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6) 민중운동의 전개
  • (3) 민중의 조직운동

(3) 민중의 조직운동

 1894년 농민전쟁 이후 정부의 농민전쟁 수습책이 전혀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개화파 정부 아래서나 광무정권 아래서나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층의 안정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들의 생산현장으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유민화, 조직화의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농민전쟁에 적극 참여한 동학의 남접세력, 그리고 농민전쟁에 휘말린 수없이 많은 변혁지향적 농민들은 농민전쟁 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삶을 도모하고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는 종교적 신비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 자들도 있고, 개인적 치부를 위해 폐단을 야기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변혁활동을 전개한 자들은 계속해서 민중조직을 활용하였다. 그러한 조직으로서는 義兵·東學黨·英學黨·南學黨·西學黨·火賊黨·活貧黨의 조직을 들 수 있다.

 1894년 농민군이 농촌사회에서 혁명적인 반봉건 활동을 전개할 때 보수유생층이 이들 농민군을 배척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기 때문에, 보수유생층이 주도한 乙未義兵에 농민군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그것을 주도할 수는 없었다. 동학접주였던 태인의 金文行과 같이 을미의병에 지도급 인사로 참여한 자도 있었으나,850)≪司法稟報≫乙, 광무 7년 2월 13일. 농민군은 어디까지나 보수유생층의 지도부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단지 이를 변혁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는 정도였다.

 남접세력의 농민전쟁 정신을 계승한 남접계열의 농민군 잔여세력은 변혁운동에 계속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 동학당은 북접교단이 조직의 재건과 포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1900년대에 들어가 개화와 친일의 방향으로 선회함에 따라 북접교단과 연합적으로 변혁운동을 꾀할 수는 없었다. 이들 동학당의 활동을 살펴보면, 1900년경 해주지방에서 동학잔당이 다시 집회를 열고 봉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재령·신천 등지에서도 동학의 두목인 임종현·원용일 등이 봉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남부지역에서도 소백산맥의 좌우에서 동학당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관동의 세력은 1900년 4월 8일 전주에서 외국인 배척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활동하였고, 서정만의 세력은 1900년 3월 4일 속리산에서 제천행사를 개최하고 반제국주의 봉기를 꾀하려 하였다. 북접교단과는 방향을 달리하는 동학당의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03년에는 서정만 부대의 두목 중 한사람이었던 정해룡이 재봉기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851)이영호,<갑오농민전쟁 이후 동학농민의 동향과 민족운동>(≪역사와 현실≫3, 1990).

 동학당 가운데 주목되는 활동은 英學黨의 경우에서 나타났다. 영학당은 표면적으로는 서양종교에 투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라도에서 가장 조직적 세력이 컸던 孫和中包의 중견간부들이 농민전쟁의 재현을 위하여 조직한 동학당의 조직이었다. 손화중포의 손병규·홍계관·최익서 등은 1896년 8월 崔時亨을 찾아가 設包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이 이를 거부하자 이들은 영학당을 조직하여 농민전쟁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여기에 金開男包의 김문행이 가담하고 북접교단의 진보파인 金洛喆이 후원하였다.

 영학당은 세력이 확대되자 1899년에는 자기들의 고향으로서 손화중포 세력 지역이었던 전라도 고부·정읍·흥덕·무장·고창지역에서 다시 농민전쟁과 같은 이념·목표·방법을 동원하여 재봉기를 꾀하였다. 1899년 봄, 농민전쟁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던 균전문제가 재발하였다. 균전농민들은 균전의 혁파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농성하였고, 정부에서는 진위대를 파견하여 진압하였다. 1893년 균전문제로 일어난 전주항쟁이 고부농민항쟁을 계기로 1894년 농민전쟁을 확산시켰던 것처럼, 1899년의 균전문제는 이 지역에 영학당의 무력봉기를 촉진하였다. 영학당의 목표는 고창 등지를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한 뒤 靈巖民亂所로 향하여 그들과 합세하여 광주를 점령하고, 그리고 전주관찰부를 함락한 뒤 서울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목포를 습격하여 외국인을 징벌할 계획도 세웠다. 정읍 최익서의 주도로 영학당은 1899년 음력 4월 18일 봉기하여 고부·흥덕·무장을 공격한 뒤, 22일 고창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패하였다. 영학당운동은 손화중포 잔여세력이 김개남포 잔여세력과 연대하여 주도하면서 전라도의 진보적 북접세력을 끌어들여 추진한 사회변혁운동이었다. 이로써 농민전쟁 이후 남은 남접세력이 농민전쟁의 이념을 계승하여 사회변혁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852)이영호,<대한제국시기 영학당운동의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5, 1991).
―――,<농민전쟁 이후 농민운동조직의 동향>(≪1894년 농민전쟁연구≫4, 역사비평사, 1995).

