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3. 광공업과 면방직업의 전개
  • 1) 광공업의 전개

1) 광공업의 전개

 조선후기 이래 생산력 발전에 기반한 사회적 분업의 발달에 따라 광공업 역시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1876년의 개항으로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강제로 편입되면서 새로운 시장환경이 조성되고 생산방식에도 질적 변화가 있었다. 개항이후 생산의 조건은 종래와 같이 국내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외적 요인, 곧 대외무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시기 대량의 곡물 수출로 전반적으로 국내의 수요력이 증진되고 있었고, 국내 상품의 지역간 교역량이나 생산량도 증대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수입상품과 대립하는 경우 자본력이나 기술력에서 경쟁이 불가능했던 까닭에 이 시기 각종 산업은 부문에 따라 성장, 몰락, 그리고 예속의 과정에 차이가 있었다.

 개항 이후 들어 일본은 正貨의 축적을 목적으로 조선에 설치된 일본제일은행 지점이나 출장소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한국산 금을 매입하고자 했다. 청국의 경우에도 수입품의 대가를 금으로 바꾸어 자국으로 수송하고 있어 양국과의 교역과정에서 금의 수요가 대량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정부도 왕실재정의 확보를 위해 광산의 개발에 적극적이었으므로 광산개발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들어 봉건정부의 광업정책은 종래 국가가 지정한 광산만 인정하고 수세하던 소극적·통제적 광업정책인 設店收稅制에서 각 아문과 민간에서의 자유로운 채광을 가능하게 한 私自開採制로 이행되어 갔다.412)柳承宙,<李朝 開港前後의 鑛業政策 硏究>(≪亞細亞硏究≫55, 1976).
≪日省錄≫, 고종 18년 2월 27일, 命外道金銀採壙參酌勾檢 참조.
1887년 총세무사 墨賢理의 보고에 의하면 “본국의 산금지는 종래 ‘사자개채’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국가의 이 같은 금령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계속 사채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이 금령을 바꾸어 민간의 의사를 들어 채취함을 승인하고 산금량에 따라 백분의 몇을 세로서 징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금의 생산은 앞으로 수출액이 증가할수록 더욱 많아질 것이 틀림없다”라고 했다.413)≪朝鮮通商口岸貿易情形論≫(1887), 仁川海關稅務司史納機貿易情形論(出洋生金).
韓㳓劤,≪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一潮閣, 1970), 294쪽에서 재인용.
실제로 이 시기 광산의 개발은 대규모화하여 1886년 영흥금광의 경우 광부가 5∼6천 내지 1만 명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한다.414)≪明治官報≫1018, 1886년 11월 19일, 外報<元山港商況>. 그런데 이 제도를 통해 광업생산의 자유화가 어느 정도 인정됨으로써 광산개발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광산의 소유권까지 인정한 것이 아니었고 또 국가의 봉건적 수취체제가 여전히 존속하는 한 그대로 광업의 근대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887년에도 鑛務局을 설치하고 전국 각지의 광산현황과 광무행정을 관장토록 하는 한편, 근대적 기술도입을 위한 외국의 광산기사들을 초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광무국의 설치는 오히려 열강의 광산이권 침탈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뿐 국내자원의 보호와 근대적 광업제도의 확립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고용된 서양의 광산기술자들은 한국광산의 근대화보다 그들의 이권획득을 위한 예비탐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었다. 1895년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획득한 미국의 경우에도 1888∼89년에 걸쳐 광산용기계와 5명의 광산기술자를 파견하고 있었다.415)李培鎔,<開港後 韓國의 鑛山政策과 鑛山探査>(≪梨大史苑≫10, 1972). 이처럼 근대적 광업정책이 수립되지 못한 실정에서 대량의 금의 국외유출은 조선의 전반적 자본축적을 저애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화폐제도의 개혁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정화의 축적을 불가능하게 하여 1890년대에 들어서의 몇 차례 화폐제도 개혁시도도 실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광업의 생산조직은 物主-德大-임금노동자로 이어지는 형태로 경영을 담당하는 덕대가 10∼20명 규모의 전업적 광산노동자나 농민인 계절노동자를 거느리고 자금을 대는 물주에게 소속된 경우가 많았다. 물주의 자본은 주로 상업이나 고리대자본, 또는 관료자본 등 전기적 자본의 성격이 강했고 덕대는 이에 일정하게 예속되고 있었으나 덕대제 경영은 하나의 경영단위로 노동조직의 기본형태였다.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했지만 경제외적 강제가 없는 임노동의 성격을 띠었고 일부 덕대경영에서는 매뉴팩쳐적 형태도 존재했다. 운산금광 등 石金鑛이 열강들에 의해 장악되었지만 사금업은 달랐다. 청일상에 의한 沙金鑛 투자시도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식민지가 되기까지 외국자본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몇 안되는 수익성 있는 산업분야였다. 그러나 1905년 이후 일본자본의 생산지배가 확대되면서 조선인 자본에 의한 사금업 역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416)朴贊一,≪韓末 金輸出과 金鑛業 德大經營에 관한 硏究≫(성균관대 무역학과 박사학위논문, 1982). 광업은 조선후기 이래 어느 산업분야보다 자본주의적 성격의 경영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이 시기 급격한 금수출의 증가와 관련하여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었다.417)금 생산만이 아니라 은·동의 경우에도 생산이 증가하고 근대적인 경영형태를 띤 것이 많았다. 북한의 연구에 의하면 19세기 후반 금광수는 169개소였고 이 가운데 운영되고 있던 것은 97개소였으며, 큰 은광의 수는 21개소였다. 은광에서도 일부는 자본주의적 경영을 하고 있었다. 유기공업의 발전과 화폐주조가 많아짐에 따라 구리의 생산도 늘어나 동광수는 24개소로 늘어났고, 철광은 39개소에 달했다고 한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편,≪조선전사≫13, 1980, 192∼194쪽).

