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3. 형법·민법체계의 변화
  • 5) 형법·민법과 법생활

5) 형법·민법과 법생활

 새로운 법전이 제정된다는 것은 법생활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법전대로 법생활이 자동적으로 일치되지 아니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전통적 법생활에 젖어있던 개화기에 복잡한 입법절차와 내용의 새 법률에 의해 법생활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없었음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실상을 파악하는 것이 당시의 진정한 법근대화의 실상을 아는 길일 것이다.

 1906년 가톨릭계가 창간한≪경향신문≫에서는 일제에 의한 법을 통한 식민화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법률 계몽활동을 하였다.897)자세히는 崔鍾庫,<韓末 京鄕新聞의 法律啓蒙運動>(≪法史와 法思想≫, 박영사, 1981), 522∼554쪽. 입법자들만 아는 당시의 법제도를 국민들에게 현행법전을 조목조목 해설해 준 것은 참으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형법대전≫조문해설은 대개<寶鑑>이란 이름의 間紙에 ‘법률문답’의 난을 통하여 나갔는데, 살인에 관한 율, 분묘에 관한 율, 관원을 죽인 율, 殺獄에 私和한 율 등으로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한 예를 보면 아래와 같다.

사람을 죽이기를 꾀한 율

 [문] 사람 죽이기를 꾀한 자와 의사를 지시한 자와 그 일에 손을 댄 자와 힘을 도운 자에게 무슨 벌이 있느뇨.

 [답] 다 絞에 처하되 다만 따라가기만 하고 손을 대고 힘을 도움이 없는 자는 일 등을 감하나니라(≪형법대전≫제473조 이하 조문 생략).

 [문] 사람의 몸을 부러뜨리거나 베히거나 정기를 뺀 자에게 무슨 벌이뇨.

 [답] 시작하고 따라 한 것을 불문하고 다 絞하나니라(≪형법대전≫제474조).

 [문] 귀신에게 기도함과 부작(符書)이나 진언(詛呪)으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 무슨 벌이뇨.

 [답] 교에 처하나니라(≪형법대전≫제475조).

 [문] 인명을 상할 뜻으로 폭발물을 남의 집에나 길에 두어 사람을 상케 한 자에게 무슨 벌이뇨.

 [답] 시작한 자나 같이 한 자나 다 교에 처하고 독약을 사주는 자도 교하되 모르고 사준 자는 일등을 감하나니라(≪형법대전≫제376조).

(≪寶鑑≫Ⅰ, 1906, 219쪽)

 이와 같이 문답형식을 빌려≪형법대전≫의 조문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덜 개화된 법의 내용에 대하여 아무런 논평도 없는 것이 주목된다. 지금의 법개념으로 보면 아직 미개한 기이한 형법관념이요, 경직화된 유교윤리적 발상에 근거한 기형적인 법규범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법이었으니 만큼 아무런 논평없이 국민들에게 알리고 가르치기만 했던 것이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문] 사람죽인 것을 私和케 한 자는 어떠하뇨.

 [답] 笞 60인데 인하야 재물을 받은 자는 그 장대로 제631조의 법을 그르친 율로 의논하나니라(≪형법대전≫제505조).

 [문] 친속이 죽임을 받은 경우에 사화한 자는 어떠하뇨.

 [답] 아래 벌인대로 하나이다.

1. 조부모가 부모나 남편이나 남편의 조부모나 부모에게는 징역 3년이요, 아내나 첩이나 자손이나 자손의 처첩에는 태 80이니라.

2. 朞服尊長이면 징역 2년이며 아래 어린이면 징역 1년반이니라.

3. 大功尊長이면 징역 1년이며 아래 어린이면 열 달을 가두나니라.

4. 緦麻尊長이면 열 달을 가두며 아래 어린이면 여덟 달을 가두니라.

(≪寶鑑≫Ⅰ, 1906, 341쪽)

 현행법을 그대로 알리고 그야말로 법률을 ‘문답’하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관권보다는 민권의 편에 서서 법계몽을 수행하려는 언론에서 ‘법률문답’의 난을 고정적으로 싣고 1906년 창간호부터 1915년까지 계속하였다는 사실은 내면적 논리로서는 당연한 것이면서도 실로 괄목할만한 것이라 하겠다. 지금은 법률신문·잡지도 따로 있고, 각종의 법률상담소, 변호사 사무실도 있지만 ‘법률문답’, 즉 법률상담을 처음 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법은 관리만이 아니라 인민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혁신적인 것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위하여 ‘법률문답’이라 하여 구체적인 법계몽, 법의 대중화를 벌인 것은 실로 선구적인 중요성을 띤다고 하겠다. 이것은 개화된 실정법률과는 별도로 법률의 무지와 오해로 법생활은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켜준다. 구체적인 몇 예를 보기로 하면, 우선≪형법대전≫에 비추어 ‘결혼하고 破約한 사례’에 대한 법률 안내로 다음과 같이 ‘문답’한다.

