장에서 실력양성을 추구하였고, 그런 만큼 일본 제국주의를 침략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모방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식산흥업운동은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한 운동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는 기본 원인이 일제에 의한 강압적인 경제 재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상인들 간의 합자나 신기술의 도입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재정·금융의 주권을 박탈당하고, 신기술 습득에 대한 일본인들의 고의적인 방해가 자행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의 식산흥업은 불가능한 것이었다.411)全遇容, 앞의 책, 229∼230쪽. 그런 만큼 일제에 의한 경제 재편이 진전될수록, 이들의 식산흥업론도 일제의 침략논리에 흡수될 가능성이 컸다. 전국의 지식인·자본가들의 열렬한 지원 아래 설립되었던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가 식민지화 이후 총독부의 감독하에 ‘신기술’을 도입하고 보조금을 받으면서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은 그러한 사정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全遇容>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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