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1. 인구의 이동과 변화
  • 1) 인구의 변화와 도시의 발전
  • (4) 도시의 발전과 도시인구

(4) 도시의 발전과 도시인구

 필자는 위에서 1907년에 한국정부 경무고문부가 그 휘하의 경찰조직과 군·면 행정력을 동원하여 조사 집계한≪한국호구표≫를 기본 자료로 하여 대한제국시대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와 그 도시인구율 및 인구밀도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경무고문부라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행정력을 구사하기에는 아직도 미흡한 상태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실토하고 있듯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실정하에서 통계의 정확성을 기대할 성질의 것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고종시대·대한제국시대 호구조사 중 군·면에 이르기까지 조사·집계한 자료로는 유일한 것이고 통감부 및 고문부가 장차의 영구집권을 목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바탕으로 갑오개혁후 1910년까지의 도시인구 분석·경향 등을 판단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에는 원칙적으로 3년에 한번씩 즉 간지의 子·卯·午·酉에 해당하는 해에 8도의 호구수를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를 한성부에 이송하면 한성부가 이를 정리 집계하여 그 결과를 한성판윤이 매 식년 12월 1일에 국왕에게 보고한 후 1부는 한성부가 보관하고 또 1부는 강화도로 보내어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국왕에게 보고한 호구수 집계는 3년 식년마다의 왕조실록 말미에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왕조실록에 기록된 호구수는 전국 8도와 한성부의 인구수뿐이며 그 밖의 지방 부·군·현·면의 인구수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왕조 후기의 호구수 기록 중에서 유독 정조 13년(1789) 을유년식의 부분은≪호구총수≫라는 이름의 책으로 묶이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이≪호구총수≫에는 각 도 및 한성 5부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각 부·군·면에 걸쳐 그 호구수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 지방도시의 인구 규모를 알 수가 있다.

 필자는 1975·76년에 이≪호구총수≫를 가지고 위의≪한국호구표≫를 분석한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분석·정리하여 1789년 당시의 인구 5,000명 이상 부·면 49개, 도시인구 총수 571,663명, 전국인구수에 대한 도시인구율 7.8%, 도시인구 밀도 ㎢당 185.74명을 계산하여 발표한 바 있다. 참고로 당시의 전국 인구밀도 평균은 ㎢당 33.5명이었다.540)손정목, 앞의 책, 209∼226쪽.

 조선왕조시대 후기에서 대한제국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어떤 도시가 있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에 관한 연구를 하려면 부득이 위의 두 자료 즉≪호구총수≫와≪한국호구표≫의 두개 기록을 대조할 수밖에 방법이 없다. 다른 아무런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개의 자료간에는 118년 즉 약 1세기 남짓한 세월이 흐르고 있다. 조선왕조시대 후기의 경우 1876년 개항이후<한일수호조규>체결때까지 경향간에 이렇다할 변화의 요인이 없었다. 이 땅안의 지역질서상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개국을 한 후부터였고, 특히 부산·원산·인천·목포·진남포·군산·성진·마산 등이 개항장이 되어 일본전관거류지·외국공동조계등이 개설되고 아울러 한성·용산·평양 등이 開市場이 되어 외국인의 통상·거주가 허용된 뒤의 일이다. 우선 이들 지역이 개항장·개시장이 된 연도를 열거하면 각각 아래와 같다.

부산 : 1877년 1월 30일(음력 1886. 12. 17) 원산 : 1880년 5월 1일 인천 : 1883년 9월 30일 한성 : 1882년 10월 3일(중국인), 1883년 11월 26일(영국인, 독일인 기타) 용산 : 1884년 10월 6일 목포·진남포 : 1897년 10월 16일 군산·성진·마산 : 1899년 5월 1일 의주 : 1904년 2월 25일 용암포 : 1904년 3월 23일 청진 : 1908년 4월 1일

 위에서 열거한 각 도시에 일본인·중국인·구미인이 와서 정주한 것도 매 년도마다 동일한 수가 아니었고 각 지역마다 같은 비율이 아닌 것은 물론이었다. 청일전쟁전과 그 후가 달랐다. 여하튼 개항후 가장 많은 외국인,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인이 많이 들어와 정착한 것은 부산·인천·한성의 3대 도시였고 그 다음이 용산이었다.541)용산은 한성부당시부터 한성부의 일부였으나 일본인 거류민단이 별도로 설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계도 각각이었다.

 아래에 위 4개 지역 일본인 증가수를<표 5>∼<표 8>로 소개해 둔다.

