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1) 양반 신분제도의 변화
  • (1) 관료집단의 변화와 양반신분

(1) 관료집단의 변화와 양반신분

 법제상으로 양인에 속하는 양반신분은 15·16세기에 이미 지배신분으로서의 자기 위상을 구축하여 班常制를 확립하고, 이를 良賤制와 함께 신분제의 기본 원리로 정립하였다. 양반신분은 조선 후기에 진행된 ‘신분제의 동요’ 현상에 의해 일정한 타격을 받았으나 지배신분으로서의 위상 자체는 다른 신분에 의해 대체됨이 없이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양반신분의 위상은 반상제 및 노비제를 포함한 사회신분제의 법제적 폐지를 선언한 갑오개혁을 계기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일차적으로 관료집단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포착될 수 있다.

 고종 31년(1894) 7월 30일(음력 6월 28일) 갑오개혁의 입법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의결한 의안에서 “문벌과 반상의 등급을 劈破하고,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選用할 것”을 명시하였다.597)愼鏞廈,<1894년의 社會身分制의 廢止>(≪奎章閣≫9, 서울대 도서관, 1985). 이는 반상제 폐지의 선언인 동시에, 고종 19년에 내린 교지에서 “용인의 길을 넓혀 서북·송도·서얼·의역·서리·군오를 막론하고 일체 현직에 등용하고자” 한 뜻을 이어, 반상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여 관료로 충원할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598)柳永益,<甲午更張과 社會制度 改革>(朱甫暾 外,≪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 264쪽.

 기실 갑오개혁에 참여한 소장 관료 가운데 서얼(金嘉鎭·安駉壽·權在衡·李允用·尹致昊), 중인(鄭秉夏·高永喜·吳世昌), 토반(金鶴羽·張博) 등 한미한 신분배경을 가진 ‘亞流兩班’들이 많았던 것은 한국 사회사에 특기할 만한 사실이었다.599)柳永益, 위의 글, 238쪽. 특히 김가진·권재형·안경수 등은 서얼 출신으로서 각각 공부·군부·탁지부의 협판직을 맡아 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갑오개혁 기간에 李周會와 같은 평민 출신 무관이 내각의 협판으로 벼락출세하였고, 이후에도 李容翊·李夏榮 등 무명의 평민들이 계속 관계로 진출하여 1905년경에는 정부의 대신급 관료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600)柳永益, 위의 글, 264쪽. 이러한 양상은 19세기이래 소수의 벌열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면서 중앙 정치구조를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권력을 유지해 오던 것에 비하면601)조성윤,≪조선후기 서울 주민의 신분 구조와 그 변화-근대 시민 형성의 역사적 기원-≫(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2), 156쪽. 관료집단의 면모를 일신할 정도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602)특히 갑오개혁 당시 일본 공사관 일등서기관 杉村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李周會 등과 같은 문지도 없는 미천배가 대신의 현직에 오른 사실은 이목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柳永益, 앞의 글, 291쪽 참조).

