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3. 형법·민법체계의 변화
  • 4) 형법의 제정

4) 형법의 제정

 조선시대는≪대명률≫을 형법의 보통법으로 시행하였으며, 형벌의 완화와 집행의 공정에 노력해왔지만, 형벌의 전단과 극형이 자행되고 권한없는 관리에 의한 체포와 구금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恤刑의 理想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갑오개혁이후 입법의 목적은 역대의 휼형이상을 실현하여 폐단들을 개혁하려는 데에 두었고, 입법은 행정관청과 사법관청의 분리 및 형벌의 완화가 근본정신이었다.891)朴秉濠,<舊韓國時代의 刑事立法의 沿革>(≪韓國法制史攷≫, 법문사, 1974), 422∼432쪽. 개혁기인 고종 31년(1894) 7월 2일에는<각 아문에서 逮捕施刑을 단행치 못하는 건>을 의결하여 軍律위반자 체포 외에 관청·군문·宮의 범인체포를 금지하고, 7월 8일에는<사법관이 아니면 형벌을 加치 못하는 건>을 의결하여 사법권의 재판절차에 의해서만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3월 25일에는 법률 제1호로<재판소구성법>이 제정·공포되어 민형사재판을 전담하게 되었다.

 고종 31년 6월 28일에는<緣坐律을 勿施하는 건>을 의결하여 종래의 연좌제도를 폐지하고, 7월 9일에는<拷刑에 관한 건>을 의결하여 새로운 형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종전대로≪대전회통≫의 <형전>을 적용하여 고문을 허락하였다. 그러다가 12월 27일 칙령 제30호<行刑의 用絞用砲하는 건>을 반포하여 사형에서 斬刑과 陵遲處斬을 폐지하고 보통사형의 경우는 교수형, 군법사형에는 총살형을 실시하는 등 획기적으로 혁신하였다.

 고종 32년부터는 국한문을 혼용한 법령으로 형사에 관한 법률들이 다수 제정되었다. 3월 2일에는<議處照律에 관한 건>이 제정되어 종전에 죄인을 처단할 때 먼저 범죄 내용과 죄질을 심의한 후 법을 적용하던 절차가 번잡하므로 범죄심의와 법적용을 동시에 하게 함으로써 절차를 간소화하였다. 4월 29일에는<징역처단례>를 법률 제6호로 반포하여 통상 범죄에 과하는 유배형을 징역형으로 바꾸고 국사범에 관하여만 流刑을 존치하기로 하였다. 건양 원년(1896) 4월 1일에는 법률 제2호로<賊盜處斷例>를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광무 9년 4월≪형법대전≫이 실시될 때까지 9년간 적도에 관한 형법이었다. 건양 원년 4월 4일에는 법률 제3호로<刑律名例>를 제정하였는데, 30개조에 이르며 형벌의 종류, 감경, 집행절차 등을 규정하였다. 형벌의 종류는 사형(교형)·流刑·役刑·笞刑의 4종류로 하고, 유형은 종신형부터 1년까지 10등급으로 하고, 역형은 종신부터 20일까지의 19등급, 태형은 100부터 10까지의 10등급으로 나누었다. 광무 4년 4월 28일에는 법률 제4호로<依賴外國致損國體者處斷例>를 제정하였는데 4개조로 되어 있는 이 법은 당시 외세와 열강의 적극적 접근에 대비하여 외국인에게 아부하여 국체를 손상하고 국권을 상실하는 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내용이다. 광무 4월 9일에는 법률 제5호로<육군법률>을 제정하였는데 317개조로 구성되어 현역군인 범죄자에게 적용되었다. 이 군형법을 마지막으로 특별법의 제정을 일단락짓고 일반형법전의 제정에 착수하였다.892)朴秉濠,<舊韓國時代의 刑事立法의 沿革>, 위의 책, 442∼432쪽.
李丙洙,<우리나라의 近代化와 刑法大全의 頒示>(≪法史學硏究≫2, 1975) 참조.
都冕會,≪1894∼1905年間 刑事裁判制度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8), 98∼116쪽.

