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5. 상업적 농업의 재편과 지주제의 성장
  • 2) 지주제의 재편과 소작조건의 변동
  • (1) 토지겸병의 확대와 식민지 지주제로의 재편

(1) 토지겸병의 확대와 식민지 지주제로의 재편

 대한제국의 농업정책이나 일본의 농업식민책이 지주적 토지소유를 보호하고 지주제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고, 다른 한편 일본으로 곡물수출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지주경영의 수익성이 높아지자 지주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변화되었다.

 그 변동 양상을 살피면 우선 지주들의 토지겸병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토지겸병은 먼저 조선인 지주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농민층의 반봉건투쟁이 급격히 고양되었던 1894년까지는 지주층의 토지소유 그 자체가 매우 불안정하였다. 지주가 농민들의 저항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를 보유하지 못하는 한 지주경영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소작인 관리가 철저하지 못했던 궁방전에서도 나타났다.505)李榮薰,<開港期 地主制의 一存在形態와 그 停滯的 危機의 實相>(≪經濟史學≫9, 1985). 그러나 1894년의 농민전쟁 진압을 계기로 이후 지주적 토지소유가 확고해질 수 있게 되자 지주들은 경쟁적으로 토지겸병에 나섰다. 개별 지주가에 대한 사례연구를 보면 羅州 李氏家나 古阜 金氏家 등 상당수의 지주가 이 시기에 토지소유를 확대하고 있었다.506)金容燮,<韓末·日帝下의 地主制-事例 3, 羅州 李氏家의 地主로의 成長과 農場經營>(≪震檀學報≫42, 1976).
―――,<韓末·日帝下의 地主制-事例 4, 古阜 金氏家의 地主經營과 資本轉換>(≪韓國史硏究≫19, 1977).
지주층의 토지 겸병은 당시 일본의 경제적 침략으로 농민들이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지주들은 곡물판매로 얻어진 수입으로 몰락하는 농민들이 방매한 토지를 구입하기도 했으나, 주로 고리채를 매개로 토지소유를 늘려갔다. 농민들의 대부분은 지주로부터 農糧이나 農資金을 빌려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주들은 이를 년간 이자율이 5할을 상회하는 長利나 甲利로 대부하여 원리금을 갚지 못하면 대신 토지를 빼앗았던 것이다.

 이 시기 지주층의 토지겸병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각도별≪小作慣行調査≫가 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하였던 소작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소작관행을 조사한 바 있었다. 이 때 ‘대지주로 성장한 연대’를 조사하였는데 1894년에서 1910년사이에 토지를 겸병해 대지주로 상승한 경우가 다수를 점했다. 다음으로 보다 상세하게 충청남도의 조선인 대지주의 창업연도를 조사한 자료가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총 89명의 지주 가운데 1894년에서 1910년 사이에 토지를 겸병해 대지주가 된 경우가 30건에 달한다. 전체 대지주 가운데 창립연도가 밝혀지지 않은 21건을 제외하면 약 4할에 달하는 지주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토지를 겸병해 대지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507)宮嶋博史,<植民地下朝鮮人大地主の存在形態に關する試論>(≪朝鮮史叢≫5·6, 1982).

  1875년
이전
1876
∼1893
1894
∼1903
1903
∼1910
1911
∼1920
1921
∼1930
미 상
공 주
연 기
대 전
논 산
부 여
서 천
보 령






 
1




1
 
2


3


 

1

7


 

1




 
1


2


 
5


1


 
9
2

13

1
 
청 양
홍 성
예 산
서 산
당 진
아 산
천 안
2
1




 
1
1
2
4


 

1
2
3
2
1
 


1
3
2

 


3
4


 



1


 



2

1
 
3
3
8
17
4
2
 
서 울
인 천
고 양
대 구
  2


 
2


 
  6
1
1
1
2


 
12


 
24
1
1
1
3 12 16 14 17 6 21 89

<표 1>충청남도의 조선인 대지주의 군별·창업연도별 분포

*安薺霞堂,≪忠淸南道發展史≫(湖南日報社, 1930), 269∼300쪽.