[문] 결혼하고 사주단자와 선체를 받고서 퇴혼하고 다른 데 결혼하면 어떠하뇨.

 [답] 결혼하고 퇴혼이 도모지 좋은 일은 아니나 만일 불합한 일이 있으면 사주단자를 환송하고 퇴혼하는 풍속이 예사로 되어 있고 선체를 받은 후는 퇴혼치 못하나 만일 범하면 법률이 있나니라.

 [문] 그 법률이 어떠하뇨.

 [답] 형법대전에 똑똑히 있으니 조목을 호와 말하노라. 1은 둘째 번 정혼한 사람과 아직 성혼치 아니하였으면 주혼자를 태 70에 처하고 이미 성혼하였으면 주혼자를 태 80에 처하고, 2는 둘째 번 정혼한 신랑의 집에서 결혼한 곳이 있는 줄을 알고도 짐짓 정혼하였으면 신랑편에 주혼자도 같은 벌에 처하느니라.

 [문] 그러면 성혼여부는 어떻게 하느뇨.

 [답] 만일 두 번째 정혼한 사람과 아직 성혼이 되지 아니 하였다면 새악씨 집에서 두 번째 정혼한 집에서 받은 선체 물건은 속공하고 그 새악씨는 첫번 결혼한 사람과 성혼하나니라.

 [문] 처음 결혼한 사람이 그 새악씨와 성혼하기 싫다면 어찌 하느뇨.

 [답] 첫번 결혼한 사람이 싫다하면 둘째 번 정혼한 사람과 성혼하겠으나 다만 성혼하는 신랑편에서 선체 물건을 갑절을 하여 일반은 첫 번 결혼한 집에 보내느니라.

 [문] 만일 신랑편에서 이런 일이 있으면 어찌 하느뇨.

 [답] 태벌은 이 우헤같고 재물갚을 것은 없느니라.

 [문] 결혼을 단단히 하고 예물까지 받은 후에도 의례히 퇴혼하는 법이 혹 있느뇨.

 [답] 두 가지 연고밖에 없으니 성혼치 아닌 남녀가 사음을 범하였거나 도적에 범하였으면 이런 것은 이 법률 속에 들지 아닌 것이니 곧 파혼하나니라(≪형법대전≫제11장 제1절,<혼인위범율>제559조).

(≪寶鑑≫Ⅰ, 1906, 297쪽)

 법률만이 아니라 부령·규칙에 관하여도 ‘법률문답’은 다루고 있고, 또 민사관습에 연결된 문제들도 많이 다루고 있는데, 한 예로 ‘종을 贖良’하는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 어떤 사람이 남의 종으로 있을 때에 딸자식을 낳은지라, 지금은 속량하야 나왔으나 그 딸은 그저 종대로 상전의 집에 있는데 그 부모가 상전의 마음에 넉넉하도록 돈을 주고 그 딸을 속량하는 것이 법이 있느뇨.

[답] 法規類篇 規制門 제16類 雜則 제13조 노비의 법을 혁파하는 조건에 관가와 사가의 노비법을 없이 하고 또 종사는 것을 금하였으니 지금 어찌 종이란 명색이 있으며 하물며 돈을 넉넉히 내고 속량하겠나니 이런 것이야 다시 말할 것이 무엇이냐.

(≪寶鑑≫Ⅰ, 1906, 187쪽)

 보다 민간에 퍼진 구습·악습 등을 타파하는 방향의 ‘법률문답’도 있다. 무당들의 비행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기사가 종종 나오고, 한 ‘법률문답’은 ‘과부동이는 악습’을 논하고 있다.

[문] 이전부터 시골서는 과부를 동혀다가 작배하는 폐습이 있었으니 지금도 그러하뇨.

[답] 이것이 악한 버릇이요 또 이로 인하여 다른 대죄가 종종 생기는고로 새로 내각이 될 때에 법부대신 조중응씨가 이 버릇을 통절히 금하노라고 십삼도 관찰부에 훈령하야 관하 각군 방방곡곡에 방을 붙이고, 펴일러 이후로 만일 전과 같이 과부를 동히는 폐단이 있으면 곧 그 동리·동장이 고관하여 본읍에 엄수하고 본읍에서는 본도 재판소에 보고하야 겁탈 강간하는 율에 의지하여 嚴懲無赦함으로 후패를 영원히 막으라 하였으니 이 훈령이 광무 11년 6월 19일에 났나니라.