연 도 호 수 인 구 연 도 호 수 인 구 연 도 호 수 인 구
1876 - 82 1889 628 3,033 1900 1,082 6,067
1879 - 700 1890 728 4,344 1901 1,250 7,029
1880 402 2,066 1891 914 5,254 1902 1,352 9,691
1881 426 1,925 1892 938 5,110 1903 1,582 11,711
1882 306 1,519 1893 993 4,750 1904 1,891 11,996
1883 432 1,780 1894 906 4,028 1905 2,363 13,364
1884 430 1,750 1895 952 4,953 1906 2,981 15,989
1885 463 1,896 1896 986 5,423 1907 3,423 18,481
1886 488 1,957 1897 1,026 6,065 1908 4,213 21,292
1887 - 2,006 1898 1,055 6,242 1909 4,284 21,697
1888 - 2,131 1899 1,100 6,326 1910 4,508 21,928

<표 5>부산 일본인 호구표(1876∼1910)

*井上淸磨,≪釜山を擔ぐ者≫(釜山:大朝鮮社, 1931), 17∼22쪽에 의하여 作表.

연 도 호 수 인 구 수 연 도 호 수 인 구 수
1883 75 348 1897 792 3,949
1884 26 116 1898 973 4,301
1885 109 562 1899 985 4,218
1886 116 706 1900 990 4,215
1887 112 855 1901 1,064 4,628
1888 155 1,359 1902 1,221 5,136
1889 167 1,362 1903 1,340 6,433
1890 255 1,616 1904 1,772 9,403
1891 338 2,331 1905 2,853 12,711
1892 388 2,540 1906 3,067 12,937
1893 425 2,504 1907 2,922 11,467
1894 511 3,201 1908 3,830 11,283
1895 709 4,148 1909 3,025 10,907
1896 771 3,904 1910 3,446 13,315

<표 6>인천 일본인 호구표(1883∼1810)

*≪仁川府史≫(仁川府, 1933), 6쪽.

연 도 호 수 인 구 수 연 도 호 수 인 구 수
1885 19 89 1898 480 1,734
1886 34 163 1899 522 1,985
1887 64 245 1900 549 2,115
1888 86 348 1901 639 2,490
1889 130 527 1902 797 3,034
1890 137 523 1903 902 3,673
1891 157 698 1904 1,350 5,323
1892 169 715 1905 1,986 7,677
1893 234 779 1906 3,216 11,724
1894 260 848 1907 4,300 14,829
1895 500 1,839 1908 6,347 21,789
1896 479 1,749 1909 7,745 28,788
1897 471 1,588 1910 8,794 34,468

<표 7>한성 일본인 호구표(용산합병전)

*1.≪京城發達史≫(京城居留民團役所, 1912), 421∼423쪽.
 2. 1885∼1909년은 12월 말, 1910년은 9월 말 현재임.

연 도 인 구 수 연 도 인 구 수
1897 35 1904 350
1898 46 1905 1,700
1899 52 1906 2,579
1900 65 1907 3,142
1901 80 1908 6,300
1902 150 1909 10,035
1903 192 1910 10,638

<표 8>용산 일본인수

*≪京城府史≫2卷(京城府, 1934∼41), 1,055쪽.

 개국·개항후 대한제국말까지 이 땅의 지역질서에 변화를 가져다 준 두 번째의 요인은 항만·철도·전신·전화 등 근대적 교통·통신수단의 도입이었다. 유치하기는 했으나 부산·인천·원산·진남포·군산 등지의 해안이 수축되어 항만이 되었고 다수의 외국선박이 드나들어 무역이 성행하였으며 경인선·경부선·경의선 등의 철도가 부설되었다. 인천·노량진간의 철도가 개통된 것은 1899년 9월 18일이었고, 경부선 서울∼초량간이 개통되어 운수 영업을 시작한 것은 1905년 1월 1일부터의 일이며, 경의선 용산∼신의주간이 운전 개시된 것은 1906년 4월 3일이었다.

