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4. 교통·운수·통신
  • 1) 1894∼95년 교통·운수·통신제도의 개혁

1) 1894∼95년 교통·운수·통신제도의 개혁

 1894년은 한국의 개항기에 있어 한 분수령이었다. 이 때부터 조선정부는 경국대전의 체계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의 통치질서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교통·운수·통신제도에 있어서도 역제·봉수제·조운제를 폐지하고, 우편·전신·전화·기선·철도를 기반으로 하는 교통·운수·통신제도를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역제·봉수제·조운제는 사회경제적 기능과 운영방식 등에 있어서 전통적 통치질서의 일환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통치질서와 교통체계의 관련성은 역제를 통하여 잘 파악할 수 있다. 역의 사회경제적 기능은 중앙과 지방, 또는 각 군현간의 政令을 전달하는 기능, 官物이나 사신의 卜物 그리고 진상·공부 등을 운송하는 기능, 사신을 迎送하고 支待하며 역마를 세우는 기능 등이다.450)조병로,≪조선시대 역제연구≫(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44∼63쪽. 이중 진상·공부를 운송하는 기능은 공납제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고, 사신을 영송하고 지대하는 기능은 조공무역체계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운영방식을 보면, 驛民을 편성하여 그들의 노역을 동원하고 관리하는 입역제도와 분급된 驛田에 의해 재정을 충당하는 토지분급제도에 기초하고 있다.451)조병로, 위의 책, 354∼357쪽,

 갑오·을미개혁기에는 신역제를 폐지하였으며, 조공무역·조운제·공납제를 폐지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실시하여 국가에 의한 물자유통체계를 해체함으로써 민간에 의한 물자유통영역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기반하여 교통·운수·통신제도는 민간의 정보유통과 물자유통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지만, 크게 진전되지는 못하였다.

 당시 교통·운수·통신제도의 정비과정은 담당기관의 형성과정과 운영실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담당기관은 기획관리를 담당하는 중앙기관과 관련업무를 집행하는 현업기관으로 구성된다. 갑오개혁기에는 우선 중앙기관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1894년 6월에는 중앙관제를 8衙門으로 편성하였는데, 이중 工務衙門에 통신사무를 관장하는 국으로 驛遞局과 電信局을 두었으며, 철도를 관장하는 국으로 鐵道局을 두었고, 항구의 등대와 浮樁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燈樁局을 두었다. 이로서 교통·운수·통신을 관장하는 중앙관제는 마련되었다. 1895년 3월에는 중앙관제를 8아문에서 7部로 개편하였다. 이 관제개편은 교통·운수·통신사업에 관한 한 개악이었다고 평가된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전신·해운·철도를 장악하고자 하였는데, 중앙관제의 개편은 이러한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공무아문은 농상아문과 합쳐서 농상공부로 되었는데, 농상공부에는 교통·운수·통신을 관장하는 기관은 통신국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통신국 아래에 遞信課와 管船課를 두어 통신과 해운을 관장하게는 하였으나, 철도를 관장하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아서 철도관장기관이 없는 중앙관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통신과 해운을 관장하는 기관도 통신국 하나로 통합하여, 공무아문의 역체국과 전신국은 체신과로, 등장국은 관선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악속에서도 등장국에서는 없었던 선박과 해운 및 수운회사와 水陸운수사업의 관장사무가 관선과의 업무로 포함되는 발전적인 측면이 있었다.

 각 중앙기관이 관장하는 사무를 집행하기 위해서는 그 실행기관으로서 現業機關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갑오개혁 때에는 현업기관의 정비는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을미개혁에 와서야 우편사업을 수행하는 현업기관인 郵遞司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우편사업을 제외한 다른 사업을 집행할 현업기관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획관리기관의 창설에 비하여 현업기관의 창설이 더 늦고 불충분하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갑오개혁기에는 중앙관제의 개정만이 이루어졌을 뿐 지방제도개혁은 을미개혁기에 진행되었다. 교통·운수·통신의 현업기관은 기획관리기관의 지방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므로, 현업기관은 지방제도개혁 이후에 이루어졌다.