 한편, 조선후기 이래 매뉴팩쳐적 경영형태까지 보이던 제조업분야는 면포와 같이 외국의 자본제 공산품의 유입과 함께 일부 생산이 위축되어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개항장의 확대와 기선을 통한 교통의 발전, 그리고 금이나 곡물수출의 증가에 유발된 국내의 구매력 증대로 시장이 확대되고 생산이 증대함으로써 근대적 산업으로 발전되어 가는 경우도 많았다. 수입 자본제 제품과 대립이 격심하지 않던 상품의 경우 국내수요의 확대와 함께 생산이 증가하고 있었던 것은 일반적 추세였다.

 이미 개항이전부터 안성과 정주 등지에서 매뉴팩쳐적 경영형태를 보이던 놋쇠업은 이들 지역에서 개성·구례·전주·재령 등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이 유기제조공장을 세우는 자가 늘어나 유기제조업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들어 근대적 공장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1887년 李承薰이 세운 납청유기제조공장과 안성유기제조공장이 그것이다. 이들 두 공장에서는 생산공정을 분화하여 전문기술자가 각 공정을 전담하도록 하고 생산과정에서 근대적 기계를 사용하여 대량의 유기를 제조하고 있었다.418)권병탁,<조선후기 17∼19세기의 장인>(朱宗桓博士華甲紀念論文集≪韓國資本主義論≫, 한울, 1989). 납청지역에서는 19세기말 공장제 수공업장이 30여 개에 달하여 다양한 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였고, 이들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의 호수가 600여 호에 달하는 커다란 店村이 형성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유기제조업의 확산은 경쟁의 심화를 가져와 여러 형태의 수공업적 동력장치가 도입되고 기술적 개선이 이루어지는 등 생산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수반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1897년 한성에 세워진 합자회사 조선유기상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회사형식의 자본결합을 통해서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산 유기제품의 수입이 1889년부터 시작되면서 모두 740여 톤이 1896년까지 들어 온 데다가 1900년대에 들어 본격화된 값싼 일제 도자기의 대량 수입으로 전통적 유기제조업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일제 도자기는 싼 가격을 무기로 일반 서민가정에 손쉽게 파고들어 차츰 유기수요를 침식해갔다. 그 결과 이승훈의 납청유기제조공장도 1905년을 전후하여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등 유기제조업은 일부 타격을 입긴 했지만, 전통적 유기의 기술력이나 수요자의 선호도가 여전히 높아 식민지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철기류의 제작은 전통적으로 농기구와 솥을 위주로 했다. 이 시기 쇠남비·쇠대야·쇠물통 등은 일본에서 수입되고 그 수량도 증대하고 있었으나 솥은 품질이 외국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아서 거의 수입되지 못했다.419)≪明治官報≫3307, 1894년 7월 9일, 公使館及領事館報告<釜山港鐵器及桶類商況>.
≪通商彙纂≫20, 1895년 7월 1일,<仁川港收入本邦重要商品ニ關スル報告>(1895年6月25日付在仁川領事館報告).
솥의 생산에서도 개천 무진대의 경우 분업적 협업에 기초한 생산이 이루어졌고,420)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편, 앞의 책, 188쪽. 경상북도 청도의 한 솥공장에는 매일 평균 40인의 노동자가 생산에 참가하며 각자의 생산조직에서 임금을 받고 있었다.421)松田行藏,≪朝鮮國慶尙·忠淸·江原道旅行記事≫(1888), 14∼15쪽. 청도군 운문면 일대의 솥계수공업은 내구연한이 4대 100년에 이를 정도로 양질의 솥을 생산해 경상도 일대에서 소비되는 솥을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1904년 현재 이 지역에서는 연인원 248,000명이 동원되어 약 188,000관의 원철을 사용하여 약 18,000개 이상의 솥을 생산했다. 솥을 생산하는 각각의 공정은 분업적 협업에 따른 공장제 수공업적인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422)권병탁, 앞의 글 참조.

