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3. 광공업과 면방직업의 전개
  • 2) 면방직업의 전개

2) 면방직업의 전개

 개항초기에 일본상인은 섬유제품 등을 수입하여 수입원가에 비해 엄청난 폭리를 취하며 조선시장에 판매했고, 1884년 이전까지는 관세마저 면제받고 있었다. 하지만 임오군란이후 청국상인이 조선에 진출해 오면서 사정은 다소 바뀌어 갔다. 일본상인은 청일전쟁이전 단계까지 주로 영국산 섬유제품을 상해에서 일본을 경유하여 매입하고 조선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상해에서 조선에 바로 수입하는 청국상인과의 경쟁에서 가격면에서도 열세일 수밖에 없었고, 또한 일본상인들은 주로 수입품을 현금이 아닌 荷換으로 수입하고 있어 은행에 대한 이자 지불부담이 컸다. 그 때문에 수입품에 이자부담을 전가하여 가격을 높이는 데다가 이의 부담을 줄이려면 빠른 시일 안에 팔아 버려야 했으므로 큰 이윤을 남길 수 없었다.428)≪通商彙纂≫4, 1894년 5월 10일,<明治26年中京城商況年報>(1894年4月16日付在京城領事館報告). 더구나 개항초기와는 달리 후기로 갈수록 수입되는 섬유제품, 특히 카네킨(金巾:옥양목)의 경우 하등품이 많아 이익이 박약했다.429)≪日韓通商協會報告≫2, 1895년 12월,<金巾貿易>참조. 이 같은 사정에서 일본상인이 섬유제품류를 수입했던 것은 단순히 수입품의 판매를 통한 이윤의 획득보다 그것을 판매한 댓가로 곡물을 매집하여 수출하려는 데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430)≪明治官報≫1994, 1890년 2월 25일, 通商報告<仁川港商況>(1889년 12월중).
“원래 金巾은 이익이 많지 않은 품목으로서 輸入者는 오직 이로써 物品互換의 용도로 쓰는 데 그친다.”
즉, 섬유제품류의 구입원가와 곡물의 일본시장에서 판매가격의 차이에서 이익을 내는 것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 면제품이 들어와 영국제 카네킨을 구축하면서부터는 수입품에서 얻는 이윤도 커졌지만 섬유제품의 댓가가 다시 곡물의 구입비용으로 사용되는 것은 여전했다.

 이 시기 국내시장에서 곡물 다음으로 많은 교역량을 차지하던 상품은 면제품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내재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전망을 보여주던 土布, 곧 조선산 면포는 그 상품의 성격상 수입되는 외국산 면제품, 특히 카네킨과 대립하며 생산조건이 바뀌어 갔다.<표 1>의 카네킨과 토포의 가격을 대비하여 산출한 상대가격을 보면 1890년 전후까지 카네킨의 상대가격이 낮아지고 그 이후는 카네킨의 가격조건이 높아져 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는 우선 1890년 이전의 경우 개항초기의 수입 카네킨이 고가품 중심에서 점차 저렴한 것으로 수입의 형태가 바뀐 데 있었고 다시 1890년대에 들어 대량의 곡물수출로 인한 수입섬유제품에 대한 구매력 창출이 기호의 고급화를 가져온 결과이다. 그래서 1890년 부산에서는 카네킨에 대한 기호가 고급화하여 상등품의 매매가 활발했고 하등품은 일체의 수요가 없는 실정이었다.431)≪明治官報≫2178, 1890년 10월 1일, 通商報告<釜山港貿易景況>(1890년 7월중).

연 도 부 산 인 천 연 도 부 산 인 천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5.44
4.16
5.33
7.20
3.85
2.89
3.17


8.00
5.81
8.16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994

3.08
2.78
2.72
2.77
2.90
3.70

3.03

2.97
3.15
3.27
3.63

<표 1>자본제 섬유제품과 토포의 상대가격 (카네킨/목면)

*河元鎬,<開港後의 穀價變動에 대하여(1876∼1894)>(≪李佑成敎授定年記念論叢≫, 創作과 批評社, 1990).