 그러나 소수 비양반 관료의 개별적 상향이동의 사례로도 취급될 수 있는 이러한 양상보다도 관료집단의 성격에 더욱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관료임용제도의 변화이다.603)이하 관료임용제도에 대한 서술은 金泳謨,≪朝鮮支配層硏究―官僚兩班의 社會學的 考察―≫(一潮閣, 1977) 제3편 제1장 官僚의 社會的 性格 참조. 종래 대표적인 관료임용제도였던 과거제는 甲午式年文武科殿試를 끝으로 폐지되고, 그것을 변통하는 새로운 제도로서<選擧條例>·<銓考局條例> 및<文官授任式>이 마련되었다. 이는 재능을 위주로 하되, 대신에게 奏任官·判任官의 選取權을 주고, 판임관에 대해서는 전고국에서 관장하는 보통시험과 특별시험을 거쳐 임용하도록 골격이 짜여져 있었다. 대신에게 추천권을 부여함으로써 정실주의가 일정하게 작용할 가능성은 있었으나,<선거조례>에는 장차 학교 교육을 통해 관료를 양성한다는 방침이 시사되어 있고,<전고국조례>에 규정한 보통시험의 과목 또한 국문·한문·寫字·算術·內國政略·外國事情으로 되어 있어서 종전 과거 응시에 적합했던 것과는 판이한 근대적인 지식체계를 관료의 조건으로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전의 교육이 글자나 익히고 문장이나 읽히는 무용의 교육이므로 이를 德·體·智를 계발하는 실용의 교육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본 개화파는 과거제와 향교를 폐지하고 그 대신 근대 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관료로 선발하려 한 것이다.604)李相燦,<1894∼95년 地方制度 개혁의 방향-鄕會의 법제화 시도를 중심으로->(≪震檀學報≫67, 1991), 89쪽. 갑오개혁에서 입법된 새로운 관료임용제도는 이후 수차에 걸쳐 입법된 관련 법제의 바탕이 되었다.

 1898년에 공포된<奏判任官任命規則>에서는 의정부와 각부의 판임관을 管下學徒 및 외국 유학생 졸업인 중에서 시험을 거쳐 주무장관이 임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신교육을 받은 자를 관료로 임용하게 하였으며, 1906년에 제정되고 1908년 7월에 개정된<文官任用令>에서는 주임문관의 임용자격을 현직 관료 이외에는 “외국대학에서 법률 또는 정치경제의 학과를 수료하여 그 졸업증서를 가지고 전형위원의 전형을 가진 자, 內外國의 정법전문학교의 졸업증서를 가지고 만 2년 이상 판임문관 또는 판임궁내관의 직에 있고 현재 5급봉 이상의 봉급을 받는 자”로 규정하였고, 또한 판임문관의 임용자격을 현직 관료 이외에는 “문관보통시험합격증서 또는 銓考所합격증서를 가진 자 및 궁내판임관시험을 거친 합격자, 외국대학에서 법률 또는 정치경제의 학과를 수료하여 그 졸업증서를 가지고 전형위원의 전형을 가진 자, 관립고등학교 또는 학부대신이 이와 동등 이상으로 인정하는 내외국의 관공사립학교의 졸업증서를 가진 자”로 규정하여 근대적인 학교 교육 이수를 관료임용의 중요한 자격요건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1906년에 제정된<法官銓考規程>에서 판사·검사의 임용자격 중 관련 직종 유경력자 이외에는 법관양성소 또는 법률학교 졸업자를 자격요건으로 설정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이 시기 관료 충원에 주요한 역할을 한 각종 근대 학교의 설립 연혁과 교육내용에 대해 표로써 정리해두면 다음<표 1>과 같다.605)金泳謨, 앞의 책, 290쪽의 표를 간략화한 것임.

학 교 명 公布年度 수업연한 교 과 목 설립목적 졸업자
수(명)
漢 城 師 範 學 校 1895 本 科 2년
速成科 6개월
  敎官養成 139
1906 本 科 3년
速成科 1년
교육·국어·일어·역사·지리·수학·
물리·화학·음악·농업·상업·공업
敎員養成  
外 國 語 學 校       敎官養成  
日 語 1891 3년 외국어·국어·한문·수학·역사·
지리·체조·수신·물리·화학·생물
  349
漢 語 1897 3년   59
英 語 1894 5년   79
法 語 1895 5년   26
俄 語 1896 5년    
德 語 1898 5년     5
  1906(개정) 6년      
法 官 養 成 所 1895 6개월 법학통론·민법·형법·현행법령·
민사·형사소송법·소송연습
司法官採用 85
1905 3년   司法官採用  
1908   〃+행정법·국제법 成法學士  
武 官 學 校 1896 1년   參尉  
1898     參尉  
1907 3년   參尉  
農 商 工 學 校 1904 4년      
醫 學 校 1899 3년 동물·식물·화학·물리·해부·생리·
약물·내과·외과·안과·법의·婦嬰·
종두·위생·진단·체조
敎員養成  
1902   19
中 學 校 1899        
尋 常 科   4년 윤리·역사·경제·화학·물리·외국어    
高 等 科   3년 〃+정치·상업·농업·공업·의학 判任官
專門學入學
 