 일반형법의 제정 움직임은 을미개혁기에 시작되었다. 1895년 6월에 설치된 법률기초위원회에서는 기초위원 법부고문 호시 도루(星亨)·노자와 게이치(野澤雞一)와 번역관 법률기초위원 玄暎運이 공동으로 작업하여 1897년 2월에≪刑法艸案≫을 법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형법초안≫은 ‘구본신참’의 복고적 분위기 속에서 폐기되었다. 특히≪형법초안≫은 그 작성에 상당한 고심을 하여 명률과의 차이점, 일본형법과의 차이점을 보이며 우리 나라의 역사적, 현실적 특수성을 고려한 진지한 태도를 보여준다.893)鄭肯植,<刑法艸案 해설>(≪法史學硏究≫16, 1995) 참조.

 조선조 최후의 일반형법전이며 법률기초위원회의 최대 입법사업이었던≪형법대전≫은 광무 9년(1905) 4월 29일 법률 제2호로 제정되었다. 근대적 형법전인 일본≪형법전≫을 수용하지 아니하고≪대전회통≫과≪대명률≫과 1894년 이후의 신법령들을 참작하여 제정한 이≪형법대전≫의 공포로 종래 시행되어 오던 모든 律例는 폐지되었다.≪형법대전≫은 갑오개혁기의 형법초안을 폐기한 후 구본신참의 원칙에 입각하여 본격적인 편찬작업에 착수한지 6∼7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680개조의 방대한 법전이나 광무 10년 법률 제1호로 32개조가 개정되었다.894)형법대전의 편찬과 관련되는 각종 草案은<引律目錄>·<普通刑法>·≪刑法草≫등이 있다. 이 자료는 文竣暎의 해제로≪法史學硏究≫제18집∼제21집(1997년∼2000년)에 소개되었다.

 통감부기에는 일본은 법부차관 쿠라토미를 형사법 기초자로 선정하여 형법을 제정하기로 하였으나,≪형법대전≫을 개정하는 것에 그쳤다. 융희 2년(1908) 법률 제19호로 90개조가 개정되고 민사법에 해당되는 263개조가 삭제되어 결국 417조만 남게 되었다.895)자세한 것은 文竣暎,<大韓帝國期 刑法大全의 制定과 改正>(≪法史學硏究≫21, 1999) 참조.

 ≪형법대전≫은 일본법률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 주로≪대명률≫을 국한문 혼용으로 간략하고 평이하게 체계화한 것 외에는 동양의 전통적인 형법사상에 입각하고 있었다. 예컨대 제678조에 不應爲律을 규정하여 근대적 죄형법정주의와는 거리가 있었고, 제2조에 引律比附를 규정하여 類推解釋의 가능성을 허용하였다. 이 근대 지향의 대법전은 한국법률가 외에 서양법률고문인 크레마지(L. Crémazy, 金雅始)도 참여하였고, 그는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출간하여 서양에 한국법을 소개하였다.896)Laurent Crémazy, Le Code Pénal de la Corée, Seoul, 1904.
田鳳德,<Laurent Crémazy와 大韓刑法>(≪法史學硏究≫5, 1979).
崔鍾庫, 앞의 책(1982), 161∼164쪽 참조.

 張燾가 편찬한≪新舊刑事法規大全≫하권(1907. 6. 발간)에는<형법대전개정초안>과<형법시행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조문만을 수록하고 있을 뿐 설명이 없으므로 초안자와 작성경위에 대하여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자체적으로≪형법대전≫을 순수한 형법전으로 개정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국권의 상실과 더불어 자주적인 형법의 시행도 수포로 돌아가고, 2년 후인 1912년 3월 18일 조선총독부 制令 제11호로<朝鮮刑事令>을 제정하여 일본형법을 의용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위 諸令에서 예외적으로 法定刑이 死刑인 謀殺罪·강도죄 등에 대해서는 형법대전의 효력을 인정하였다. 이 예외 조항은 1917년<조선형사령>의 개정으로 폐지되었다.

 형사법제의 근대화는 형식적으로 볼 때 법치주의적 근대화를 향한 의욕적 진전이라고 볼 수 있고, 결코 무비판적인 급격한 근대화가 아니라 형벌의 완화에 중점을 둔 서서한 개혁이었다. 그것은 明律 전통의 토착적 강인성과 학문적 빈곤상태 아래서 서구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근대형법의 적극적 수용이 쉽게 이해되고 추진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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