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5) 여성의 사회진출
  • (2) 교육단체운동과 교육분야로의 진출

가. 여성교육단체운동으로의 진출

 1905년 이후 일제의 한국침략이 가속화되자 국운을 회복하여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저항적 민족운동이 다양하게 추진되었다. 그 운동의 주류는 의병항쟁과 애국계몽운동이다. 후자는 민력배양의 국권확립 민족운동으로 교육운동과 식산운동을 주된 과제로 내세웠다. 교육운동은 민력의 절반이 되는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여성교육을 확대하기 위한 많은 여성교육단체들이 설립 활동하여, 도시들과 촌촌마다에 여학교가 설시되었다. 아울러 여교사로의 사회진출은 절실한 사회적 요구가 되었다.

 1886∼1910년에 설립된 사립여학교 설립자 실태를 보면 174교 중 21개교만 여성 설립자이며759)朴容玉, 위의 책, 210∼218쪽., 1905∼10년 여성교육단체들 중 규모가 큰 것은 남자에 의하여 조직 활동하였다. 이것은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반증하는 것이다. 신문·잡지 등 인쇄물을 통해 밝힐 수 있는 이 시기의 여성단체수는 서울 지방 합쳐 30개 전후가 된다. 그 중 서울에서 조직 활동한 단체들은 규모나 내용면에서 비교적 충실하였다. 서울의 경우 女子敎育會·進明夫人會·양정여자교육회·大韓女子興學會와 한일부인회·자선부인회·동양애국부인회·자혜부인회 등이 있었는데, 한일부인회 이하는 친일여성단체로 활약한 것이다. 이들 단체의 조직과 활동은 상층 사회 지도층 부녀들을 대거 참여하게 하는 특성을 지녔다.

 규모와 활동이 컸던 여성단체로 여자교육회760)여자교육회에 관한 것은 朴容玉, 위의 책에 의거하였음.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체는 독립협회 등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이른바 선각적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부녀들의 계몽 개발의 뜻으로 조직 활동하였다. 설립자는 秦學冑·秦學新·鄭喬·李舜夏·高羲駿·李瑛奎 등으로, 1906년 5월초에 “학문과 女工과 부덕淳哲을 교육하여 현모양처의 자질을 양성·완비한다”는 목적으로 발기하였다. 그리고 동회가 후원할 여학교로 養閨義塾을 설립하여 동 6월 10일 개교하였다. 회원은 출발 당시 귀부인 30∼40명이 입회하였고, 점차 증가하여 10월초에는 3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사회는 “학문없는 여자를 학식있는 교사나 점잖은 남자가 지도해야 아름다운 결과를 얻는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양규의숙의 塾長·塾監은 저명한 남자로 임명하고 교사 두 명은 여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십 수명의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남자들로써 男子贊務所를 구성하여 여자교육회를 지도할 상층기구로 두고, 상층사회 여성들의 단체 참여를 촉구하고, 임원을 다음과 같이 임명하였다.

회   장:留案 代 辦 회 장:金雲谷 총   무:金松齊 부 총 무:李一貞堂 評 議 員:李夏榮부인·閔謙鎬부인·權重顯부인·李完用부인·沈相薰부인       閔丙弼부인·權重弼부인·閔泳綺부인·李載克부인·朴羲秉부인       兪星濬부인·吳臺煥부인·秦學新부인·秦學冑부인·崔永年부인       金益泳부인·兪相範부인·高羲駿부인·尹孝定부인·兪吉濬부인       崔炳憲부인·玄暎運부인·李鐘華부인·金祥雲부인       秦卓隱·李鶴仙·金錦漢 司 法 員:金湖山·金松岩·金美山·趙南波·韓一心 회 계 원:朴淸雲·金逸隱 서 기 원:金海秋·申公子 사 무 원:仍任 여 공 과 장:李允用부인 위 생 과 장:李根湘부인 직조소이사:梁成雲·朴淸雲 양잠소이사:白元赫부인·金鼎禹부인 위생소이사:池錫永부인·金益南부인 염색소이사:崔錫祥부인·현국부인 曝白所이사:趙鎭泰부인·崔奎翊부인 재봉소이사:李根培부인·申公子 東署사무장:金克巖 서서사무장:洪肯燮부인 남서사무장:申峯子 북서사무장:留案 중서사무장:張妙蓮

