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6) 민중운동의 전개
  • (1) 농민운동

(1) 농민운동

 대한제국시기의 민중운동은 농민운동, 초기 노동운동, 민중의 조직운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824)대한제국시기의 민중운동에 대하여는 다음의 글들을 참고했다.
정창렬,<한말 변혁운동의 정치·경제적 성격>(≪한국민족주의론≫1, 창작과비평사, 1982).
이영호,<한국근대 민중운동연구의 동향과 ‘국사’교과서의 서술>(≪역사교육≫47, 역사교육연구회, 1991).
이윤상,<대한제국기 농민운동의 성격>(한국역사연구회,≪1894년 농민전쟁연구≫2, 역사비평사, 1992).
양상현,<대한제국기의 민중운동>(한국역사연구회,≪한국역사입문≫3, 풀빛, 1996).

 농민운동은 주로 국가의 租稅부과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지만 국유지를 중심으로 地代수취에 대한 저항이나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으로도 나타났고, 또한 지방농촌사회의 공동체 운영과 관련한 갈등으로도 나타났다.

 조세저항운동(抗稅運動)은 19세기에 광범하게 발생한 전통적인 농민항쟁과 같은 양상을 보이면서 郡단위의 조세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세제도가 어느 정도 정비되었지만 조세제도의 근대화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825)배영순,≪한말·일제초기의 토지조사와 지세개정에 관한 연구≫(서울大 박사학위논문, 1988).
왕현종,<한말(1894∼1904) 지세제도의 개혁과 성격>(≪한국사연구≫77, 1992).
이영호,≪1894∼1910년 지세제도 연구≫(서울大 박사학위논문, 1992).
즉 조세부과의 불합리성·불평등성, 중간관리의 횡령 등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한제국시기에도 이러한 조세제도의 문제점을 배경으로 하여 국가의 조세수취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 시기의 조세저항운동은 조세의 근대화라는 근본적인 목표하에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郡단위에서 조세수취과정의 사소한 불합리한 문제로부터 농민운동은 전개되었다. 특히 조세수취를 담당하는 郡守와 胥吏 등 각종 중간수취인의 불법행위로부터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취과정에서 중간관리들의 횡령의 문제가 조세를 납부하는 농민의 억울함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간관리의 불법적 수탈이라는 도덕적 문제를 명분으로 전개된 조세저항운동의 배경에는 조세부과의 불합리성·불평등성의 문제도 놓여 있었다. 조세제도의 근대화를 위한 농민들의 요구는 이러한 사소한 문제로부터 출발하였고, 그러한 저항운동의 힘이 축적되면서 제도개혁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조세저항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1899년의 龍仁農民抗爭, 1899∼1902년에 걸친 靈巖農民抗爭을 들 수 있다. 용인농민항쟁은 조세부과의 불합리성·불평등성 문제, 영암농민항쟁은 조세수취과정의 횡령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난 저항운동이다.

 1899년의 용인농민항쟁은 조세부과액과 징수액 사이의 괴리에서 발생한 추가부담액(加結)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826)이영호,<대한제국시기의 토지제도와 농민층분화의 양상-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광무양안’과 ‘토지조사부’의 비교분석>(≪한국사연구≫69, 1990). 2,400여 結의 총부과액 외에 추가로 112결을 농민들이 부담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1898∼1899년 여러 차례 정부에 그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정부에서는 서리들과 농민들이 횡령하거나 숨겨놓은 세액(吏隱結)을 찾아내어 정부에서 규정한 부과총액을 채우도록 지시하면서 농민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농민들은 1899년 음력 6월 29일부터 관청으로 몰려가 군수를 끌어내고 서리를 구타하고 공공건물과 관속의 주택을 파괴하는 등 실력행사를 통하여 추가부담액의 탕감을 요구하였다.827)≪司法稟報≫甲(奎 17278), 光武 3년 8월 26일 보고서, 광무 3년 8월 龍仁郡民擾事査官竹山郡守行査文案, 광무 3년 8월 龍仁郡民擾時公廨及人家破碎摘奸記, 광무 3년 9월 23일 보고서.
≪司法稟報≫乙(奎 17279), 광무 3년 8월 29일.
실제의 稅源에 입각한 조세부과가 합리적인 것이지만, 조선후기 이래로 정부에서는 도별·군별로 할당한 조세의 총액을 채워 국가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꾀하는 總額制로 재정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조세액의 축소를 용납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은결을 찾아내어 보충할 것을 지시하면서 총액의 변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1898년부터 시작된 대한제국의 量田事業을 통하여 조세징수액의 현실화가 기대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업의 실효를 보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828)한국역사연구회,≪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민음사, 1995) 참조. 따라서 대한제국시기의 조세저항운동은 여전히 結負制에 기초한 총액제적 조세부과라는 조세수취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었고, 농민들의 조세저항운동은 조세제도의 근대화를 통하여 해소될 수 있는 것이었다.

