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4. 교통·운수·통신
  • 3) 1905∼10년 교통·운수·통신기관의 식민지적 재편

3) 1905∼10년 교통·운수·통신기관의 식민지적 재편

 일본은 러일전쟁기간 중에 경부선과 경의선을 거의 완성하여 조선을 가로지르는 종단철도를 장악하게 되었으며, 1905년 4월 1일에는<한국통신기관위탁에 관한 협정서>를 조인시켜, 통신권을 장악하였으며, 1905년 8월 13일에는<한국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를 조인하여 일본선박의 조선내 활동에 대한 모든 제약을 제거하였다. 이를 통하여 일본은 조선의 교통·운수·통신을 체계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였다.

 우선 통신사업을 살펴보면, 1905년 4월 1일에 체결된 협정서에 기반하여 일본은 대한제국의 통신기관을 인수하여 재편하기 시작하였다. 재편의 방법은 일본 우편기관이 진출해 있는 지역은 조선의 우체사와 전보사를 일본 우편기관에 흡수통합하고, 일본 우편기관이 없는 지역은 대한제국의 우체사와 전보사를 인수하여 일본 우편기관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임시우체사는 일본이 인수하였지만, 인수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하였고, 명칭만을 임시우체소로 바꾸었다. 우편기관의 흡수통합과정은 한편으로는 일본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통신기관의 재편과정이었음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제국기에 축적되어온 조선인 기술관료를 구축하여 상급관리자-일본인, 하급노무자-조선인으로 하는 식민지적 고용구조를 창출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통신기관은 인수통합된 후 식민지재정제도의 창출과 식민지치안제도 창출의 첨병으로 활용되었다.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 재정고문이 추진한 재정개혁은 징세과정에서 군수를 배제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국고금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국고금을 취급할 수 있는 금융기관이 별로 존재하지 않아서, 우편기관에, 당시 일본에서도 실시되고 있지 않는, 국고금취급사무를 수행하게 하여, 국고금제도를 운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은행이 소재하지 않은 군에 소재하는 우편기관은 거의 모두 임시우체소였다. 임시우체소의 전신인 임시우체사는 군의 행정통신망을 우편사업에 포섭한 것으로서, 군수가 임시우체사장을 例兼하고 있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임시우체소를 그대로 국고금취급기관으로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주요한 군의 임시우체소를 우편취급소로 승격시켜 국고금취급사무를 취급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시우체소도 일본인이 장악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또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감에 따라 조선인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인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치안통신망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 치안통신망을 구축하기 위해 경비전화제도를 창설하였다. 경비전화망을 구축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대한제국의 예산으로 마련하였으며, 그 건설 및 운영은 통감부 통신관리국이 수행하였다. 경비전화제도는 대한제국의 예산으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치안통신망을 구축하는 제도였다. 또 이 경비전화망을 공중통신망으로 사용하여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정보수집활동을 지원하였다. 이 시기에 통신기관의 업무는 우편·전신·전화와 같은 고유한 통신업무와 국고금취급사무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운송대행업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소포우편, 자금결제수단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우편환과 우편대체(postal giro), 영세자금의 동원수단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우편저금 등을 모두 취급하여,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기관으로 정비되고 있었다.

 다음으로 해운사업을 살펴보면, 1905년 8월 13일<한국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에 의해 일본선박의 영업범위에 대한 제한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해운보조제도를 만들어 대한제국의 예산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게 하였는데, 이 보조금의 지원을 받은 대상은 일본인 기선회사에 한정하여, 구래에 조선인 기선회사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항로들을 일본인 기선회사가 대체하도록 하였다.