 지역질서를 바꾼 세 번째의 요인은 도시내의 신 시설이었다. 경복궁내에 전등이 가설되어 점등된 것은 1885년말 경이었고, 서울시내에 전차가 운행개시 된 것은 1899년 5월 17일 (음력 4월 초파일)이었으며, 종로 네거리에 전등이 밝혀진 것은 1900년 4월 10일이었다. 1900년 당시에는 이미 자전거도 들어와 있었고 인력거도 달리고 있었다. 부산·서울의 일본인 집단지역에는 상수도도 가설되어 있었고 도로도 확장되고 파출소도 개설되고 있었다. 개국·개항후 특히 청일전쟁이 끝나고 갑오개혁이 시작하는 1895년부터의 15개년간 이 땅의 도시 지역에서는 실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정조 13년(1789)의≪호구총수≫와 광무11년(1907)의≪한국호구표≫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 두개의 자료가 기록되는 약 1세기 남짓이 흐른 기간내에 전국의 인구수는 약 248만 명 정도가 늘었고, 인구 5천 명 이상의 도시수는 8개가 더 늘었으며, 도시인구수는 571,663명에서 756,225명으로, 절대수로는 184,500명 정도, 비율로는 32%정도가 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1789∼1907년의 도시인구간에 어떤 변화, 어떤 차이가 일어났는가를 고찰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개항후 35년간의 도시화과정은 그 동안에 개항장·조계제도와 다수 외국인의 이주정착, 철도·전기·전차 등 새로운 도시적 시설의 도입, 국민의식의 각성 등 도시화를 급격히 촉진시킬 요인들이 겹쳤는데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대단한 인구의 도시집중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커다란 도시에의 인구유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병인 및 신미양요, 천주교도 탄압·갑신정변·동학난·청일전쟁·단발령·노일전쟁·을사보호조약, 통감부와 이사청의 설치 등 어지러운 세태가 계속된 데다가 여러 차례의 콜레라의 만연,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의 횡행과 방자한 언동, 애기소동542)손정목,≪韓國開港期 都市變化過程硏究≫(一志社, 1982), 245∼246쪽.으로 대표되는 對외국인협오증, 일본인 壯士 및 군인들의 횡행, 헌병 및 경찰들의 위압, 일본인의 부동산 매점 등의 요인들이 겹쳐 많은 사람들 특히 사대부계층들의 낙향·도피·은둔 등의 현상이 일어난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수도 한성부의 인구규모는 조선왕조 중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약 200년간에 걸쳐 언제나 18만 명에서 20만 명을 전후하는 선에서 强保合을 계속했었다.543)손정목, 앞의 책(1977), 204쪽. 고종시대에 들어와서도 고종 즉위년(1863)에서 동 9년까지는 20만 명을 밑돌지 않았으며 그후는 19만 명 대의 인구규모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광무11년(1907)의 한성의 인구규모는<표 2>에서 고찰한 대로 218,225명이었고 그 중에서 한국인은 199,325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일본인·중국인·구미인이었다. 개항후 전기·전차·상수도·공원 등 근대적 도시시설이 도입되었을 뿐 아니라 천주교·개신교도 깊은 뿌리를 내렸고 주민의식의 근대화도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앞장서 가장 도시화가 진전되었다고 보아야 할 수도 한성에 있어서 한국인의 수는 조금도 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소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도시 기피현상 특히 각 지방 동족부락에 별도의 생활기반을 가졌던 사대부계층의 낙향이 두드러진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544)이점에 관하여는 손정목, 위의 책, 161∼165쪽 참조.

 셋째, 정조 13년(1789)에 인구규모 5,000명 이상의 49개 도시 중 부·목·군·현의 청사 소재지 즉 이른바 읍이 아닌 곳은 동래부내의 부산과 온천장이던 온양뿐이었다.545)손정목, 위의 책, 222쪽. 그런데 광무 11년에는 고을(읍)이 아니던 곳이 부산·삼랑진·김천·구포·사상·병영·삼천포의 7개로 늘어났고, 또 개항전에는 고을의 소재지가 아니었는데 개항후에 감리서가 설치되었거나 分郡이 되어 새롭게 고을(읍)이 된 곳으로 인천·원산·마산·목포·진남포·성진의 6개가 있다. 또 정조 13년에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에 들었던 강화·廣州·양주·연안·당진·부여·온양·아산·태인·나주·영유·성천·정주·안주·창성·초산·상원·덕천·가산·선천·길주·단천·홍원 등 23개 고을이 광무 11년에는 밀려났고, 그 대신에 인천·원산·통영·마산·삼랑진·수원·원주·철원·이천·제천·남원·목포·김천·예천·성주·구포·사상·창원·울산·병영·삼천포·고성·남해·하동·배천·봉산·진남포·개천·박천·북청·성진의 31개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즉 49개 고을 중 약 반수가 밀려났고 57개의 반수 이상은 새롭게 등장한 것이니 개항기를 통하여 그만큼 지역구조상에 변화가 일어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넷째, 광무 11년의 57개 도시 중 수원은 정조 13년 이후에 새로 생긴 조선시대 후기의 신도시이고,546)손정목, 위의 책, 402∼451쪽. 인천·목포·마산·진남포·원산·성진은 개항으로 인하여 새롭게 생긴 도시들이며, 강원도의 이천과 평남의 개천은 광산물 생산의 중심지이고, 전남의 제주와 경남의 통영·울산·병영·삼천포·거제·남해 등은 고종 26년(1889)의<조일통어장정>이후 일본인들에 의한 어업기지로 殷盛해진 곳들이다. 삼랑진은 부산개항 직후부터 일본인 미곡매수의 본거지가 되었고 1902년부터 다음해 말까지에 걸친 경부선 철도공사,547)경부선의 삼랑진구간(구포-밀양)은 1902년 8월에 기공, 다음해 12월에 준공되었다.
≪조선철도사≫1(조선총독부 철도국, 1929), 183쪽.
1904년부터 시작한 삼랑진∼마산간 철도공사 특히 삼랑진 철교공사로 많은 인력을 흡인한 곳이다.548)삼랑진 마산간 철도는 1904년 9월에 착공, 1905년 12월에 완공하였는데 삼랑진에 가설된 낙동강교량공사에 가장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다. 위의 책, 332∼337쪽.