 그런데 이러한 기호의 변화는 면포생산에도 영향을 주었다. 1893년의 기록에는 “근년 당국에서 카네킨의 수입이 현저히 증가하여 지금은 각도에 달하고 寒村僻邑이라도 널리 본품의 수요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목동·나무꾼도 카네킨의 의복을 입는 정도라서 점차 그 품격을 낮추어 보기 때문에 근래에는 목면 의류를 입는 쪽이 오히려 귀하게 보이는 경향이 생겨 이 기호의 변천에 따라 카네킨이 취약하다는 약점을 찾아내고 여러 단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방 농민의 부유한 자 중에는 자국의 면을 제조하여 손으로 목면을 짜거나 또 면화를 충분히 가지지 못한 자는 해외에서 방적사를 매수하여 手織의 재료로 삼는 것이 증가했다”고 한다.432)≪通商彙纂≫1, 1893년 12월 9일,<朝鮮國綿作ノ景況>(1893年10月22日付在仁川領事館報告). 이 인용문은 자본제 섬유제품이 결코 사치품으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빈농이하의 계급에도 침투하며 조선의 면포와 대립하고 있던 사정을 보여준다. 물론 이 기록에서 보는 카네킨의 취약성, 목면보다 세탁에 약하다는 점은 목면의 수요를 완전히 카네킨이 장악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상인은 일본산 목면으로 이에 대처하려 했지만 갑오이전까지는 일본목면의 수입이 적어 조선 목면을 구축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갑오이전 면포생산의 기본형태는 농가부업적 수공업이었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선대제식 방식에 의한 부농경영도 존재했다. 433)梶村秀樹,<朝鮮末期朝鮮の纖維製品の生産及び流通狀況>(≪東洋文化硏究所紀要≫46, 1968);≪朝鮮における資本主義の形成と展開≫(龍溪書舍, 1977)에 재수록 참조. 1892년 서울에서는 일본제 綿繰機를 도입하여 생산공정의 근대화를 꾀하는 사례도 나타난다.434)≪明治官報≫2833, 1892년 12월 6일, 通商報告<京城ニ於ケル日本綿繰機械ニ關スル調査>. 그러므로 이 시기는 아직 외국산 섬유제품이 완전히 토포시장을 잠식하지 못하는 단계여서 면포생산을 통한 부농이나 소상품생산자의 발전 가능성은 일정하게 존재했다. 오히려 원격지 무역의 증대에 따라 부산에서 국내 각 개항장 등으로 이출한 면포의 양이 1885년 1,805엔에서 1894년 346,127엔으로 급증하는 등 면포의 국내 교역량이 증대하는 추세였다.

 개항기 토포생산의 기본형태는 부녀자에 의한 농가부업적 가내수공업이었다. 가내수공업의 생산력은 紡絲와 織布과정에 각각 5일의 노동력이 필요하여 원면에서 1필의 면포를 완성하기까지 적어도 10일간의 노동력이 소요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수치는 순수하게 방사와 직포과정에서 요구되는 노동력이었으므로 농가부업으로 이루어진 직조량은 연간 30필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다.435)梶村秀樹, 앞의 글. 그런데 1895년 조선 내륙지방을 여행한 한 일본인의 조사에 따르면 직포업이 성행했던 경상도 진주는 면직호 1호당 평균 직조량이 60필, 나주·순천·연기 등은 40필 정도였다고 한다.436)岡崎唯雄,≪朝鮮內地調査報告≫. 호당 평균 직조량이 40∼60필이었다는 것은 농가부업을 훨씬 넘어서는 경영형태가 존재하였고, 훨씬 큰 생산규모의 면직호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같은 규모는 농공결합에 의한 생산단계에서 면작과 직포가 분리되는 단계로 이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간 60필의 면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실면의 양은 약 100관인데, 이는 면작을 가장 많이 한 자가 겨우 자급할 수 있는 정도의 양이어서 대부분의 경우 필요한 면화를 시장에서 매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면포의 상업적 생산은 양반이나 상인자본에 의한 선대제적 생산과 부농이 고용노동을 이용하여 시장을 위한 생산을 하는 부농경영의 두가지 형태였다. 선대제적 생산은 2필 분의 원료를 貨主로부터 미리 받은 농가에서 자신의 직조기를 이용해서 면포를 생산하여 그 중 1필을 화주에게 주고 나머지 1필을 품삯으로 받는 방식이었고, 부농경영의 경우는 고용주가 차려놓은 작업장에 임노동자가 모여서 고용주의 직기를 이용하여 생산하고 임금을 받는 방식이었다. 이 두가지 생산방식 중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더 지배적인 생산방식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직물수공업이 발전하였던 지역의 경우는 후자의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 선대제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었다.