 南學黨은 동학당과의 관련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동학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여 충남과 전북지역에서 포교가 이루어진 종교조직이었다. 농민전쟁 시기에 동학과는 별도로 농민전쟁에 호응하는 연합적 봉기를 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농민전쟁 이후에는 동학과 마찬가지로 지목을 받아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농민군이 남학당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농민전쟁 이후 농민군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남학당은 동학과 마찬가지로 그 종교적 방향으로 발전하는 측면이 존재하고 그러한 방향은 남학당 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종교조직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방향 가운데는 신비주의적 방향을 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 교리의 신비주의 여부가 아니라 그 사회적 활동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이 점에서 남학당의 일부세력이 제주도로 건너가 조세문제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비롯된 1898년의 방성칠亂(제주농민항쟁)을 일으키는 주도세력이 되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853)이강오,<구한말 남학의 발생과 그 성격에 대하여>(≪전라문화연구≫1,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79).
조성윤,<1898년 제주도민란의 구조와 성격-남학당의 활동과 관련하여>(≪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4, 문학과 지성사, 1986).
강창일,<1901년의 濟州島民 항쟁에 대하여>(≪濟州島史硏究≫1, 1991).
이영호, 위의 글(1995).

 西學黨의 경우 기독교 신구교 즉 天主敎와 耶蘇敎는 그 교리체계와 교단조직이 확고하였고, 서양열강 공사관의 보호 아래 조직적으로 포교가 이루어졌다. 농민군 잔당이 이에 가입한 것은 우선 정부의 탄압을 모면하고 治外法權的 보호와 세력을 가지기 위한 것이었다. 그 교단조직이 확고한 만큼 농민군의 잔여세력이 그 속에서 조직활동을 통하여 사회변혁운동에 나서기는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사회변혁적 지향을 가진 것을 전혀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보령의 조덕필과 남포의 정행선은 야소교에 들어가 물의를 일으켜 체포된 뒤에도 주민들에 의하여 피살된 자들인데, 그들은 농민전쟁 당시 동학의 巨魁였고 뒤에 겉으로는 야소교에 의탁하고 속으로는 동학잔당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들은 수령의 지방행정을 거부하였고, 수령은 그들을 그대로 두면 다시 ‘甲午의 亂’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할 정도였다.854)≪日新≫, 1902년 7월 24일, 883쪽.
≪忠淸南北道來去案≫(奎 17989), 1902년 8월 12일·17일.

 火賊의 활동은 조선후기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고 농민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다.855)권영배,<1896∼1906 무장농민집단의 활동과 성격>(≪역사교육논집≫6, 경북대, 1984). 농민군으로서 농촌사회에 정착하기 어려운 자들은 산속으로 피신하였고, 그들은 결국 화전민이 아니면 화적이 되었다. 따라서 농민전쟁 이후 농민군으로서 화적이 된 자들은 매우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화적은 도덕적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당시 이들 화적에 다수의 사회변혁적 인물들이 들어가면서 그 조직과 지향이 변화되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반봉건·반외세의 이념을 표방한 義賊으로서의 活貧黨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활빈당의 활동은 1900∼1906년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856)박찬승,<활빈당의 활동과 그 성격>(≪한국학보≫35, 1984). 활빈당은 충청·경기지역에서 활동한 파당, 낙동강 동편의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파당, 소백산맥의 동서지역에서 활동한 파당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활빈당은 상호 횡적인 연계관계를 유지하면서 비밀스럽게 활동하였고, 조직의 보안을 위하여 입당시에 엄격한 맹세의 의식을 거치고 變姓名하며 조직을 폭로할 경우에는 보복을 가하였다. 활빈당은 양반·부호가, 관가, 장시 등을 습격하였는데, 약탈한 재물을 빈민에게 분배함으로써 활동의 정당성을 홍보하였다. 그들의 입장은 ‘大韓士民論說 13조목’에 잘 나타나 있다.857)信夫淳平,≪韓半島≫(東京堂書店, 1901). 내용은 防穀 실시와 救民法 시행, 외국상인 엄금, 행상 세금징수 반대, 금광채굴 엄금, 私田 혁파와 均田 시행, 곡가 안정, 惡刑 폐지, 소도살 엄금, 철도부설권 양여 반대 등이다. 그것은 빈농층, 소상인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반봉건 반제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행상, 유민층, 초기 노동자층, 걸인 등이 활빈당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농민전쟁 이후에는 동학농민군의 잔당들이 여러 사회조직에 편입되어 가고 그들 조직을 사회변혁운동에 활용하고자 하는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김문행은 농민전쟁-의병-영학당-의병에 차례로 가담하고 있는데,858)오지영,≪동학사≫(영창서관, 1939).
≪司法稟報≫乙, 광무 7년 2월 13일.
≪황성신문≫, 1899년 6월 23일,<南擾의 顚末(續)>.
法部 編,≪訴狀≫(奎 17281), 1905년 5월,<징역죄수 김문행의 법부대신에 대한 청원서>.
농민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조직을 사회변혁운동의 조직으로 활용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 점이 이 시기 농민군 활동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1894년 농민전쟁 이후 농민군의 동향을 조직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정부의 대책이 농민전쟁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으로서 수립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농민군의 활동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특히 외세의 침투를 경계하는 변혁운동으로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렇듯 1894년 농민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여러 가지 형태의 민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농민층은 농촌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하였고, 초기 노동자계층은 개항장·광산·철도건설현장에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농민층은 농촌사회의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봉건모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였지만, 초기 노동자계층의 노동현장은 제국주의국가의 경제적 침략현장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제기가 봉건모순 뿐만 아니라 민족모순으로도 향하고 있었다. 극빈농, 농업임노동층 및 유민층은 동학당·영학당·활빈당 등을 결성하여 반봉건 반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생산현장에서 떠나 있었지만 봉건모순과 민족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대체적으로 광무년간의 민중운동은 민족모순에 규정되는 측면이 강화되면서 반일 의병전쟁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다.

<李榮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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