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2) 중간신분층의 부상
  • (2) 중인

(2) 중인

 中人은 17세기에 독자적 신분 범주로 성립한 뒤, 한편으로는 자신들에게 가해진 신분적 제약에 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현실주의적 반응을 보여 왔다. 그 결과, 비록 중인신분내에서도 편차는 적지 않았지만, 醫·譯 중인을 중심으로 한 일부 중인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인 위세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은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644)조선시대 중인신분의 사회적 위상과 그 변화에 대해서는 김필동,<조선시대 ‘중인’ 신분의 형성과 발달>(≪한국의 사회와 문화≫2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을 참조할 것.

 중인신분은 특히 개화기에 들어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변화하는 국제적 환경이 그들을 필요로 하였고, 그들 또한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갔기 때문이다. 우선 중인들은 개화사상의 형성과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吳慶錫·劉大致·李東仁 등이 대표적인 인물임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중인들은 근대적 관료기구가 신설된 1880년대에 이르러 이 새로운 관료기구에 중견 실무관료인 主事·副主事·委員·司事 등으로 다수 진출하게 되었으며,645)주사 또는 부주사는 조선시대 중견 실무관료의 범칭인 郎廳에 해당되는 것으로, 과거의 이른바 청요직에 준하는 직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인 출신이 이런 관직에 진출하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공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김필동,<갑오경장 이전 조선의 근대적 관제개혁의 추이와 새로운 관료기구의 성격>(≪한국의 사회제도와 농촌사회의 변동≫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33, 문학과지성사, 1992).
―――,<한국 근대관료의 초기 형성과정과 그 역사적 성격:1880∼1894>(≪한국의 사회제도와 사회변동≫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50, 문학과지성사, 1996) 참조.
일부는 大臣級으로까지 승진하였다.646)대표적인 인물이 통리아문의 참의와 협판,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卞元圭이다. 그러나 중인 출신들이 훨씬 더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 것은 갑오개혁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면 먼저 중인신분은 갑오개혁 이후 어떠한 신분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 앞에 제시된 의정안 중에서 중인과 관련이 있는 조항은 의안 ③항과 ④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③항은 班常制에 대한 포괄적인 부