 다섯째,<표 9>에 의하여 정조 13년과 광무 11년의 도별 도시분포를 보면 그 동안에 일어난 지역구조의 변화를 명백히 알 수가 있다. 우선 정조 13년에는 평남·평북에 많은 도시가 있었는데 광무 11년에는 그 수가 격감하고 있다. 그것은 정조 13년(1789) 당시 평남·평북 읍들의 행정구역 면적이 지나치게 넓었다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이 지역이 1894∼95년에 걸친 청일전쟁 때의 주 전쟁터였다는 점, 그리고 북변방어를 위해 상비되었던 병사들이 한말에 와서 거의 유명무실해져 버린 것이 인구감소의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압도적으로 그 수가 늘어난 곳이 경남·북 특히 경남지역이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세력이 남으로부터 정착·확산된 때문이며 부산·동래·구포·사상의 부산권, 그리고 병영·울산·동래·부산·사상·구포·삼랑진·창원·마산·고성·통영·거제·진주·삼천포·남해·하동으로 이어지는 동남해안 벨트지역의 도시화를 현저하게 알 수가 있다.

도별 정조 13년(1789) 광무 11년(1907)
京畿 漢城·開城·江華·楊州 漢城·仁川·開城·水原
江原   原州·鐵原·伊川
忠北 忠州·淸州 忠州·淸州·堤川
忠南 公州·唐津·扶餘·溫陽·牙山 公州
全北 全州·泰仁 全州·南原
全南 光州·羅州·濟州 光州·木浦·濟州
慶北 大邱·尙州·安東·慶州·義城 大邱·尙州·慶州·金泉·安東·醴泉·
星州·義城
慶南 釜山·東萊·密陽·晉州·巨濟 釜山·統營·馬山·晉州·三浪津·東萊·龜浦·沙上·
昌原·密陽·蔚山·兵營·
三千浦·固城·南海·巨濟·河東
黃海 海州·黃州·延安 海州·黃州·白川·鳳山
平南 平壤·成川·德川·永柔·安州·祥原 平壤·鎭南浦·价川
平北 義州·定州·昌成·楚山·鐵山·嘉山·宣川 義州·博川·鐵山
咸南 咸興·洪原·端川 元山·咸興·北靑
咸北 鏡城·吉州·明川 鏡城·城津·明川

<표 9>도별 도시분포 비교

 여섯째,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개성·수원·원주·철원·충주·청주·공주·전주·남원·광주·제주·대구·상주·경주·안동·성주·창원·진주·해주·황주·평양·의주·함흥·경성 등 조선시대로부터의 전통있는 도시들이 24개나 들어 있다는 점은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다. 조선시대 고을의 명칭에 州자를 사용한 大邑 즉 부 또는 목은 전국을 통해 모두 23개뿐이었는데 그 중에서 14개가 이중에 포함되어 있고, 개성·수원은 유수부가 배치되었던 이른바 準수도였었고 경주·전주·평양·의주·함흥의 5개 고을은 종2품 부윤이 배치된 곳이었으며 안동과 창원은 大都護府 소재지였으니549)손정목, 앞의 책(1977), 46∼58쪽. 전통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孫禎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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