 그러나 이 시기의 토지겸병에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보인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당시 한국의 지가는 일본에 비해 5분의 1에서 최고 30분의 1까지 저렴하였고, 따라서 지주경영을 할 경우 풍흉을 평균하더라도 1할 8분의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는 일본에서의 지주경영에 비교해 무려 1할 4분이나 높은 수익률이었다.508)金容燮,<日帝의 初期 農業殖民策과 地主制>(≪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92). 따라서 일본인들은 적극적으로 조선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을 개설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인의 토지겸병은 1900년대 초반부터 몰락농민의 토지를 잠매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의 토지겸병은 한국정부가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불허함으로써 본격화되기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면서 이러한 제약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한국의 토지법제를 개정하게 하는 등 농업식민책을 본격화함으로써 일본인의 토지겸병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그 결과 적게는 수십 정보에서 많게는 무려 6천여 정보에 이르는 대토지를 겸병해 지주제 농장을 창설한 일본인 회사수가 1908년에 이미 29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중에서 1909년말 현재 비교적 큰 규모의 농장을 개설했던 일본인 회사들의 토지겸병실태를 보면<표 2>와 같다. 이 표를 보면 韓國興業株式會社가 황주·나주·무안·해남·함평·김해·양산 등의 곡창지대에서 무려 6,095정보에 달하는 농지를 겸병하였고, 히가시야마 농장과 무라이 농장이 4천 정보를 상회하는 토지를 겸병하였으며, 1천 정보 이상의 토지를 겸병한 회사가 8개나 되며, 이들 15개 농장회사가 겸병한 토지만도 무려 2만 7천여 정보에 달했다.

회 사 명 토지소유면적
(정보)
소유지 분포 지역
한국흥업주식회사
히가시야마 농장
무라이 농장
오꾸라 농장
아사히 농장
구마모도 농장
모리 농장
호소가와 농장
한국실업주식회사
우지모또 농장
구니다께 농장
이시까와현농업주식회사
오하시 농장
미야사끼 농장
오쯔까 농장
6,095
4,293
4,212
2,380
1,780
1,590
1,520
1,008
980
914
900
736
499
488
525
황주·나주·무안·해남·함평·김해·양산
수원·안산·광주·과천·전주·김제·익산·영암·나주·함평
김해·창원·함안·양산
익산·금구·만경·김제
강진·나주·무안·광주
김제·금구·태인·고부
황주·용강
김제·익산·만경·은율·전주
무안·함평·해남·나주·영암·강진
옥구·임피·익산·여산·임천·은율·석성·구성
수원·남양·안산
김제
익산·김제·만경
옥구·임피·익산·만경
영일·흥해
27,919  

<표 2>1900년대의 일본인 농장회사의 토지겸병 실태

*山口 精,≪朝鮮産業誌≫上(寶文館, 1910), 709∼710쪽.