 정과 함께 특히 관료 임용의 귀천을 가리지 않음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에, 종래 동반 정직의 관료이면서도 다른 양반관료들에 비해 차별을 받던 기술관들에 대한 차별을 부정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④항은 직접적으로는 문무관 사이의 차별을 부정한 것이지만, 넓게 보면 기술관이나 그 출신에 대해서도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인의 신분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좀더 구체적인 조치는 갑오개혁 당시 이루어진 관료제 개혁을 통해 나타났다. 즉, 갑오경장 정부는 6월 28일 군국기무처 章程案으로 ‘議政府 官制’를 제정하여 중앙 행정기구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한 데 이어, 7월 2일에는 의정안((36)항)을 의결하여 관리의 품계를 종래의 18단계에서 모두 11단계로 간소화하였으며,647)종래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두었던 正·從의 구별을 1품과 2품만 그대로 두고, 3품 이하는 正·從의 구별을 폐지하였다. 이어 7월 14일에는 관리를 勅任官·奏任官·判任官의 세 등급으로 구분하는 等級職制를 확립하였다.648)정1품·종1품·정2품·종2품을 칙임관, 3품부터 6품까지를 주임관, 7품부터 9품까지를 판임관으로 구분하였다(≪日省錄≫, 고종 31년 7월 14일 및≪官報≫, 개국 503년 7월 14일 참조). 한편 7월 3일에는 군국기무처 의정안((42)항)으로 과거제를 폐지하고 따로<選擧條例>를 정할 것을 의결하였으며, 7월 12일에는 군국기무처 장정안으로<銓考局條例>와<선거조례>를 제정하여 관리 충원제도를 일신하였다.649)신용하,<1894년 갑오개혁의 사회사>(≪한국의 사회제도와 사회변동≫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50, 문학과지성사, 1996) 참조. 이 중에서 특히 과거제의 폐지와 새로운 선거제의 도입은 중인(기술관)의 신분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새 제도에 따른 관리선발시험은 종래의 과거시험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굳이 그 내용을 비교하자면 종래의 문과시험보다는 잡과시험에 훨씬 근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650)선거조례와 전고국조례에 의하면, 새 제도는 각 아문의 대신과 각 지방에서 추천된 후보자들을 ‘보통시험’ 및 ‘특별시험’의 두 종류의 고시를 통해 선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보통시험의 과목은 國文·漢文·寫字·算術·內國政略·外國事情 등으로 되어 있었다. 신용하, 위의 글(1996) 참조. 이로써 중인은 어떤 점에서는 양반과의 경쟁에서 오히려 유리한 위치에 설 수도 있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7월 17일에는 군국기무처 의정안((83)항)을 통해 “무릇 醫·譯職 및 償加人 등으로 각부 아문의 奏·判任官이 된 자는 모두 新授階級에 따라 시행하고, 原資(원래의 관직)에는 구애받지 않을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새로운 관직체계에서 임용된 醫·譯 기술관의 신분적 위상을 더욱 확실하게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기술관 또는 중인 출신의 관직 진출은 더욱 활발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과거 잡과 출신자의 관직 진출은 어느 정도 확인되지만, 중인가문 출신의 진출은 직접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전체 관료집단내에서 중인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을 정확하게 가려내기는 어렵다. 우리는 다만 두드러진 몇몇 사례들을 통해 중인 출신이 이제 과거의 제한된 기술직을 넘어서 핵심적인 고위 관직에도 진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651)대신 또는 협판급의 관직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로는 鄭秉夏·高永喜·吳世昌·玄昔運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1906∼7년경의 대한제국 관료의 전체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자료인≪大韓帝國官員履歷書≫에서 중인 출신을 가려보면, 갑오개혁 이전에 잡과에 합격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67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밖에 중인가문 출신이라고 간주되는 관료들이 약 100여 명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652)Edward W. Wagner, “The development and modern fate of Chapkwa-Chungin lineage,” 한국학 국제학술회의 발표논문(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87). 한편 와그너 교수는≪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나타난 관료들의 출신 배경에 대해 조사를 해 왔는데, 그의 추정에 의하면, 잡과에 합격하여 관료로 진출했던 67명 이외에도 적어도 이 정도의 숫자는 중인가문 출신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이 수치는 전체 이력서의 약 5∼6%에 해당되는 수치인데, 중인의 규모를 감안한다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한편 대표적인 중인가문 중에는 근대의 전환기에 자신들의 본관을 유력 양반가문에 접맥시키는 작업을 했음이 확인되고 있다.653)Wagner, 위의 글 참조. 과거의 천령 현씨가 연주 현씨로, 해주 김씨가 청풍 김씨로 바뀐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중인 출신은 단지 관료로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유학생 출신 중에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중에는 유학을 다녀온 후 관료가 된 인물들도 있지만,654)이강오·송준호의 조사에 의하면,≪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서 유학 경력을 가진 사람은 93명인데, 필자의 확인에 의하면 이 중에서 적어도 9명은 중인 출신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들은 金東圭·玄棖·安衡中·洪奭鉉·金益南·金鴻南·方泳柱·全永憲·玄暎運 등이다.
이강오·송준호,<1907년 당시의 대한제국 관원 중 유학 경력 소지자의 조사>(≪전북사학≫4, 전북대 사학회, 1980) 참조.
崔南善·崔麟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문화 및 정치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도 있었다. 또한 유학생 출신은 아니지만, 정치적 부침에 따라 일본에 체류하였고, 1900년대의 애국계몽기에 문명개화론을 기치로 내걸고 근대화 운동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종국에는 친일적 활동으로 흐르게 된 吳世昌 같은 인물도 같은 범주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체적인 정치의식·민족의식을 체득하지 못한 채, 일제가 침략을 위해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근대문명을 구가하고자 했던, 근대사 속에서의 굴절된 중인층의 모습을 읽게 된다.655)김경택,<한말 중인층의 개화활동과 친일개화론-오세창의 활동을 중심으로->(≪역사비평≫21, 199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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