 둘째는 일본은 조선의 전신·해운·철도를 장악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조선정부의 전신·해운·철도 관련 현업기관의 창설을 막고 있었다. 전신사업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정부는 갑오개혁이전에 이미 전신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오개혁기 동안에는 청일전쟁에 의해 중단되었던 전신사업을 재개하기 위해 전신선을 복구하고, 영업개시를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새롭게 시작하는 우편사업이 실시될 때까지 현업기관이 창설되지 못하였다. 전신사업의 현업기관은 아관파천이후에야 만들어지게 되었다.

 셋째는 이들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이 취약하였다.

 한편, 우편사업은 을미개혁기의 지방제도개혁과 더불어 급진전되었다. 1895년 5월 26일에는 전국을 8道에서 23府로 재편하는 지방제도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지방제도개혁은 중앙정부의 지방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도된 것으로써, 이를 위해서는 효율적인 통신체계의 정비가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地方制度改正에 관한 件>이 나온 지 한달 후인 1895년 윤 5월 26일에<郵遞司官制>를 제정하여, 23부의 府所在地와 개항장 중 유일하게 부소재지가 아니었던 元山을 포함하는 24개 지역을 우체사 설치 예정지역으로 선정하였고, 이<우편사관제>에 의거하여 우체사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1896년 7월 25일에는 우체사의 설치가 일단락되었는데, 이 때 23부중 강릉·제주·갑산을 제외한 20府와 원산에 우체사가 설치되었으며, 수원에는 한성우체사지사가 설치되어 21郵遞司 1郵遞支司의 체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당시 우체사는 부소재지와 개항장에 한정되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개항장과 주요 행정중심지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뿐으로, 포구와 장시로 이루어진 말단의 상업네트워크를 포섭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성과 23부로부터 각 군으로 가는 행정통신망도 갖추지 못한 매우 빈약한 상태에 그치고 있다. 또한 당시에는 개항장에 일본의 우편국이 진출하여 우편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배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통신주권이 채 회복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전신사업은 갑오개혁이전부터 한성전보총국과 조선전보총국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전신사업은 청일전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그 변화의 첫째는 청일전쟁이전에는 1885년에 조선과 청국사이에 체결된<義州電線合同>에 의해 청국이 조선내 전신가설권과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청일전쟁에 의해 이러한 청국의 권리가 소멸됨으로써 조선정부의 전신사업에 대한 주권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둘째는 청일전쟁과 갑오농민전쟁으로 조선의 전신선 및 전신주가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이 서로전선과 북로전선을 강점하고 있었으며, 경인간과 경부간에는 군용전선을 가설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신선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전신사업권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정부는 電郵總局의 主事와 學員을 司事로 임명하여 전신선을 보수하게 함으로써 전신사업의 재개를 기도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의 전신선 강점으로 인하여 용이하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반면, 을미개혁기에 통신사업의 기획관리기관의 축소와 병행하여 사사의 일부만을 농상공부주사로 임명함으로써 전신사업의 재개에 투입된 인원을 감축시켰다. 한편 일본은 군용전선으로 가설된 경인선·경부선을 이용하여 公衆電報事業을 실시하였다.

 해운사업은 갑오개혁이전에는 이운사라는 관영기선회사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이운사는 조운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여객과 화물운송사업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조운제도를 폐지하면서 이운사의 해운사업 일체를 日本郵船에게 위탁하도록 하여 조선의 해운권을 장악하였다.

 이와 같이 갑오·을미개혁기에는 구래의 교통·운수·통신제도가 해체되었으며, 근대적인 교통·운수·통신제도의 정비가 시도되었지만, 당시 근대적 교통·운수·통신제도의 정비는 조선정부의 교통·운수·통신주권의 확립이나 조선인 상업의 발전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고, 오히려 일본에 의한 교통·운수·통신주권의 침해와 일본인 상인의 조선진출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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