 부농경영에서 임노동자가 받았던 임금의 형태는 현물과 화폐 두가지가 병존하였지만 화폐보다는 현물의 비중이 일반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직물업이 발달하였던 지역에서는 오히려 화폐형태의 임금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437)권병탁,≪韓國經濟史 特殊硏究≫(영남대 산업경제연구소, 1972). 임금의 지불형태가 어떠한 방식이었든 고용노동의 보편화에 따라 주요 산지가 아닌 지역에까지도 평균노임이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직물업의 직공노임은 가장 낮은 수준의 임금에 속하여 값싼 노동력의 판매로 빈농경영의 빈곤도가 한층 심화되었다. 하지만 저임금을 바탕으로 고용주는 약간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갑오이전 시기까지는 면작과 토포생산을 통한 부농이나 소상품생산자의 성장 가능성이 일정하게 존재했다. 이러한 가능성은 앞서 언급한 외국산 면제품 수입의 정체 이외에도 田作에서 면화와 대립하고 있었던 콩의 상대가격이 토포에 비해서 낮아지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갑오이후는 사정이 달라졌다. 갑오이후는 전시기와 달리 수출입 상품에 큰 변화가 있었다. 수출품은 역시 쌀과 콩을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물이 주종을 이루었지만, 수입 자본제 상품은 카네킨 위주에서 일본목면·씨이팅·방적사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영국산 카네킨의 중계무역을 놓고 일본과 청국이 대립하던 단계에서, 일본산 섬유제품이 여전히 카네킨의 중계무역을 위주로 하는 청국을 압도하면서 조선의 면포시장을 장악해 나갔던 것이다. 일본은 목면과 같은 완제품만이 아니라 半製品인 방적사도 대량으로 수출함으로써 조선의 면업생산구조를 뒤바꾸어 놓았다.

 1895년 이후의 곡물가격에 수입 면제품의 가격을 나눈 상대가격을 정리한 것이<표 2>이다. 이 표는 모든 곡물과 수입면제품의 상대가격을 구하지 않고 지역적 조건에 따라 대표적 상품을 서로 대립시켜 본 것이지만, 제시되지 않은 경우도 그 경향성은 동일하다. 여기서도 전시기와 마찬가지로 곡물의 가격조건이 수입 면제품의 그것보다 나아지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연 도 콩/日本木綿 쌀/씨이팅 쌀/生金巾
인 천 부 산 원 산 인 천 부 산
1895
1896
1897
1898
1899
1901
1902
1903
1904
1905
4.42
4.89
5.31
6.01
6.37
5.80
5.04
5.29
5.45
7.03
2.35
2.46
3.08
3.27
4.34
3.92
3.19
3.56
4.00
5.12
3.65
4.77
4.97
5.50
6.33
5.82
5.16
5.81
6.20
6.68
1.46
1.68
2.08
2.61
1.86
1.80
1.78
2.38
2.48
2.36
2.17
1.84
2.27
3.50
2.29
2.50
2.04
2.01
2.84
3.46

<표 2>穀物과 輸入纖維製品의 相對價格

*1. 河元鎬,<開港後 穀價變動硏究(1895∼1904)>(≪國史館論叢≫53, 1994).
 2. 콩과 쌀은 1석 당 엔화가격, 일본목면·씨이팅·生金巾은 1反 當 엔화가격.

 수출곡물의 상대가격이 수입제품보다 높아지는 조건하에서 쌀과 콩을 중심으로 한 곡물의 상품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곡물수출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산구조도 일정하게 변화시켜 갔다. 수출곡물인 쌀과 콩의 경작면적 확대나 타경작지의 미작과 대두작으로의 전환은 가격체계에 대응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그것은 농업생산의 단작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표 3>에서 보듯이 콩과 토포의 상대적 가격조건에서도 비교된 지역 모두 콩의 가격조건이 나아진다. 콩과 면포의 가격조건 변동은 자연히 田作에서 대립하던 대두작과 면작에 변화를 가져왔다. 면화재배지의 대두작으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1899년≪皇城新聞≫의 “今에 民이 洋布의 便易함만 旣知하야 女工의 艱難을 旣廢하고 綿田에 易豆함이 處處에 皆然한즉…”이라는 지적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438)≪皇城新聞≫, 광무 3년 10월 4일, 논설.

