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4) 가족관계의 변화
  • (2) 갑오개혁기의 가족관계의 변화

가. 군국기무처시기의 가족관계

 갑오개혁때에 이루어진 사회개혁 가운데 신분·가족 관련의 개혁에 대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문벌과 양반 상민 등의 계급을 타파하고 귀천을 불문하고 인재를 뽑아 쓴다.

1. 문무존비의 차별을 폐지하고 오로지 품계에 따라 相儀를 규정한다.

1. 죄인은 본인 이외의 일체 연좌율을 폐지한다.

1. 적실과 첩에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 한하여 양자하는 것을 허용한다.

1. 남녀의 조혼을 엄금하며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라야 비로소 결혼을 허락한다.

1.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자유의사에 맡긴다.

1. 공사노비법을 혁파하고 인신의 매매를 금한다.

1. 비록 상민이라도 국가 민족에 새로운 의견이 있으면 군국기무처에 건의하여 의론하도록 한다.

1. 역졸·倡優·皮工 등의 천민 대우를 폐지한다.

1. 무릇 관인은 비록 고등관을 지낸 자라 하더라도 퇴직 후에는 자유로이 상업을 영위할 수 있다.

1. 모든 在官親 相避의 규례를 개정하여 다만 子 婿 親兄弟 叔姪간에만 허용한다.

1. 大小官과 士庶人의 等馬의 절차를 폐지한다.

1. 이제부터 관리의 외출에는 乘轎 乘馬 步行 다 같이 편리한대로 자유로이 하되 平轎子 軺軒은 다같이 老·病人 이외는 영구히 폐지한다.

1. 대신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패를 달도록 한다.

 (元裕漢,<甲午改革>, ≪한국사≫17, 국사편찬위원회, 1984, 310∼311쪽).

 사회개혁 20개 항목 중 이상의 14개 신분 및 가족관계 개혁이 그 골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학의 폐정개혁안 12개조의 내용과 상당히 상통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군국기무처가 의결 공포한 사회제도개혁은 당시 조선 사회가 절실히 요구하고 있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717)元裕漢,<甲午改革>(≪한국사≫17, 국사편찬위원회, 1984), 310∼311쪽.

 갑오개혁을 2기로 나누고 제2기의 사회개혁을 열거하는 가운데 신분 가족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도 한다.

1. 남녀가 음독하여 명을 해하고 신체를 해상함과 부녀가 음독하여 墮胎함을 금할 것.

1. 과녀를 위협하여 개가함을 금할 것.

1. 음죄를 범한 여인을 관비에 沒役하지 말 것.

1. 家夫가 妻에게 强暴함을 금할 것.

1. 奴戶를 戶主에 付치 말고 分戶하여 應役할 것.

 (金泳謨,<甲午改革의 法制的 樣相과 日帝의 干涉>, ≪일본제국주의와 한말의 사회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95∼96쪽).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시기의 가족사적 고찰은 간과하는 것이 전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양자·적서·노비문제는 가족구성원의 변동을 의미하며, 나아가서 처첩질서의 변동을 의미하며, 상피의 범위의 축소는 친족범위와도 유관된 문제로 가족연구에 중요한 변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양자·적서·노비문제는 가족내의 축첩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축첩과 관련하여 女友會718)丁堯燮,≪韓國女性運動史≫(一潮閣, 1971), 35쪽.
韓國女性史編纂委員會 編,≪韓國女性史≫2(梨大出版部, 1972), 67쪽.
가 조직되어 1899년 축첩반대상소를 올리는 등 여성들의 단체를 통한 사회활동 및 조직운동의 효시가 되었음은 매우 주목된다. 한편 양자제의 변개와 적서의 차별의 폐지는 서자의 지위 향상뿐만 아니라719)일례를 들어보면 牛峰 李氏의 경우 李完用의 아우인 李允用은 庶出로서 1910년대의 족보에는 庶자가 기재되었으나 그 이후 庶자가 누락된다. 그러나 기재양식으로 적자·적여·서자·서녀의 기재순의 차이로 신분의 구별이 가능하다. 그러나 1930년대의 족보에서 남자를 우선 기재하고 여자를 후에 기재하고 연령순으로 재배치되므로 적서의 식별이 용이하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의 가문의 족보도 1930년대 이후에는 비슷한 모습으로 변모된다. 서자가 입후할 기회를 갖게 되어 가족내에서의 첩의 지위가 향상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하였다.720)정경숙,<大韓帝國期 進明婦人會의 組織과 思想>(≪大韓帝國硏究≫5, 梨花女大 韓國文化硏究院, 1986), 87∼89쪽.
―――,≪大韓帝國期 女性運動의 性格硏究≫(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89), 189∼137쪽.

 다음 1894년 1월 즉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수개월 전의 호구단자의 일례를 살펴보자. 85세의 가장과 3명의 며느리와 2인의 아들과 2인의 손자 2인의 손자며느리로 구성된 10인 가족이고, 6인의 노비로 구성되었다.721)臨鏡堂所藏 戶口單子. 기재순위는 ①가장 85세, ②가장의 부·조·증조·외조의 부계 4조, ③婦 沈氏 55세, ④손 25세, ⑤孫婦 심씨 23세, ⑥자 45세, ⑦부 심씨 49세, ⑧손 15세, ⑨자 43세, ⑩부 鄭씨 39세, ⑪손 14세이고, ⑫6인의 노비들이다. 가족관계는 가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가족 구성은 홀로 사는 시아버지와 홀로 사는 큰며느리와 손자부부, 그리고 아들을 각기 1인씩을 가진 두 명의 아들 가족으로 구성된 확대 가족이다. 딸의 경우는 여전히 호구단자에 등재되지 않는 원칙으로 일관되나 호구조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 중심으로 파악되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나타난 점이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양반 호구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비해 노비의 수는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들 노비 가족은 갑오개혁에 의하여 노비신분으로부터 해방되고 분호하여 독자의 호를 구성하게 된 점이 갑오개혁의 큰 성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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