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3) 상민·천민층의 성장
  • (3) 호적에 나타난 평민의 변화

(3) 호적에 나타난 평민의 변화

 전통적인 신분제도가 법적 제도적으로 폐지된 갑오개혁이후 신분질서의 유지와 조세 징수를 위한 호구 파악을 목적으로 삼는 호적제도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1896년 정부는 전국적인 규모의 새로운 호구조사를 위하여 칙령 제61호로<戶口調査規則>(1896. 9. 1)을 마련하고, 이어서 內部令 제8호<戶口調査細則>을 통해 구체적인 방법을 정하였다.694)趙錫坤,<光武年間의 戶政運營에 관한 小考>(≪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민음사, 1990). 그리고는 1896년부터 새로운 호적이 작성되기 시작했으며, 1903년과 1906년에도 집중적으로 작성되었다. 이 때 작성된 호적을 그 이전에 작성된 호적과 구별하기 위해서 편의상 신호적 또는 光武戶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부른다.

 구호적을 작성할 때 기초적인 작업으로 각 호마다 호구 단자를 제출하면 정부가 이를 검토하여 다시 확인한 문서로 준호구를 지급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때 호구조사에는 어떤 종류의 내용을 반드시 적어야 한다는 지침은 있었지만, 일률적으로 규격화된 양식을 배포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신호적은 구호적과 달리 일정하게 규격화된 호구표 양식이 정해져 있고, 이 양식의 빈칸을 채우는 방식으로 조사를 하도록 되었다. 신호적 양식을 보면 구호적에 기재하던 내용과는 크게 달라진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① 그 동안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노비제의 폐지였다. 그 이전 1801년에 이미 공노비는 폐지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정식으로 사노비까지 노비의 전면적 해방이 법적으로 정리·공포된 것이다. 따라서 구호적에서는 기재 양식상 가장 뚜렷이 구별되던 노비와 다른 신분과의 차별적 기재방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며, 모든 호구를 다 같은 양식을 이용해서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구호적에서는 노비호의 경우 호주와 처의 이름과 나이를 기록하고는 각각의 부모와 上典을 기록하여 소유권을 확정하는 근거로 이용하였었다. 그러나 신분제가 폐지된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갑오개혁 당시 노비제가 법적으로 완전히 철폐되었으므로, 구호적에서 대단히 중요시되던 노비와 일반 양인의 구분이 사라진 것이다. 이에 따라 각 호구의 중요 내용 가운데 하나였던 노비 소유에 관한 항목 역시 사라졌다. 이제 노비를 더 이상 파악해야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② 호주의 이름·나이·본관·四祖 등의 기재는 구호적과 다를 바 없지만, 직역을 직업으로 바꾸어 기재하도록 되었고, 그것도 상세한 내용이 아니라 간단하게 기재하도록 되었다. 구호적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호주와 가족의 직역이었다. 그러나 직역 대신 신호적에서는 직업을 적도록 되어 있는 점이 매우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이 때는 이미 구호적을 작성할 때 가장 중요시하던 군역과 각종 요역의 배정을 위한 인원 파악이라는 목표가 사라졌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직역을 기재하던 것을 직업을 기재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물론 신호적에 나타나는 직업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직업(Occupation)과 거의 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職과 業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말하자면 직은 일종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고 업은 구체적인 생업을 가리키는 것으로 분리시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기를 들어 양반신분이면서 농사를 짓고 있었던 자는 ‘職士業農’이라고 동시에 기재하는 경우가 그랬다. 그러나 이렇게 기재한 경우는 적은 편이고 과거 관직을 역임했거나 양반들은 대부분 관직을 기재하거나 幼學 등으로 자신의 직업을 기재하였는데, 이들이 대부분 지주였거나 아니면 자영농민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업보다는 직을 더 중요시했던 것 같다. 반면 일반 상민들과 갑오개혁으로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호적에 노비로 기재하지 않게 된 노비였던 자들은 자신의 생업, 말하자면 그들의 현실적인 경제 활동의 내용을 적고 있다.