小 學 校 1895 2∼3년 수신·습자·독서·산술·지리·역사·
외국어
  72
普 通 學 校 1906   국어·한문·일어·미술·지리·이과·
도화·체조
  30
高 等 學 校 1906 4년 수신·국어·한문·역사·지리·수학·
박물·물리·화학·법제·경제·도화·
음악·체조
   
部·衙 見 習 生 1899∼1910 1∼3년   官吏充員  

<표 1>근대 학교 교육과 관료 충원

 이처럼 신교육과 근대적 지식체계를 관료의 조건으로 설정한 갑오개혁 이후의 관료임용제도는 전통적 지식체계와 문벌에 바탕을 둔 과거제·음서제 중심의 종전 제도와는 판이하였다. 이에 따라 갑오개혁 이후에는 근대적 학문을 수용하거나 신교육을 받은 이들이 대개 관료로 나아갔고 이러한 과정에서 관료집단의 성격도 종전과는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다만 이들은 아직 관료로서의 이력이 일천하여 대부분 판임관의 지위에 머물렀고 소수가 주임관까지 진출하는 정도였으므로,606)金泳謨, 위의 책, 296쪽. 관료제의 상부까지 장악하여 성격 변화를 일으키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진행된 관료집단의 변화는 짧은 시기 동안이었지만 적어도 상층 양반의 재생산기반과 위신에는 일정한 타격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직 보유를 통한 권력적 지위의 향유는 벌열로 통칭되는 상층 양반의 한 특징이었으며 이들의 신분적 자기재생산은 대개 재래의 관료임용제도에 주요 기반을 두고 있었다. 새로운 관료임용제도는 이들을 배제하거나 이들에 대한 정실주의가 작용할 가능성을 봉쇄한 것은 아니었지만, 관료의 조건으로 규정한 지식체계나 교육 요건이 판이해짐에 따라 이들도 관료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어떻든 새로운 제도에 대한 적응 과정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 새로운 관료임용제도가 형식적으로는 보편주의를 취하여 신분배경보다는 능력을 중시한 점, 각종 근대 학교의 입학자격에 신분적 규제가 전무하여 학교 교육이 관료임용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수록 일반 대중이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게 된 점607)金泳謨, 위의 책, 304쪽 참조. 등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관료집단의 신분적 동일성 즉 양반=관료의 등식을 파괴함으로써 관직을 배경으로 하는 양반신분의 위신과 재생산기반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변화는 班常制에 결정적 타격을 주지는 못하였다. 이 점에서 다음 1899년≪독립신문≫의 기사는 매우 시사적이다.

대한 양반으로 말하면 그전 문무 동서반이 있어 말하기를 양반이라 하고 벼슬을 아니한 사람은 상인이라고도 하며 평민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연구세심하여 성승이 되어 자칭 왈 양반이라 하여 자기의 조상이 대신이든지 능참봉 하나만 지녔으면 자손은 백면서생이라도 양반서생님이라 하고 이역이나 시상하던 사람은 벼슬하여 각부 대신에 이르더라도 상사람이라 하니 이것은 실로 지탄하도다(≪독립신문≫, 1899년 1월 22일,<반샹론>).

 즉 양반 가문의 자손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여도 여전히 양반 행세를 하지만 이서(吏役)나 상민(市商) 출신은 대신과 같은 고위 관료가 되더라도 ‘상사람’ 취급을 받고 있던 당시 세태를 비판한 것인데, 이는 법제상의 변화가 관습의 변화까지 즉각 이끌어내지는 못한다는 측면과 함께, 단기간에 이루어진 관료집단의 변화만으로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반상 차별의 관념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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