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6) 민중운동의 전개
  • (2) 초기 노동운동

(2) 초기 노동운동

 노동계층은 조선후기 농민층분해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지만 그들이 농촌을 떠나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의 노동자로서 등장하지는 못하였다. 농촌에 그대로 퇴적되어 있거나 도시의 빈민층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개항 및 개항장의 운반노동시장이 형성되고 갑오개혁 이후에는 열강에의 이권양여로 말미암아 광산개발과 철도건설이 시작되어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게 되자, 이러한 작업현장에서 초기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었다.

 개항장·도시·광산·철도건설현장으로 진출한 초기 노동자 계층은 아직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의 완전한 노동자는 아니었다. 작업의 내용이 아직 산업생산의 본류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고, 노동자와 고용자 사이에 什長·德大 등 봉건적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중간관리자도 끼어 있었다. 작업현장에 봉건적 유제와 관행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 이들을 고용한 자본이 제국주의의 자본이거나 이와 결탁한 매판적 성격의 자본이었기 때문에 작업현장에 민족적 문제가 작용하였다. 따라서 초기 노동운동에는 봉건적인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활동과 함께 반제국주의 활동이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었다. 외국인 광산에서 전개된 광산노동자의 저항운동, 목포를 비롯한 개항장 부두노동자의 파업투쟁, 일본인 철도건설현장에서 전개된 철도노동자의 반일운동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광산은 조선시대에도 개발되고 있어서 광산노동자층은 일찍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자본제적인 생산방법으로 이행하기 위한 맹아적 모습도 발생하였다. 여전히 봉건적인 성격을 지니기는 하지만 物主制와 德大制와 같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경영방법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시기에 들어서 광산개발권이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에 고루 양도되면서 광산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외국인의 광산개발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은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기존의 광업자들은 광업권을 수호하려 하였고, 지역민들은 토지배상문제와 산림벌채문제, 기타 사회문제로 저항하였고, 광산노동자들은 임금문제와 민족차별문제로 저항하였다.841)이배용,≪구한말 광산이권과 열강≫(한국연구원, 1984).
―――,<구한말 광업권 수호운동의 제양상>(≪이화사학연구≫17·18, 이화여대, 1988).
―――,<광업권 수호운동>(≪한국민족독립운동사≫1, 국사편찬위원회, 1987).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일조각, 1989).

 기존의 광업자들은 광업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으로 광산에서는 이전에 광산개발에 착수하였던 자본가들이 자본투자의 이윤을 회수하지 못한 채 광산을 빼앗기게 되었다. 광산의 개발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우선 광맥을 발견하고 이를 채굴하기 위한 기반시설 투자가 요구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이 탈취한 것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새로운 광산이 아니라 이미 개발되어 이제 본격적인 채굴단계에 들어간 광산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광산에 많은 자본을 투자한 한국인 광업자들은 제국주의의 광산이권 획득에 따라 사업장을 잃게 되었다. 일부 광업자들은 외국인 광산의 이권을 인정하지 않고 채굴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1899년 미국의 雲山金鑛에서는 潛採를 구실로 발포하여 황승권·최원백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있었고, 金奉文은 사살되기도 하였다.842)≪司法禀報≫乙, 광무 3년 7월 12일·21일. 미국의 광산채굴권을 인정한다면 한국인의 채굴은 잠채가 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광업권을 상실한 한국인 영세 광업자의 저항이 놓여 있는 것이었다. 1900년에는 운산금광에 고용된 영국인이 피살되었는데 그 피고로는 昌城金鑛에서 金店德大 일을 보았던 韓箕朝가 체포되었다.843)外部 編,≪法部來去文≫(奎 17795), 광무 4년 11월 24일 및 광무 5년 4월 2일. 한기조의 범행여부를 떠나 이러한 사례에서 예전의 광업자들이 외국의 이권침탈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內藏院이 수세를 통하여 관장하고 있던 광산들이 제국주의국가의 자본가들에 양도되면서 도처에서 발생하였다.

 지역민으로서 토지가 광산에 편입된 소유자들은 토지배상문제로 외국인 광산자본가와 갈등을 빚었다. 이들 광산에는 이미 토지소유자가 존재하거나 지역민들이 공동으로 산림을 이용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광산부지를 헐값으로 인수하거나 내장원으로부터 무상으로 절수를 받으려 하였다.

 지역민들은 외국인 광산이 들어섬으로 해서 발생한 여러 가지 사회문제로 고통을 받았다. 미국인이 개광한 운산금광에서는 그 폐단이 8가지로 지적되었다. 한국인 사망자의 개·돼지 취급, 목석 운반과정에서의 전답 훼손, 石沙로 인한 전답의 황폐, 墓松의 벌목, 부랑무뢰배의 부녀자 및 재물 늑탈, 미국인의 불법적인 형벌과 징역, 通辯의 경제적 농간, 저수지 수축시 田宅價 헐가 보상 등이었다.844)外部 編,≪訴狀≫(奎 18001) 7책, 광무 7년 9월,<平安北道雲山郡儒鄕白利龍前博士崔基鳳等請願>. 여기에는 광산노동자의 피해도 포함되어 있지만 지역주민의 피해로서 농사·전답·산림 등 물적 피해와 지역주민에 대한 인적 피해가 나타나고 있다. 외국인 광산에 대한 민족적인 감정까지 겹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빈농들은 광산에서 노동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부농들은 이 지역을 피해 떠나가기도 하였다.845)위와 같음.