연 도 인 천 부 산 원 산 연 도 인 천 부 산 원 산
1895
1896
1897
1898
1899
3.18
4.06
4.01

 
1.94
2.12
3.22
3.25
4.03
3.52
4.30
4.88
5.44
6.12
1901
1902
1903
1904
1905
4.46
4.06
4.46
4.92
6.74
3.79

3.45
4.02
5.17
5.65
4.97
5.66
6.21
7.13

<표 3>콩과 土布의 相對價格 (콩/朝鮮木綿)

*1. 河元鎬,<開港後 穀價變動硏究(1895∼1904)>(≪國史館論叢≫53, 1994).
 2. 콩은 1석 당 엔화가격, 조선목면은 1反 當 엔화가격.

 대표적 면화산지인 목포지방에서의 1901년 보고에 의하면, “당 지방은 저명한 면화산지로 이를 원료로 목면을 製織하고 해마다 타도에 수송하는 량이 거액에 달해 실로 주요한 특산물이지만, 개항후는 점차 면화작에 대신해 大小豆로 하는 것이 수익이 많고 경작이 면화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은 대소두의 다액의 수출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439)≪通商彙纂≫192, 1901년 6월 10일,<木浦輸出大·小豆ノ前途>(1901年5月10日附在木浦帝國領事館報告). 그래서 “개항후는 방적사의 수입이 있어 갈수록 면화작이 불리함을 깨닫고 동시에 본품(大豆)의 경작을 유일한 業”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440)≪通商彙纂≫198, 1901년 9월 10일,<木浦33年貿易年報>(1901年8月13日附在木浦帝國領事館報告). 가격체계의 변화가 면작의 대두작으로의 전환, 그리고 대두 수출 증가와 방적사 수입이라는 무역과 생산구조의 변동을 가져오는 과정을 목포지방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대두와 면포의 가격조건의 변화는 면작의 쇠퇴를 강요했고 필연적으로 면업과 이에 기반한 부농경영의 발전 전망을 흐리게 했다.

 농민전쟁이후 직접적으로 전통적 토포와 대립하고 있던 것은 일본목면이었다. 일본목면이 토포시장을 탈취하며 수요를 확대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세탁에 강하다는 내구력에서 두 제품이 비슷했음에도 가격경쟁력 때문이었다. 둘 다 모두 농가부업의 형태로 생산되지만 일본목면은 방적사를 이용해 밧탄 직기로 생산되었다. 따라서 전통적 베틀에서 생산되는 토포에 비해 노동력이 절감되고 생산성이 높아 가격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441)村上勝彦,<日本資本主義による朝鮮綿業の再編成>(≪日本帝國主義と東アジア≫, アジア經濟硏究所, 1979).

 그러나 절대가격의 비교에서는 일본목면이 낮지마는 상대가격의 추이를 살펴보면 반드시 가격경쟁력이 계속 낮다고만 할 수 없다. 다음<표 4>의 두 제품의 상대가격의 비교에서 보듯이 지역에 따라 가격조건이 정체상태이거나 후기로 갈수록 일본목면의 가격상승율이 높아져 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일방적으로 일본목면이 조선목면을 구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목면의 수입량은 후기로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토포는 부산의 이출량과 인천·원산의 이입량이 초기의 축소과정을 거쳐 후기에는 증대되는 현상을 나타낸다.

 물론 이 문제는 방적사 수입량이 증가하는 문제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방적사는 면포제직에 경험이 적은 함경도지방를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토포생산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방적사를 이용한 면포생산은 생산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이 면에서 토포의 생산이 외국면제품의 침투에 대해 일정시기까지 버틸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일본화물의 수입에서 특히 주의할 점은 模製 木綿이 작년(1899) 이전에 비해 현저히 감퇴한 것이다. 대개 카네킨 무역과 같이 방적사의 호황에 반비례하여 하는 것으로 綿絲무역의 범위가 확장되는데 따라서 목면구역의 축소는 면하기 어렵다”는 기록도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442)≪通商彙纂≫161, 1900년 3월 8일,<京城31年中貿易年報>(1899年12月18日附京城帝國領事館報告).