 철도사업의 경우, 1907년 7월 1일부터 조선의 각 역과 일본의 각 역간의 여객·수화물·화물의 연대급을 취급하였으며, 1907년 9월 20일부터 조선 각 역과 안동역간의 여객 및 화물의 연락운수를 실시함으로써, 일본과 조선과 중국을 연결하는 대륙진출의 교두보로서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철도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는 일본군의 수송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철도역은 일본인이 조선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발전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대한제국의 교통·운수·통신망은 상권보호라는 성격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이러한 성격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교통·운수·통신망에 존재하고 있었던 상권보호의 측면이 사리지게 됨으로써 일본인의 조선인 상권으로의 침투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업권의 독점에 기반한 특권적 상인집단은 쇠퇴하여 갔다. 그러나 이 속에서도 영업권의 독점에 기반한 특권적 상인집단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조선인 상인이 성장하고 있었음은 간과할 수 없다. 일본인 상인의 경쟁력은 일본제국주의의 지원에도 기인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교통·운수·통신기관을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물류체계의 효율화를 기하여 신결합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의 우위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조선인 상인 중 일부는 이들 일본인 상인과 경쟁하기 위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정보를 수집하고 물류체계의 효율화를 기하여 신결합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조선인 상인층의 동향은 조선인 소포우편물의 성장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는 등기소포만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등기소포는 가볍고 부피가 적은 고가품의 배달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조선인 소포우편물의 성장은 소포우편을 수단으로 하여 이 고가품의 판매시장에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 이러한 상인층의 성장은 식민지시기에 교통·운수·통신수단을 일본시장개척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조선인의 성장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둘째는 인적자본의 축적과 관련된 문제이다. 대한제국기에는 통신사업에 있어서 조선인 인적자본이 상당정도 축적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통신기관을 탈취하면서, 이 조선인 인적자본을 통신기관으로부터 구축시켰다. 그리고 필요한 인원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를 통하여 상급관리자-일본인, 하급노무자-조선인이라는 식민지적 고용구조가 창출되었다. 선원의 경우에는 이 시기에 어떠한 고용구조를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1914년의 고용구조를 보면, 상급기술자-일본인, 하급노무자-조선인이라는 식민지적 고용구조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철도의 경우에도 이 시기 고용구조가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없지만, 그 이후의 자료를 통하여 고찰하면, 상급관리자-일본인, 하급노무자-조선인이라는 식민지적 고용구조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486)정재정, 앞의 책, 511쪽. 그러나 해운과 철도에서의 식민지적 고용구조의 형성과정은 통신사업에서와는 달리 형성되어 있었던 조선인 기술관료를 일본인으로 대체하는 과정은 아니었다. 대한제국기에 선원이나 철도직원으로 성장한 조선인은 매우 미미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교통·운수·통신사업과 관련된 산업에서의 조선인의 성장과 관련된 문제이다. 일본은 조선인의 해운계 진출을 철저히 방해하는 정책을 고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해운대리점업, 회조업, 화물중개업 등에 침투하는 것도 억제하여,487)≪한국해운항만사≫(해운항만청, 1980), 234쪽. 이 분야에 있어 조선인의 성장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철도와 관련된 소운송업에 있어서는 철도국이 승인운송점제를 도입하여 일본인이 소운송업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도록 하였지만, 조선인 소운송업도 상당히 발전하여 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488)정재정, 앞의 책, 565∼567쪽.

 이 시기에는 조선인 상권의 보호체계가 사라진 상태에서 도고상업체계는 와해되어 가고 있었으며,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상권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인은 식민지 교통·운수·통신체계와 무관하게 존재하거나 아니면 말단부에 편입되어 있는 형태였다. 식민지기에는 장시·포구의 네트워크까지 근대적인 교통·운수·통신 네트워크에 포섭되었는데,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 경향은 통감부의 정책에서도 그리고 조선인의 동향에서도 포착할 수 있다. 통감부는 우편기관과 철도기관을 이용하여 주변의 물류체계를 조사하여 이를 장악할 교통·운수·통신네트워크를 구상하고 있었으며, 조선인중 일부는 근대적인 교통·운수·통신수단을 자신의 성장의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대부분의 조선인은 교통·운수·통신기관을 자기 개발의 수단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의 상징으로 파악하여, 철도역과 우편국, 철로와 전신선은 의병의 주된 공격대상이 되었다.

<朴二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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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대한제국이 경영하는 郵便機關(1905년 3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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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대한제국이 경영하는 電信機關(1905년 3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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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일본이 경영하는 通信機關(1905년 3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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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1905∼1910년 主要道路와 鐵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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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1905∼1910년 海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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