 이상 임원진이 실제 활동을 얼마나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은 대부분이 고관 및 유지부인들이었다. 이 중 실제 활동자는 김운곡·김송제·김호산·김송암 등의 취지서 발표 당시의 발기인들과 이준의 부인이자 개화선각자인 이일정당 등이다. 여자교육회는 운영권을 놓고 여러 가지 갈등도 많았으나, 일반부녀대중과 고루한 사회를 개발시키기 위한 연설회와 토론회를 지속적으로 행하여 여성의 사회참여 의식을 높인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06년 7월부터 1907년 7월까지 행해진 총 25회의 연설 및 토론회의 의제는 여성 및 유아교육, 衣冠制 개량, 내외법 폐지, 부인산업, 공업개발 등이었는데 주제 강연자는 주로 남자들이었으나 토론은 좌우파로 나누어 여자들이 담당하였다. 토론 담당 여자들은 김송제·김운곡·이일정당·조남파·한일심·陳洪子·신공자·朴繁子·金石子·申利子·申蕭堂·申英子·김일은·金弼媛·張錫暎부인·兪斗子 등이었다. 그리고 전시효과적 의미까지를 포함한 평의원들은 실제 활약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토론회나 강연회 및 통상회에는 늘 참석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참여 자체가 여성의 사회진출 의지를 북돋고 또 여성 활약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적지 아니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1907년 4월에 신소당·최화사 등에 의하여 설립 활동된 進明夫人會761)진명부인회에 관하여는 朴容玉, 위의 책을 참조.를 통한 여성 사회진출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906년 12월초부터 여자교육회가 경비 부족으로 양규의숙을 후원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신소당이 양규의숙을 유지 진흥시킬 단체로서 진명부인회를 발기 조직하고, 1907년 4월 23일 제 1회 총회를 열어 임원을 발표하였다. 총재는 留案으로 두고 부총재 崔花士, 회장 申簫堂, 부회장 李石卿, 총무 朴英子, 회계원 李鍾石, 재무원 李起泓부인, 서기 金石子·金一堂, 평의장 朴泳仁, 및 평의원 權直相부인 등 16명과 찬성장 李美卿, 부찬성장 閔賢子로 임명하였는데 평의원은 대체로 사회적 저명인사와 고관들의 부인이었다.

 진명부인회를 실질적으로 조직 운영한 회장 신소당은 민족교육운동과 여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대표적인 사회단체운동가이자 민족교육 운영자이다. 그는 판서를 지낸 故 金奎弘의 부인으로 이미 大安洞 자기 집에 소학교인 私立光東學校를 설립하고(1906년경) 자신은 교장으로,762)≪제국신문≫, 1907년 3월 16일,<光東學校>. 교감에는 李一貞을, 학감에는 박영자를 임명하였다763)≪大韓每日申報≫, 1907년 5월 5일,<光校生광>.
≪萬歲報≫, 1907년 5월 8일,<婦人設校>.
. 이일정과 박영자는 당시 부인운동계에 진출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여성들이다. 이 학교는 빈한한 아이들(40여 명)만 모집하여 학비를 전적으로 신소당이 자담하였다. 그가 觀鎭坊會에 또 하나의 새 학교를 설립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이 닥쳐 광동학교를 설립 3년만인 1908년 말에 안동 김씨 宗約所에 운영을 인계하였다.764)≪大韓每日申報≫, 1908년 11월 24일,<光東引繼의 希望>.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을 때 그는 서울 대안동에 大安洞國債報償婦人會를 조직하여 여성계 국채보상운동의 총본부로서의 기능을 다했었다.

