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5. 상업적 농업의 재편과 지주제의 성장
  • 1) 한말 지주적 토지소유의 강화와 상업적 농업의 재편
  • (2) 상업적 농업의 종속적 재편과 일본자본의 토지약탈

가.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상업적 농업의 재편

 일본은 1894년에 기습적인 전쟁도발로 청국을 구축하는 한편 친일내각을 앞세워 농민전쟁을 진압함으로써 조선을 자국의 독점적인 식민지로 강점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정책은 요동반도 할양을 둘러싼 프랑스·독일·러시아의 이른바 삼국간섭과 민비시해사건에 촉발된 조선에서의 의병운동에 부딪쳐 일단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즉각 러시아와 협상을 벌여 조선에서의 이권을 균점하는 조건으로 조선에서 자신이 탈취한 경제적·군사적 기득권을 고수하고, 나아가 이를 더욱 확대하면서 영국과 미국에 접근해 러시아를 구축할 방도를 모색하였다.496)朴宗根,≪日淸戰爭と朝鮮≫(東京:靑木書店, 1982). 그리하여 일본의 경제적 침략은 1896년 이후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협력해 목포·진남포·마산·성진을 추가로 개항시켰고, 일본 상인에 대한 영업구역 제한을 사실상 철폐시켰으며, 조선의 중요 도시들과 정거장·항만 등에 상점·공장·경찰서·헌병대 등으로 구성되는 경제침략요새를 건설하였다. 또한 철도와 전신의 부설권을 탈취하였고, 금광을 위시해 철·동·흑연광의 채굴권을 강탈하였다. 이에 기반해 일본은 자국에서 생산한 자본제 상품들을 아무런 제한없이 조선 전역으로 침투시켰으며,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불가결하였던 쌀·콩·牛皮·금·철광석 등을 대량으로 수탈하였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수출은 1893년에 130만 円이던 것이 1900년에는 995만 엔, 1904년에는 2,039만 엔으로 폭증했으며, 조선으로부터의 수입도 1893년 252만 엔에서 1900년에는 1,178만 엔, 1904년에는 1,154만 엔으로 확대되었다.497)村上勝彦,<植民地>(≪日本産業革命の硏究-確立期日本資本主義の再生産構造≫, 東京大學 出版會, 1975).

 일본의 경제적 침략이 확대되고 조선과 일본간의 무역이 증가할수록 조선 경제에는 심각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장 주목할 변화는 면업, 鐵手工業 등 조선의 농촌 수공업이 급속히 궤멸해 간 것이었다. 면업과 철수공업 등은 개항후 상품경제가 일층 더 발전함에 따라 자본제 수공업경영으로까지 성장하였다. 가령 면업의 경우 18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진주·의성 등 면업중심지에는 여러 명의 직공을 고용하여 전업적으로 목면을 상품생산하는 부농경영이 다수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농경영은 1895년 이후 값싼 일본 면포가 아무런 제약없이 무차별적으로 국내시장에 침투하면서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조선농민들은 19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수입한 방적사를 이용해 일본 수입면포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환율변동으로 수입방적사의 가격이 인상되자 그 또한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05년 이후가 되면 조선의 면업은 자가용 농가부업으로 몰락하였다. 군사적 침략을 앞세운 일본의 이러한 경제침략은 결국 조선의 주요 수공업을 거의 다 궤멸시켰고, 조선을 일본의 상품판매지로 재편시켰던 것이다.498)梶村秀樹,<李朝末期の棉業の流通と生産構造>(≪朝鮮に於ける資本主義の形成と發展≫, 東洋文化硏究所, 1968).
宮嶋博史,<土地調査事業の歷史的前提條件の形成>(≪朝鮮史硏究會論文集≫12, 1975).

 다른 한편 일본은 조선에서 쌀·콩 등의 농산물을 대량으로 매집해 자국으로 수입해 갔다. 당시 일본은 殖産興業을 위한 자본을 농업수탈에서 조달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국 농업의 생산력만으로는 일본 자본주의의 국제경쟁력이 되었던 ‘저임금=저곡가 체제’를 도저히 유지할 수 없었다. 이에 일본은 1895년 이후 쌀과 콩을 중심으로 하는 값싼 곡물을 대량으로 조선에서 수입하는 정책을 취했다. 일본은 정치적·군사적 압박으로 조선의 방곡령을 무력화시키면서 자국 상인들을 주요 곡물산지에 침투시켜 곡물을 수집하였다.499)吉野誠,<李朝末期に於ける米穀輸出の展開と防穀令>(≪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河元鎬,<開港後 防穀令實施의 原因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49·50·51, 1985).
이로 인해 쌀과 콩의 상품성이 높아지면서 농업생산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상품성이 하락하고 있던 면화 대신 콩을 재배하는 농가가 증가하고, 콩 재배를 위해 개간이 이루어 졌다. 그리하여 다각적으로 발전해 왔던 조선의 상업적 농업은 점차 일본 수출곡물이었던 쌀과 콩으로 단순화되어 갔던 것이다.500)李潤甲,<1894∼1910년의 상업적 농업의 변동과 지주제>(≪韓國史論≫25, 서울대 국사학과, 1991).

 일본의 경제적 침략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조선과 일본 사이에 쌀·콩 등을 수출하고 면제품을 위시한 각종 공산품을 수입하는 종속적인 국제 농공분업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변동은 국내적인 분업관계의 발전에 기반해 전개되었던 다각적인 상업적 농업을 몰락시킴으로써 농민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농민경제의 몰락은 면화나 면포를 생산했던 지역일수록 더욱 심각하였다. 또한 화폐를 취득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게 됨으로써 조선의 농민들에 대한 일본 상인의 고리대 자본이나 前貸資本의 지배력은 갈수록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농민의 토지상실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그것은 지주제가 확대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었다. 다른 한편 곡물 상품화의 확대는 지주들로 하여금 지대수취를 강화하고, 토지소유를 확대하며, 지주제를 상업적으로 경영하도록 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