 일본인의 토지겸병은 1908년 일본이 東洋拓植株式會社를 설립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일본은 1908년 식민지 침략의 별동대 역할을 담당할 국책회사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일본은 이 회사를 설립하면서 한국정부에 300만 원의 출자를 요구하였다. 이에 한국정부는 역·둔토와 宮庄土 가운데서 東拓이 사업을 경영하기에 가장 유리하고 우량한 團聚地 9개처를 선정하여 총 17,714정보의 농지를 동척에 인도하였다.509)한국정부가 출자한 토지는 9,932정보였으나, 이는 結負·斗落·日耕으로 측량된 면적을 町步로 환산한 수치였다. 이 토지를 실측하였을 때 17,714정보가 되었다. 동척은 정부출자지를 인수함과 동시에 이 농지를 중심으로 주변의 농지를 대량 매입하여 일거에 64,862정보의 토지를 겸병하는 대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일본인의 토지겸병은 국유화된 역둔토를 불하받거나<국유미간지이용법>(1907)에 의해 대부받은 미간지를 개간하여 불하받는 방식으로도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인 개인 및 회사 또는 일제가 겸병한 토지는 무려 40여 만 정보에 달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선인 지주 및 일본인 지주·자본가의 이러한 토지겸병이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그것도 곡물운송과 유통에 편리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표 2>를 보면 일본인 지주·자본가들은 철도로 곡물을 운송할 수 있는 경부선 유역이나, 배를 이용해 강 또는 바다의 수로로 곡물을 운송할 수 있는 김제·만경·익산·나주·광주·해남·김해·영일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농장을 개설하였다. 일본인의 토지투자는 소작료 취득에 목적을 두었고, 소작료로 취득한 곡물은 상품으로 판매되어야만 이윤을 실현할 수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겸병도<표 1>을 보면 유통조건이 좋은 지역일수록 더욱 활발하였다. 충청남도에서 대지주의 형성이 두드러진 지역은 금강을 수송로로 이용할 수 있었던 공주·논산과 서해 수로를 통해 바로 곡물을 반출할 수 있었던 예산·서산·당진이었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현상은 일부 지주들이 유통조건이 좋은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고부 김씨가의 당초 세거지는 고부군 富安面이었다. 그러나 이 곳은 치안상의 문제도 있었고 소작료를 판매할 茁浦港까지 거리가 멀어 지주경영을 발전시키기에 애로가 많았다. 이 애로를 타개하기 위해 김씨가는 1907년 곡물 운송항이었던 부안군의 줄포로 이사하였으며, 그것이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는 한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510)金容燮, 앞의 글(1977).

 이러한 현상은 이 시기의 지주제가 양적으로 확대되어 갈 뿐만 아니라 구조나 성격면에서도 일본이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자본가들을 앞세워 추진하려 했던 농업식민책의 의도대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특히 농업식민책에 규정되어 지주경영과 유통경제의 결합이 갈수록 강화되면서 한국의 지주제가 일본 자본주의의 하위체계로 편입되어 들어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한국의 지주제는 점차 소작농민에 대한 수탈로 일본 자본주의의 농업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지주·자본가의 식민지 초과이윤을 실현하는 식민지 지주제로 전환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선도한 것이 다름아니라 한국에 진출해 농장을 개설한 일본인 지주·자본가들이었다.

 지주제의 성격이 이와 같이 변화하고 있었으므로 지주 구성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일제의 농업식민책에 적극적으로 편승하고 유통경제에 잘 적응하는 지주일수록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한 지주경영을 대표했던 것이 기업형 일본인 농장들이었고, 조선인으로서는 고부 김씨가였다. 그리하여 일본인 대농장들은 단기간에 조선의 지주제 전반을 선도하는 중핵으로 성장하였으며, 고부 김씨가도 100정보를 소유하던 지주에서 불과 십수년만에 2,000정보가 넘는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지주구성을 보면 조선인 서민지주층의 증가가 두드러지는데, 이들은 거의가 유통경제 속에서 성장한 상인이나 부농 출신들로 거기서 축적한 부로 토지를 매입한 자들이었다. 나주 이씨가의 지주로의 성장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일제에 저항한 지주들이나 아니면 지주경영을 구래의 봉건적 특권에 의존하려 했던 양반 지주들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거나 급속히 몰락하였다. 개항후 강화지방에서 곡물수출로 지주경영을 크게 성장시켰던 김씨가가 1907년 의병운동을 지원하게 되면서 이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경우가 그것이었다.511)金容燮,<韓末·日帝下의 地主制 -事例 1, 江華 金氏家의 秋收記를 통해서 본 地主經營>(≪東亞文化≫11, 서울대,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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