 1899∼1902년의 영암농민항쟁은 조세수취담당자의 부정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조세수취담당자는 戶首·洞任·面任·鄕任·胥吏·差人·郡守 등이었는데, 이들의 횡령으로 말미암아 그 부담이 농민에게 다시 전가됨으로써 농민들이 저항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영암에서는 갑오개혁 이후 서리들이 횡령한 조세액만도 수십만 냥에 이르렀다. 그 횡령액을 서리들은 結總의 부족을 내세워 202結 47負 6束을 각 면의 농민들에게 부과하였다.829)≪公文編案≫(奎 18154) 31책, 건양 원년 5월 2일,<訓令 羅州府> 및 5월 22일,<훈령 영암군수 鄭元成>;43책, 광무 2년 6월 6일. 이러한 배경하에서 1899년 조세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횡령액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서리들은 횡령액에 대한 정부의 탕감을 기대하면서 계속 횡령하게 되자, 1902년 다시 조세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진위대를 파견하여 농민들을 탄압 해산하는 한편, 새로 부임한 군수는 조세를 횡령한 서리 30∼40명을 체포하였다.830)筆者未詳,≪日新≫ 韓國史料叢書 29(국사편찬위원회, 1983), 광무 3년 9월 8일·10월 1일 및 광무 6년 1월 24일·5월 19일. 이렇게 되자 서리들이 옥문을 부수고 나와 농민들을 위협, 수천 명을 강제 동원하여 오히려 군수를 축출하였다.831)≪日新≫, 광무 6년 6월 5일. 이후 정부에서 별도로 視察을 파견하여 직접 조세를 수취하여 서리들의 이익이 사라지게 되자, 안동과 영암의 서리가 주동이 되어 전라도 및 경상도 각 읍에 通文을 보내어 1904년 1월 20일 부산에서 일제히 모여 항의집회를 개최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832)金允植,≪續陰靑史≫下, 권 10(국사편찬위원회, 1960), 광무 8년 1월 2일, 67쪽.

 이와 같은 조세수취담당자의 부정행위는 도덕적 측면에서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한 부정행위가 가능했던 수취구조가 문제였다. 수십 명의 이서층이 조세의 부과 및 징수과정에 관여하여 생계비를 확보하고 있었고, 향임·면임·동임 등도 호수·납세자 結民과 함께 조세상납의 연대책임을 지고 있는 구조에 문제가 있었다. 조세의 납부과정에 여러 단계가 있었고 각 단계마다 납세책임자가 존재하여 횡령의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열려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상인들이 조세금을 이용하여 상업활동을 전개하거나, 중앙으로의 조세상납을 책임진 차인들이 급속히 발전한 상품화폐경제를 이용하여 상업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조세상납이 지체되거나 횡령될 수 있는 가능성은 크게 확대되었다. 조세수취방식의 개혁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농민의 지대저항운동(抗租運動)은 한국 중세 사회경제의 구조적 성격으로 볼 때 조세저항운동에 비하여 격렬하게 전개되지는 않았다. 전호농민의 집단적 이해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민간 지주의 경작지에서는 지대저항운동이 개인적이거나 수동적으로, 또 흉년시에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궁장토나 둔토와 같은 국유지에서는 지역적으로 전호농민이 집단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대저항운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833)김용섭,<司宮庄土에서의 時作農民의 경제와 그 성장>(≪조선후기농업사연구≫1, 증보판, 지식산업사, 1995).
이영호,<18·19세기 지대형태의 변화와 농업경영의 변화>(≪한국사론≫11, 서울大, 1984).
도진순,<19세기 궁장토에서의 중답주와 항조>(≪한국사론≫13, 서울大, 1985).

 이러한 양상은 대한제국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궁방과 정부의 각 기관이 독자적으로 관장하던 궁장토·둔토·驛土 등이 통폐합되고 정부의 단일기관에 의해 관장되면서 그 동안 면세되던 토지에 과세됨으로써 이들 국유지에서 경작하는 농민의 경작조건이 열악해졌고, 이에 대한 저항이 지대저항운동으로서 표출되었다. 정부에서는 국유지에 대한 파악과 作人에 대한 파악을 강화하는 한편, 지대의 정액화와 금납화를 통하여 실질적인 지대인하의 과정을 밟아가던 지대의 근대화를 역행시키는 지대수취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지대의 상품화를 고려한 現物納의 강화와 半打作의 지대수취는 소상품생산자로의 성장의 길을 모색하던 국유지의 작인농민들을 지대저항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작인농민들은 집단적으로 지대저항운동을 계획하고 그것이 民亂의 양상으로까지 발전해 갔다.834)박찬승,<한말 驛土·屯土에서의 지주경영의 강화와 抗租>(≪한국사론≫9, 서울大, 1982).
김양식,≪대한제국·일제하 역둔토 연구≫(단국大 박사학위논문, 1992).