 민간 요업에서나 관영의 分院에서 조선후기 이래 매뉴팩쳐적 경영이 나타나던 도자기생산은 19세기 후반에 관영이 민영으로 재편되고 민간공장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어 1895년 현재 비교적 큰 규모의 도자기공장은 35개였다고 한다.423)권병탁, 위의 글.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편, 앞의 책, 191쪽.
물론 일본도기 특히 茶器의 수입이 점차 증대되는 추세에 있었으므로 요업도 일본제품과 경쟁해야 하는 실정이었지만, 외국산 도자기는 주로 개항장과 주요 도시지역에 한정되었고 일본인의 수요도 많았다. 따라서 풍부한 원료, 값싼 노동력으로 싼 가격에 생산되어 민간에서 주로 쓰던 도자기, 옹기류 등은 수요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1900년대에 들어서면 저가의 일본산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밀려들면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신식개량기계를 이용하여 도자기를 생산하는 공장도 나타나고 있었다. 1902년 李某에 의해 세워진 자기제조소에서는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새 기술로 자기를 생산하였고, 1908년에는 이승훈이 평양의 유지들과 합자하여 평양 마산동에 근대적 회사조직을 갖춘 평양도자기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원료의 분쇄과정에 석유발동기를 사용하는 등 기계를 생산과정에 널리 도입하였다. 한편 1900년대 초 함경도의 성진공업조합에서는 새 기술에 기초한 신식가마를 축조하여 도자기를 생산하는 등 가마의 개량도 나타나고 있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간행된≪조선산업지≫에 의하면 1909년 현재 10여 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생산액이 1,000원 이상인 비교적 큰 규모의 도자기 공장은 53개소, 가마수는 184개였는데, 여기에 고용된 노동자, 기술자의 수는 695명, 생산액은 63,001원에 달해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였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동 일대에 자리잡은 ‘눈배기백자기점’ 단지는 전통적인 도자기 생산지역이었는데, 1902년 세워진 민석로의 사기점은 투철한 기업가정신, 작업공정에서의 분업적 협업, 도토를 빻은 데 물레방아의 힘을 이용하는 등 신기술을 도입하고 있었다. 이 같은 결과는 새로운 시장환경에 적응해 기술의 개발로 대응한 탓이었다.424)권병탁, 앞의 글 참조.

 제지업은 개항이후 계속적으로 생산이 증대한 제조업 중 하나였다. 韓紙는 국내적 상품유통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던 상품으로 개항장간, 미개항장간의 교역에서 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품질의 우수성이 국외에서도 인정되어 많은 양이 청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일본종이가 일부 수입되기는 했지만 갑오전후까지는 대부분 폐지류나 일본인의 수요품으로 수출량에 비하면 극히 적은 양이 들어오고 있었다.425)≪國譯韓國誌≫(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497쪽.
≪通商彙纂≫60, 1897년 3월 1일,<仁川港ニ於ケル陶器外八品ノ情況>(1896年12月12日付在仁川領事館報告).
그러나 갑오이후 수입량이 증가하면서 輸入紙에 대한 대응으로 외국산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력을 향상하려는 움직임도 일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19세기말 양화진에는 일제 제지기계가 갖추어진 제지공장이 건설되었고, 1901년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외국산 기계를 들여와 용산 典圜局내에 제지소를 설치하여 한지와 함께 洋紙도 생산했다. 또한 1908년 초에는 서울의 자본가 몇 명이 대한제지회사를 설립하고 자본금을 30만 원으로 공덕리에 공장을 세우고 일본인 4∼5인을 고빙하여 각종 종이제품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조선의 종이생산은 수공업적 기술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고 있어 수요량의 증가를 따라가기 힘든 데다가 1900년대 이후 외국산 종이 수입이 양적으로 급증하고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한지를 제외한 제지업은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 1901년 8만 원 미만이던 양지 수입액은 급격히 증가하여 1904년 30만 원에 육박하고 1910년에는 70만 원에 달하였다. 1910년의 수입액을 양으로 환산하면 288만 근으로 1909년 조선의 연간 한지 총생산고인 약 80만 근의 서너배에 달했다. 하지만 한지는 양지와는 다른 특수성으로 일본과 중국에서도 계속적으로 수요가 있어서 근대적 공업제품으로 발달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생산이 계속되고 있었다.426)朝鮮總督府,≪京城仁川商工業調査≫(1913).

 이와 같이 광업은 주로 국외수출을 위한 금 생산이 주종을 이루며 이의 대량유출은 조선의 정화를 유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업은 어느 산업분야보다 매뉴팩쳐적 경영이 발달하고 있었다. 기타 제조업도 자본제 상품의 유입에 따라 일부 타격을 입는 분야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금이나 곡물수출로 인한 수요 증대에 힘입은 원격지 유통의 활성화로 생산량이 증대하였다. 제조업은 대개 農工이 미분리된 상태였지만 일부는 생산공정의 근대화를 통하여 매뉴팩쳐적 경영형태를 보이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수입 자본제 제품과 대립할 경우 취약한 자본과 생산과정의 전근대성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몰락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고, 일제의 정책에 의해 예속화되어간 금광업과 같이 일본자본에 의한 예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427)河元鎬,<開港後 帝國主義의 經濟侵奪과 經濟救助의 變動>(≪朴永錫敎授 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下, 탐구당, 1992).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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