 광산노동자들은 임금문제와 민족적 차별문제 등을 중심으로 저항하였다. 미국의 운산금광에서는 한국인 노동자에 대하여 저임금 정책을 시행하여 반발을 샀다. 독일의 堂峴金鑛에서는 독일의 금광채굴을 반대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집단폭동이 있었다. 영국의 殷山金鑛에서는 한국인 노동자들을 몰아내고 일본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한국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광업자, 주민들이 합세하여 무력충돌에 이르기도 하였다. 일본의 稷山金鑛에서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광산노동자들의 저항운동은 광산개발권이 제국주의 열강에 양도됨으로써 기존의 광업자, 토지소유자들의 이해관계와 일치되어 진행되었고,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보다는 민족적 차별에 대한 저항이 강하였다.

 개항장 부두는 농민층분해로 인하여 농촌사회에서 몰락한 농민층이 개항을 맞이하여 진출할 수 있는 대표적인 노동현장이었다. 개항장에서의 노동은 주로 운반노동으로서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생산부문의 노동자는 아니지만 유통기능을 담당하던 개항장의 자본가에 의하여 고용되었다는 점에서 초기 노동자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개항장의 자본가가 대체로 일본인이었던 점에서 부두노동자는 초기 노동자층으로서의 계급적 갈등과 함께 민족적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부두노동자는 저렴한 都給制 임금과 민족적 임금차별,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부두노동자들은 ‘都中’이라는 초보적인 노동조직을 마련하였다. 도중의 대표는 檢察이었고 이들이 부두노동자들을 산하에 거느린 십장을 지휘 감독하였다. 도중은 노동자층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노동자 조직이었지만 검찰과 십장의 지배로 말미암아 부두노동자들의 권익이 침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인 부두노동자들의 불만은, 개항이 되자마자 곧바로 터진 목포부두노동자 파업투쟁에서 그 대표적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846)양상현,<한말 부두노동자의 존재양태와 노동운동>(≪한국사론≫14, 서울大, 1986). 목포에서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 부두노동자의 파업투쟁이 진행되었는데, 주로 임금투쟁·反什長운동·反日本牌운동이 중심이었다. 임금투쟁은 일본인 자본가의 임금인하 조치에 대한 반대투쟁이었다. 그것은 성격상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투쟁이었지만 민족적 차별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반십장운동은 십장이 봉건적 노동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중간수탈을 자행하고 있는 데 대한 반발이었다. 반일본패운동은 십장들이 일본인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부두노동자들을 일본인 자본가 수중에 예속시키기 위하여 監理署牌 대신에 일본패를 차도록 강요함으로써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와 같이 개항장의 부두노동자들은 노동조직의 봉건성과 일본인 자본가의 억압에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전개하였고, 그것은 봉건적 민족적 위기를 반영하는 한국의 초기 노동운동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철도건설현장에는 초기 노동자층으로서 참가하는 토목노동자들도 있었지만 그밖에 많은 노동자들은 농촌사회에서 강제로 동원된 役夫들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빈농층, 농업임노동층으로서 철도건설현장에 동원되어 열악한 노동조건 하에서 부역과 같은 성격의 강제노동에 종사하였다. 경부철도공사의 경우 한국인 노동자는 1일 20전을 받았지만 일본인 노동자는 60전을 받았다. 이들은 살인적인 사역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터널공사의 노동밀도는 특히 가혹하였다. 일본인 감독은 무기를 동원하여 한국인 노동자들을 독려하였다. 增若터널공사에서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터널 속에 몰아넣고 공사장을 점령하였지만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진압된 일도 있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시흥·청도·전의·개령·정주 등 각지의 철도공사장에서 봉기하여 일본인 감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847)정재정,≪일제의 한국철도 침략과 한국인의 대응(1892∼1945)≫(서울大 박사학위논문, 1992).

 역부로 동원된 지역의 농민을 중심으로 한 주민들의 저항도 강력하게 일어났다. 1904년 始興民擾는 군수와 서리들이 역부의 임금을 착복함으로써 발생하였다.848)김형목,<한말 시흥농민운동에 관한 연구>(≪중앙사론≫6, 중앙대, 1989).
≪始興稷山按覈使奏本≫(奎 17147).
1904년 谷山民擾는 노동자의 강제징발에 대하여 저항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노동자 징집을 독촉하던 일본인 7명을 타살하였다. 일본군 200명과 헌병 50명이 출동하여 곡산민요를 진압하였고, 주동자는 일본군에게 총살당하였다.849)≪司法稟報≫乙, 광무 8년 10월 30일 및 광무 9년 9월 6일.

 철도건설현장에서의 노동운동은 철도건설이 일본에 의하여 주도됨으로써 반일 민족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부역적 성격의 노동으로 인하여 노동조건은 극도로 열악하였고,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서 비롯된 것이고, 여기에 국내의 매판세력이 결탁됨으로써 그들의 저항은 반제 반봉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초기 노동운동의 기본적인 특징은 초기 노동자층이 자본제하에 완전히 포섭되어 있지 않다는 점, 자본가가 제국주의의 자본가라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초기 노동운동은 반봉건적 성격을 내재하면서 반제운동의 성격을 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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