 국유지에서의 지대저항운동은 단순한 경제투쟁의 양상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국유지의 기원과정에서 배태되어 있었던 소유권의 귀속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국가와 농민 사이의 소유권 분쟁이 현실적으로는 지대수취를 둘러싸고 나타났던 것이다. 지대의 귀속여하에 따라 소유권의 귀속여하가 결판나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전라도 고부 등지의 明禮宮 庄土에서 제기된 均田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835)김용섭,<고종조의 均田收賭문제>(≪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증보판, 일조각, 1984).

 균전문제는 전주·옥구·김제·금구·임피·부안·태인 등 7개 읍의 陳田을 명례궁에서 자금을 대고 개간토록 한 뒤, 지대수취와 소유권 귀속을 둘러싼 왕실 및 균전관리와 균전농민 사이에 발생한 갈등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균전이 되면 지세를 영원히 면제하고 3년 후부터 매우 저렴한 지대를 수취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후 지세와 지대를 모두 징수하고 지대를 지속적으로 인상하여 일반 민전의 수준에까지 육박하게 되었다.836)≪起案≫(奎 17746), 광무 8년 7월. 이러한 수취의 결과는 토지소유권이 왕실에 소속되는 것을 의미하였고 따라서 균전에서의 지대저항운동은 토지소유권 투쟁의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균전문제로 비롯된 농민의 저항은 지대저항운동이나 토지소유권 투쟁의 범주를 넘어 농민봉기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894년 농민전쟁에서는 농민군들이 均田使의 처단을 요구하였고, 1899년 영학당운동도 균전농민들의 전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837)이영호,<대한제국시기 영학당운동의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5, 1991).

 한편 대한제국시기에는 지방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도 나타났다. 조선후기에는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던 士林層이 경제적 능력을 배경으로 새로이 등장한 饒戶富民 등의 상승세력과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을 전개하였는데, 대한제국시기에는 봉건적 특권의 소멸로 인하여 전통적인 사림층이 몰락하고 근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外勢 또는 그들이 가진 문명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갈등의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를 함경도 城津民擾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838)김도형,<대한제국의 개혁사업과 농민층분화>(≪한국사연구≫41, 1983).
이영호,<갑오개혁 이후 지방사회의 개편과 城津民擾>(≪國史館論叢≫41, 국사편찬위원회, 1993).
성진민요는 1899년 성진 개항을 계기로 경제적으로 성장한 새로운 세력이 성진군을 신설하고 그곳에서의 행정 및 자치업무를 장악하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들 새로운 세력, 즉 新鄕層은 성진항의 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지주적·부농적·상인적 기반을 가진 계층이었으며 성진군의 신설에 적극적이었다. 반면 성진군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 舊鄕層은 성진군을 폐지하여 구향층의 주도하에 놓여 있는 길주군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新舊鄕의 대립이 격렬하여졌고, 1900년과 1902년 무력충돌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839)≪城津府民擾査檢案≫(奎 16029의 1), 광무 4년 9월 10일.
≪城津府民擾査案謄本≫(奎 16029의 3), 광무 4년 10월 3일.
≪吉州城津按覈使奏本≫(奎 17142), 광무 4년 12월 31일.
≪駐韓日本公使館記錄≫(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 제11책<1900년 各領事館機密來信1>, 제15책<機密各館往來>.
≪韓日外交未刊極秘史料叢書≫35·36 (김용구 편, 아세아문화사, 1996).

 이러한 신구향의 대립에는 구향층의 反日的 입장과 신향층의 親日的 입장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신향층은 일본의 보호에 의지하여 성진군을 독립시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고, 구향층은 일본인에 대한 개항과 그들의 경제적 침투를 경계하였다.840)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舊韓國外交文書≫日案 7.
≪咸鏡南北道來去案≫(奎 17983)2, 광무 9년 6월 24일.
≪城津報牒≫(奎 17871의 2), 광무 9년 3월 30일.
外部 編,≪訴狀≫(奎 18001), 광무 9년 9월.

 이와 같이 성진민요에는 신구향 사이의 주도권 다툼과 동시에 외세의 수용여부라는 문제가 동시에 작용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軍政을 실시함으로써 성진군의 행정업무는 친일적인 체제로 구축되었고, 친일적인 신향층은 이에 편승하여 성진군의 하부 행정조직에 참여하였다. 신향층이 일제 식민통치의 지방적 동반세력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결집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반봉건 근대화와 반제 자주화의 과제, 즉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지닌 사회였다. 조세저항운동은 조세제도의 근대화운동이었고, 지대저항운동과 토지소유권 분쟁은 근대적 토지소유의 확립을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지방세력의 주도권 쟁탈전은 근대적 지방행정제도의 수립, 농촌사회의 근대화, 그리고 일제 침략의 수용여부와 관련된 운동이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당시의 봉건모순과 민족모순을 인식하고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농민층의 의지를 표출한 농민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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