연 도 인 천 부 산 원 산 연 도 인 천 부 산 원 산
1895
1896
1897
1898
1899
0.72
0.83
0.76
0.99
0.93
0.82
0.86
1.04
0.99
0.97
0.96
0.90
0.98

 
1900
1901
1902
1903
1904
0.77
0.81
0.84
0.90
0.96
0.97

0.97
1.01
1.01
0.97
0.96
0.97
1.00
1.07

<표 4>日本木綿과 土布의 相對價格 (日本木綿/朝鮮木綿)

*1. 河元鎬,<開港後 穀價變動硏究(1895∼1904)>(≪國史館論叢≫53, 1994).
 2. 각각 1反 當 엔화가격.

 방적사가 가장 많이 수입되는 지역은 인천이었다. 인천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면직물 유통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수입된 방적사는 바로 배후지로 이송되어 면포생산에 조달되었다. 수송지역은 경인지방에 그치지 않고 평안·황해·충청도, 그리고 면화의 주산지인 전라도지역까지 미치고 있었다.

 1900년 목포지방의 일본인의 보고에는 “근래 날줄로는 외국방적사를 사용하고 씨줄로는 자국산 手紡絲를 써서 짜는 경향이 널리 행해진다…그들의 말로 목면으로 한 필을 짠 결과는…방적사를 혼용할 경우 크게 이익을 얻는다…방적사는 사용방법이 경편해 수방사와 같이 사선의 가늘고 굵기가 다르지 않아서 織出에 매우 신속하고 시간 소비가 적다. 결국 織女의 임금은 시간이라는 점에서 노임을 절약하고 생산비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443)≪通商彙纂≫181, 1900년 12월 25일,<木浦輸入本邦紡績糸>(1900年11月22日附在木浦帝國領事館報告). 이 때문에 방적사의 주된 수요층은 가내부업적 형태의 자급자족적 생산자보다는 상품화를 전제로 생산비를 낮추려는 선대제방식의 생산이나 부농경영에서 볼 수 있었다.444)≪通商彙纂≫180, 1900년 12월 10일,<群山輸入本邦紡績絲>(1900年11月22日附在群山帝國領事館報告).

 수입방적사를 이용한 토포생산이 계속되는 인천 배후지의 토포시장을 일본목면이 일방적으로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목면보다는 1900년대 이후 씨이팅 도입이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토포생산이 패퇴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445)梶村秀樹, 앞의 글(1968). 그러나 이 견해는 씨이팅의 수요층이 하등층이어서 토포와 대립되는 상품이라는 데 근거한다. 그러나 오히려 씨이팅이 처음 수입된 1890년대 중반과는 달리 후기로 갈수록 씨이팅의 품질이 나아지면서 주된 사용층도 중류계층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씨이팅의 수요자가 토포수요자와 일치하여 씨이팅의 수입이 방적사를 이용한 토포생산을 일방적으로 ‘패퇴’시켰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446)河元鎬,≪한국근대경제사연구≫(신서원, 1997). 하지만 씨이팅의 수입량이 급증하면서 토포생산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씨이팅은 판매시장이 서울이나 경인지방의 도시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씨이팅의 시장이 제한적이라는 점은 非면작지대의 광범한 농촌을 대상으로 하던 토포시장을 씨이팅이 바로 탈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447)吉野誠,<李朝末期における綿製品輸入の展開>(≪朝鮮歷史論集≫下, 龍溪書舍, 1979) 참조.

 그러나 이 시기 수입방적사에 근거한 경인지방과 그 배후지인 평안·황해·충청도의 토포생산은 생산의 기반을 수입제품에 두고 있어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즉, 수입방적사의 가격 변동에 따라 생산비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방적사의 가격이 급등할 경우 성장이 지속성을 가지기 어려운 취약한 기반위에 있었다. 실제로<표 5>의 인천지역 방적사와 토포의 상대가격 대비에서 방적사는 갈수록 토포가격보다 가격상승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더구나 “대개 방적사의 수입이 근년 현저하게 진보하여 증가해 오다가 수입이 감소된 것은…韓貨유통가격의 폭락과 면화작의 양호에 기인하는 것으로 특히 전자의 영향은 후자의 영향에 비해 한층 심하다”라는 인용문에서 보듯이 백동화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 현상은 수입상품의 가격을 등귀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448)≪通商彙纂≫臨時增刊 241, 1902년 12월 250일,<仁川34年貿易年報>(1902年9月 30日附在仁川帝國領事館報告). 이 같은 원료가격의 상승은 방적사의 수입에 근거한 토포생산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고 발전 전망 역시 제한적이고 불투명했다.