 여성의 교육 및 사회진출이 필요하다고 주장되는 사회적 분위기는 嚴妃로 하여금 여성교육을 위한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여성교육운동을 펴가게 하였다. 황실에서의 여성교육운동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엄비는 황실여성들과 顯官부인들을 규합하여 大韓女子興學會와 慈惠婦人會를 설립했다. 전자는 1908년에 설립된 漢城官立高等女學校를 후원 흥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후자는 京城孤兒院을 찬성하기 위한 자선 단체였다.

 관립여학교 설립에 즈음하여 엄비는 여성교육 徽旨765)≪舊韓國官報≫, 1908년 5월 26일.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여성교육을 집안의 행복을 증진하여 국가의 비보가 되어야 한다는 현모양처론적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여성이 독립된 인간으로서 사회로 진출하여 적극적인 삶을 영위하기보다는 교양을 갖추고 개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가정을 경영할 훌륭한 내조자가 되도록 교육하는 데 있었다. 대한여자흥학회766)대한여자흥학회에 관한 내용은 朴容玉, 앞의 책, 110∼113쪽 참조. 발기는 학부 주선으로 宗親府에서 개최되었고, 황실 및 고관 귀족 부인들 50여 명과 現舊 정부대신들이 참여하였다. 임원은 총재 完興君 李載冕부인, 부총재 李完用부인, 회장 海豊府院君 尹澤榮부인, 부회장 李載克부인, 총무 輔國 趙寧夏부인과 侍從卿 閔丙奭부인, 사무원 학무국장 尹致旿부인과 편집국장 魚允迪부인, 고문 現舊 정부대신, 남자사무원 윤치오와 어윤적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황실과 현구 대신의 부인들이다.

 이 단체의 실제 활동자는 윤치오 부부와 어윤적 부부767)尹致旿의 부인은 尹高羅이며, 魚允迪은 漢城官立女子高等學校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였다. 자혜부인회도 총재 이완용부인, 평의장 李貞淑(조동윤대부인), 총무장 李鈺卿(이지용부인)이며, 실질적 활동은 이옥경이다. 이옥경은 매국 5적의 부인으로 친일활동에 앞장서고 또 다른 고관부인들과는 달리 일찍 개명하여 남편을 따라 일본에 갈 때도 활발한 독자적 활동을 하였으며 국내에서도 양장에 구두를 신고 재정이 어려운 여자교육회의 총재를 비롯하여 여성단체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일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반 사회에서는 호평을 받지 못했었다.

 여성단체운동에 황족과 정부대신 및 그들의 부인들을 다수 참여시키는 중요 이유는 첫째 단체의 사회적 인지도를 높이려는 것이고, 둘째는 황족 등 상층 사회의 부인들로 사회적 모범을 보여 여성의 ‘脫閨門’을 유도하여 여성의 사회진출의식을 보편화시키려는 것이다. 셋째는 여성사회진출의 보편화를 통해 여성인력 활용을 용이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일제의 한국식민지 여성정책의 중심은 값싼 노동력으로서의 여성인력 확보였다.

 그들은 이와 같은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이미 1906년에 이옥경으로 하여금 대한부인회768)朴容玉,<韓日婦人會의 組織背景과 活動>(霞城李瑄根博士古稀記念論文集刊行委員會,≪韓國學論叢≫, 1974), 63∼73쪽 참조.를 조직하여 여자실업교육 장려라는 이름으로 정부 예산을 책정, 양잠강습소를 설립하고 양잠교육을 강화 확대해갔다. 당시 국제시장에서 견사값이 높아 잠업은 가장 이익이 높은 산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기후가 습하고 높아 양잠사업에 아주 부적합하였다. 한국의 경우 양잠산업에 적합한 기후를 가졌고 저임금으로 활용할 우수한 인력도 갖추어져 있었다. 이옥경으로 하여금 여성실업교육 장려라는 명목으로 양잠교육을 확대시킨 것은 식민지여성정책의 수행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여성의 사회활동이 용이하지 못한 사회여건하에서 친일적 목적 수행이라는 반민족적 여성운동을 수행했다는 평가는 면할 수 없으나 여성사회진출의 모형을 보여준 점에 있어서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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