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5) 여성의 사회진출
  • (4) 새로운 직종업으로의 진출

(4) 새로운 직종업으로의 진출

 개항 이후 일본인과 서구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기계제 상품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으며, 또한 국가적 개화문물정책과 외국 특히 일본의 기계제 산업체가 국내에 설립·경영됨으로 인하여 여성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공장들과 외국 물품 취급 상점들이 세워졌다. 산업계의 급격한 변화는 전통적 산업 질서를 붕괴시킨 반면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사업과 산업에 종사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것은 여성 사회진출의 한 양상을 보인 것이다.

 먼저 상업으로의 여성 진출을 들 수 있다. 남성전용적 전통 상업에의 여성 진출은 매우 흥미롭다고 할 수 있는데, 즉 종래 남자 전업이었던 보부상계에 여자가 처음으로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다. 1899년 8월 29일자≪독립신문≫에 부상을 남편으로 한 서울 기생들이 “서방 직분을 좇아 부상에 입참하여 남녀가 함께 등짐장사를 하니 대한 상업이 더욱 흥왕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다음으로 여성에 의한 외국 교역 물품 상점의 경영이 나타났다. 1899년 1월 9일≪대한매일신보≫에 서울 다방골에 사는 조문천의 첩이 외국의 각 항 물건을 무역하여 장사한다고 하였으며, 양장여인 경옥당이 안동에서 서울 정동의 한창호의 집으로 이사하여 역시 외국의 각색 물건과 동서양의 각종 좋은 술을 판다고 하였다.810)≪大韓每日申報≫, 1899년 2월 15일,<韓女爲業>. 여성의 상점운영은 여성을 서구문물에 간접으로 접촉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상업적 이익만이 아닌 여성 개화라는 측면에서 선각적 여성이 부인상점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 안현에서 부인상점을 경영하였던 李一貞이 그 좋은 예이다.811)≪제국신문≫, 1907년 1월 16일,<婦人義捐>. 그는 당시 평리원 검사이며 뒷날 헤이그밀사로 파견되었다가 순절한 李儁의 아내로 이미 진명부인회 등의 애국계몽적 여성단체에서 활약하였고, 일진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유학생 21명이 학비난에 허덕일 때도 의연금(지폐 21환)을 내고 이들에 대한 지원운동을 벌였으며,812)≪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19일,<夫人寄函>. 제국신문이 경영난에 허덕일 때는 신문애독 권고운동을 폈던 분이다.813)≪제국신문≫, 1907년 9월 11일,<新聞廣覽(寄)>. 가세가 빈한하여 여자가 장사를 하고 술을 파는 상행위는 일찍부터 있었으나 외국의 각종 물건을 구입하여 개화 물품 상점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외국문물에 대한 견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직종의 사업으로 여겨 이들을 개명 여성으로 평판하고 있었다.

 외국 상인들의 빈번한 왕래와 외국과의 교역업자 등의 증가는 자연히 호화로운 음식점이나 유흥업소를 차리게 하였다. 러시아 귀화 한국여성으로 1898년에 찬양회 조직에 참여하고 순성여학교 교사를 한때 지냈던 고정길당은 서울에 양요리점을 차려 장사를 하였다.814)≪皇城新聞≫, 1899년 9월 18일,<女設料理>. 당시 외국인이나 신흥 부자들을 비롯한 일부의 새로운 유형의 소비자인 ‘有錢客’을 상대로 하는 양요리 靑樓를 거금을 가지고 경영하는 자가 꽤 있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새로운 사업으로 차를 파는 다방도 생겨났다. 녹음이 우거진 南山 和壇臺 근처에는 일인이 경영하는 찻집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한 찻집에서 한국여인이 차를 팔았다고 했다.815)≪萬歲報≫, 1906년 7월 24일,<日娶韓女賣茶>. 이것은 오늘날의 다방 레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여성들이 이처럼 새로운 직종으로 나아가 생업을 하였던 것이다.