 이처럼 직역을 통해서 관직을 적거나 아니면 현재 지고 있는 군역의 내용을 기재하던 방식으로부터 현재 수행하고 있는 관직을 적거나 아니면 농민·상민 등으로 구체적인 경제활동상의 내용을 적도록 바뀐 것은 호적 작성의 목적 가운데 중요했던 군역 부과라는 목적이 크게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경제활동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③ 구호적에서는 양반과 양인의 경우 호주와 호주 四祖(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직역과 처의 4조의 직역을 모두 적도록 되어 있었고 노비는 소유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부모의 성명과 상전이 누구인지를 반드시 적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양반의 경우 호적에 기록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양반신분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으며, 노비는 그 소유 또는 귀속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뀌어 호주의 4조를 적기는 적되 적는 요령이 훨씬 간소화되었다. 말하자면 호주의 4조가 어떤 직역을 갖고 있었는지는 신분제를 폐지한 마당에 더 이상 커다란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이는 연좌제의 폐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구호적에서는 처의 4조에 관해 호주와 같은 비중으로 기재하도록 했으나, 신호적에서는 처의 4조를 적는 것이 폐지되었다. 다만 처의 이름·성씨·본관·나이만을 기재하는 것으로 줄어들었고, 그것도 同居親屬난에 일반 다른 가구원들과 함께 간단히 적도록 바뀌었다.

 물론 신호적에는 엄연히 전통적인 신분, 즉 그 당시의 신분 및 계층을 이해할 수 있는 호주와 처는 물론 호주 4조의 직역도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이 호적은 호구를 조사하는 목표가 상당히 달라진 상태에서 이루어진 호적이다. 그리고 호주의 신분을 유지하고 과거 응시 등의 경우에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던 4조의 직역 기재도 이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는 난에 직역을 생략하고 이름만 기재한 경우가 많았다. 전체 조사 대상 중에서 70% 이상이 4조를 기재하지 않고 있다. 이는 신분제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갑오개혁 당시 과거제가 폐지된 사정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④ 구호적에서는 호주이외의 자녀, 동생 등의 친속·비친속·노비·雇工 등의 구성원의 호주와의 관계·이름·나이·직역 등을 모두 호적에 상세히 기재하였으나, 신호적에서는 동거친속난에는 처를 비롯하여 奉母·자녀, 그밖의 동생·조카 등 함께 거주하는 친속의 관계·이름·나이를 간단히 적도록 되어 있을 뿐 직역은 적지 않았으며, 친속이 아닌 구성원은 寄口 항목을 설정하여 남녀 숫자만 적도록 하였다695)寄口 항목에 관해서는 戶口調査細則 第4條를 보면 “人民中에 無家無依하여 原籍을 別成치 못하고 族戚知舊 間의 戶內에 寄居하거나 戚 一身만 寄食하여도 寄口에 參入하여 人口漏落을 없게 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기구 항목과 함께 雇傭 항목을 설정하여 고공을 비롯한 각종 고용인 역시 남녀 숫자만을 적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호주를 비롯한 동거친속과 기구, 고용 인원 모두를 합친 ‘現存人口’ 합계를 내는 항목을 특별히 따로 두고 있다. 이로서 신호적은 구호적과 비교해 볼 때 현재 집에 살고 있는 구성원의 내용과 숫자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검토했듯이 신호적을 통해서는 호구조사에서 매우 중요시되던 직역과 4조 대신 오늘날의 센서스개념에 좀더 가까운 형태로 조사가 이루어 졌다. 말하자면 역부담 인구를 집중적으로 파악하는 작업과 신분을 밝혀주는 내용보다는 현재 살고 있는 인구수와 가족 관계, 그리고 경제활동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이 훨씬 더 중요한 조사 내용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특히 신호적에서는 거주지 본위로 호적을 작성하고 부모, 형제, 자손이라도 分居하면 원칙적으로 호적을 따로 작성하고 同居일 경우에는 親居, 기구, 고용도 호적에 기재하고 있는 것이 이 점을 말해 준다.