 그러므로 전통적 토포시장을 일본목면에 탈취당한 이들 지역의 토포생산은 당연히 위축되었고, 종래 면업과 면포생산에 기반한 부농경영의 성장은 이 시기 들어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수입방적사의 가격상승률은 계속 토포의 그것보다 높아지고 있었다. 더구나 방적사의 수입을 일본에 기대야 하는 처지여서 紡絲와 織布에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없는 한 생산의 지속은 직접생산자의 노임부분을 깎아 먹거나 이윤의 축소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발전 자체가 제한적·종속적인 것이었고 진정한 의미의 부르주아적 발전 전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연 도 인 천 부 산 연 도 인 천 부 산
1895
1896
1897
1898
1899
25.41
28.49
26.44

 
29.40
27.85
37.98

 
1900
1901
1902
1903
1904
27.17
27.73
28.78
30.04
33.54
28.24

31.29
32.90
30.88

<표 5>紡績絲와 土布의 相對價格 (紡績絲/朝鮮木綿)

*1. 河元鎬,<開港後 穀價變動硏究(1895∼1904)>(≪國史館論叢≫53, 1994).
 2. 紡績絲는 1擔 當 엔화가격, 朝鮮木綿은 1反 當 엔화가격.

 물론 일부 도시지역에서는 직포에 개량된 기계를 사용하는 등 새로운 시장환경에 대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왕의 연구에서도 광무연간에 서울을 중심으로 직물업의 발달이 어느 정도 있었음은 지적되어 왔다.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서면서 근대적인 방직공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직물회사의 설립이 적극 추진되었다. 1897년 안경수·서재필 등 독립협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大朝鮮苧麻製絲會社를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는 외국인과 합자하여 상해에 있는 비단제조소에 국내에서 생산되는 삼과 모시로 실을 만들어 수출할 목적으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1899년에는 정변조·이헌규 등의 자본가들이 중심이 되어 漢城紡績股本會社의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인 1897년 안경수를 중심으로 半官半民의 대한직조공장이 추진되었고 1898년에는 김익승의 주도로 직조권업장의 설립이 기도되었다. 그러나 이 공장들은 실제의 활동은 하지 못하고 자료에 단편적으로 설립에 대한 기록들만 남아 있다. 1900년대에 들면 방적사를 수입해 동력을 이용한 개량직기로 생산하는 직조공장이 여러 개 들어섰고 직물업이 상당히 진전되어 갔다. 하지만 값싼 일본산 기계제 면포에 대응하기에는 생산력 수준이 낮았고, 자본력도 열세였다. 따라서 당시 직물회사의 생산물은 수입면포와 직접적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제품에 집중되었다. 이들 회사의 생산품목은 기계화가 쉽지 않은 노동집약적 성격을 지닌 絹製品 생산에 집중되거나, 면제품을 생산하더라도 면포가 아닌 모자·학생복·양말·갓끈·허리띠 등 직물업의 주류에서 벗어난 상품이 대부분이었고 표백·염색 등 영업종목의 다변화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물품의 생산은 생산력과 자본력의 한계로 인하여 기계제 면포와의 정면대결을 피하기 위한 생존방식이었지만, 면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衣料市場에서 이들 제품의 비중은 지극히 낮았고 수입 면제품의 유입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도 될 수가 없었다.449)姜萬吉,<大韓帝國時期의 商工業問題>(≪亞細亞硏究≫, 16-2, 1973).
宮嶋博史, 앞의 글.
權泰檍,<韓末 日帝初期 서울地方의 織物業>(≪韓國文化≫1, 1980) 참조.

 원래 방적업의 발달에 따라 방적과 직포과정이 분리되고 면업이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것은 자본주의 발전에서의 일반적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방적업의 발달이후 방직업에 변화가 온 것이 아니라 수입방적사에 의존하는 형태여서 그 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고 대부분 소멸되어 성공적인 사례는 없었다. 더욱이 전통적 생산방식 아래 방적과 직포가 미분리된 농촌의 토포생산은 방적사와 면제품의 대량수입으로 그 존립기반 자체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고 종래의 부농경영의 한 축으로서의 면업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河元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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