 서구 자본제 기계상품들이 교역을 통해 국내에 반입되는 경우와, 회사나 공장을 국내에 설립하여 생산·판매하는 경우가 있었다. 직물회사와 공장, 가스회사·연초회사·제사공장·인쇄소·조폐공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공장과 회사에는 여공이 필요했으며, 家貧한 여성들은 생계 보조를 위하여 여공으로 취업하였던 것이다. 특히 여성노동력을 값싸게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을 노려 일본직물회사들이 일찍부터 한국으로 진출하였다. 일본측은 여공의 효율적 활용을 위하여 직조학교를 설시하고 일본인 교사로 하여금 학생교육을 행하였던 것이다.816)≪제국신문≫, 1900년 3월 10일,<織造敎育>·27일,<織造學校>. 직물 수요가 광범위한 데 비하여 큰 자본을 갖지 아니하더라도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직물회사이므로, 지배층 및 재야지식인들까지 직물업을 부국강병의 길로 여겨 한말에 몇몇의 직물회사가 설립되었다. 아울러 여공 진출로의 길도 그만큼 확대되었다. 예를 들면 1900년 3월, 閔丙奭(사장)·李根澔(부사장)·李鳳鎬(총무원)가 설립한 서울 남서 예동의 織造緞布株式會社는 각양 주단과 포목을 직조하는 기계를 구입하여 남녀 학생을 모집하여 일정 기간의 교육을 거친 후 졸업과 동시에 월급을 지급하는 정관을 만들어 공원을 모집했다.817)≪皇城新聞≫, 1900년 3월 19일,<織造會社>. 서울 南竹洞織造所의 경우는 錦綾·木布의 직조와 더불어 각종 표백과 염색을 專務資業하였는데 이에 종사할 학생 요원(14∼20세)을 선발하여 3년간 교육시키고, 견습생에게는 점심을 제공하며 재학생이 직물했을 때는 척수에 따라 공비를 지급했고 중도 퇴학자는 食料金을 변상하게 했다. 전문 직조인을 양성하여 우수제품을 생산하고 그 전문 인력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818)≪皇城新聞≫, 1900년 7월 14일,<織造所의 擴張>.

 당시 직조업은 비교적 수지타산이 높은 직종이어서 각 직조회사마다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 공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서울 東嶺洞 漢城製裁會社의 남녀 직공모집 광고에 의하면 숙련공은 기계 2좌를 운전하여 하루에 150∼60척씩을 직조할 수 있고 초습자도 7∼8일을 배우면 1좌에 5∼60척을 직조할 수 있으므로 매일 7∼8냥의 공전을 받을 수 있다 하였고, 여공 숙소는 따로 마련하였다고 하였다. 남녀 임금의 차이는 두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819)≪皇城新聞≫, 1901년 5월 13일,<男女織工募集>.

 일인 경영의 동아연초회사·용산인쇄국과 典圜局·일한가스회사도 여공원·女技員 및 여사무원을 모집하였다. 1900년에 전환국을 인천에서 용산으로 이전하고, 동 7월 6일부터 한국 여공 15명을 선발하여 원료를 精選케 했다. 이것은 여성이 처음으로 公設作業所에 근무한 것으로 일제측은 이에 관하여 규문에 칩거하던 여성 관습을 타파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820)≪京城府史≫(京城府, 1936), 1016쪽. 가스회사는 14∼8세의 고등학교 졸업 정도인으로 자격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무원으로서의 전문직종인 때문인 것이다. 이에 비해 인쇄국과 연초회사의 경우는 연령 15∼25세를 모집하였으며 동아연초회사의 경우 한국인 여공이 무려 260여 명이었다. 이 정도면 능히 공인 자신의 이익을 옹호할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숫자로, 실제로 1909년 한국여공이 日女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일제히 퇴사하는 일이 있었으며,821)≪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12일,<烟社風波>. 1910년 3월에는 부인의 월급이 겨우 3환밖에 되지 아니하여 임금에 불만을 품고 많은 부인들이 퇴사를 했다.822)≪皇城新聞≫, 1910년 3월 20일,<婦人退雇>.

 1910년대에 오면 생계보조적 수단과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의 희망 등으로 인하여 여성취업 의지가 크게 확대되었다. 1910년 4월에 서울 新門外 作蠶會社에서 고용 여인 30명 모집에 무려 2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던 것823)≪大韓每日申報≫, 1910년 4월 26일,<雇女募集>.은 당시 사회의 경제적 여건과 여성 사회진출의 의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朴容玉>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