 <표 1>은 한말 광무호적을 분석하기 위해 마련한 직업 분류 기준의 일부이다. 종래 양반·중인·상민·노비 등으로 분류해보던 직역 분류와는 달리, 한말에는 주로 직업을 기준으로 했음은 이미 위에서 지적했는데, 이 때 양반 집단은 대부분 자신이 현재 맡고 있는 관직명, 또는 자신의 품계, 또는 前職의 명칭 등을 내세움으로써 직역을 그대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한 반면, 종래 주로 군역을 기재하던 평민들은 자신의 생업을 그대로 기재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신 분 직 역
常民 농 민 農, 農業, 農夫, 農民
商 民 商民, 商業, 商, 油商, 酒商, 木商, 鹽商, 藥商, 食商, 煙商, 白木廛商民, 布廛商民
市 民 市民, 市廛市民, 米廛, 床廛人, 壽進床廛市民, 白木廛, 布廛, 懸房
平 民 平民, 平人, 良民, 生民, 良人, 良女
木 手 木手, 木工, 木工人
수공업자 工民, 工業, 匠工, 笠工, 泥匠, 鞋店, 樂工
관청근무 技師, 技手, 生徒, 見習生, 員役, 入役, 立役, 雇員, 庫直, 直, 守宮, 守僕, 僕正, 牌長, 牌員
군 병 軍人, 軍士, 參軍, 馬隊, 守直軍, 扈衛軍, 扈輦隊, 憲兵, 兵丁, 兵卒, 陸軍步兵, 軍樂隊, 軍官, 守門將, 守護軍
여자호주 召史
기 타 樂生, 典當鋪, 藥局, 醫, 醫藥
근대 직업 警察(警務官, 摠巡, 巡檢), 學校(中學校長, 敎官, 敎員, 敎師, 學徒, 學生, 學業, 學文), 新聞社 社員, 銀行 副總務

<표 1>한말 직업 분류 기준표

 호적에서 상민은 자신의 생업을 그대로 기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갑오개혁이전에 노비신분이었던 자들도 모두 포함된다. 농민·목수·수공업자·상민·시민·평민·관청 근무자(이른바 하급공무원)·하급 군병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상민과 시민은 모두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자들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상업활동 종사자로는 商民·商業·商과 같이 막연하게 상인임을 밝히는 경우도 있지만, 油商·酒商·木商·鹽商·藥商·食商·煙商처럼 자신의 취급 물종을 중심으로 어떤 상업활동을 하는 사람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白木廛商民과 布廛商民처럼 시전 이름 뒤에 상민이라고 붙이는 경우도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상민이라는 범주를 설정하였다.

 한편 위의 경우보다는 적지만 市民이라고 만 직업을 밝히는 경우와 市廛市民·壽進床廛市民과 같이 시전 이름을 앞에 붙이면서 시민이라고 밝히는 경우, 그리고 米廛·床廛人·白木廛·布廛·懸房과 같이 시전 이름을 직업 난에 적어 자신이 이 점포를 운영하거나, 점포에서 일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경우가 있다. 때문에 시전에서 점포를 가지고 있는 상인들을 주로 가리키는 범주로 시민을 설정하였다. 일부 시전상인들도 商民이라고 기재하고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상민은 시전상인을 제외한 각종 상인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수공업자들과 이들 상민·시민은 상공업 종사자로 분류해 볼 수 있는 직업이다. 그러나 평민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관청 근무자와 하급 군병은 조선후기 호적에서 보는 각종 군역 보유자들이나 조예·나장·日守 등의 천역 종사자, 공노비들의 입역 등과는 전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급료를 지급받으면서 하나의 직업으로 관청에 근무하고, 하급 군병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이 가운데 하급 군병은 모두 1907년 군대 해산 당시 직업을 잃게 된다.

 근대 직업으로 따로 떼어놓은 것들은 주로 경찰과 학교의 직원 및 학생, 그리고 신문사·은행 등의 직원들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신분으로 볼 때 양반출신·중인출신·상민출신이 모두 가능한 종류의 직업이고, 전통적인 신분으로 환원시켜 분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어 따로 떼어놓았다. 이들 근대적 직업은 양반출신들이 진출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趙誠倫>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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