(≪寶鑑≫Ⅰ, 1906, 235쪽)

 한걸음 나아가 ‘법률문답’의 형식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진보적으로 민중의 법의식 자체를 앞장서 인도해주는 것도 보인다. 개화기에 한참 문제가 되었던 斷髮에 관하여 ‘법률문답’에서 다룬 태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문] 일반 상하 관민이 머리깎는 것이 무슨 법령이 있느뇨.

[답] 법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각국이 거진다 머리를 깎았고 그 외국사람들이 많이 대한에 있고 또 우리 나라가 외국 정치 풍속을 배우고저 하는고로 자연 그러한 것이니 교민이나 백성이나 물론 아무하고 깎고 아니 깎기를 제 마음대로 할 것이요 법에 상관은 도모지 없으며 삭발령이 난다는 말은 여러 번 있었으나 아직 나지도 아니하였고 또 이런 령이 아니나기를 바라노라.

(≪寶鑑≫Ⅰ, 1906, 339쪽)

 이렇듯 단발같은 것은 어떤 국법에 의하여 시행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개화된 문명국의 풍속을 따라 민중 스스로 솔선수범할 일이라고 종용하고 있다.

 이러한 ‘법률문답’이 어느 정도 민중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가.≪경향신문≫1909년 3월 5일자 논설을 보면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본 신문에 각 지방에서 오는 긔서(편지) 중에 여러 가지 새로 나는 법 때문에 묻는 말들이 많고 우리가 원대로 그 법을 살피고 각부에 알아보아 보감 법률문답에 유의하도록 대답하기를 힘쓰고 여러 지방에서 오는 공함을 보니 본 신문을 보시는 여러분이 그 가르쳐 대답함을 인하여 여러 가지 폐단을 면하고 본 신문을 고마와하는 말을 듣고 우리가 매우 즐거워하나니 본 신문을 고히 우리 사랑하는 동포를 도와주는 연고뿐이외다.

그 묻는 말 중에 법률문답에 대답치 못하는 여러 가지 있으니 곧 법을 알기 위하여 특별히 묻는 것이 아니요 의심있는 마음을 퉁치고 내는 것이라, 대개 말하기를 재판을 하려는데 재판소 관인들에게 의대로 하는 증번됨을 얻을 수 없으니 어떻게 하겠느뇨도 하고, 학교가 집이나 아모 일을 시작하려는데 나중에 日人들에게 빼앗길까 무서우니 어떻게 하리요도 하고, 삼림규칙대로 하려는데 측량부비는 대단하고 얻는 이익은 적어 어려우니 어떻게 하겠느냐도 하고, 새 처사도 나고 새 말이 많고 새 협잡도 나니 어떻게 하겠느냐도 하는 것과 같이 날마다 그런 묻는 말이 많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경향신문이 항상 백성의 마음을 일어나게 하기로 실망하지 말라하고 힘쓰면 의대로 됨을 얻겠다고 하니 이는 경향신문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아픈 것을 덜 아프게 위로하는 말이 아닌가 경향신문을 그대로 참 믿을까 하는도다(≪경향신문≫125호, 1909년 3월 5일, 논설<대답하는 말>).

 구체적으로 민중의 법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가르쳐 대답함을 인하여 여러 가지 폐단을 면하고 본 신문을 고마워하는” 정도에 이른 것만은 확실했다고 하겠다.

 중국의 명률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의 전통법은 공법과 사법으로서의 형법과 민법의 구별이 명확하지 아니하고, 특히 일반 민중의 거래생활과 권익을 보장하는 민법의 역할은 매우 미약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법근대화의 과정에서 비로소 민법과 형법이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제정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우리 나라의 문화사와 정신사에도 큰 의미를 갖는 발전이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법근대화의 시기가 개화기라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혼란한 상황이어서 법제의 근대화는 일사불란하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진퇴를 거듭하는 복잡한 과정을 보여 주었다. 서양인 법률가도 참여하였지만 근대적 법학지식이 박약한 한국인 법률가들로서는 일본인 법률전문가들의 간섭과 지도를 배제하기 힘들었다.

 조선시대에는 법을 ‘禮主法從’이라는 관념에 입각하여 德治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법에 대한 인식은 일변하였다. 법은 문명개화의 척도로 여겨졌고, 부국강병과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인식 자체는 당시 풍미한 사회진화론과 결부되어 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기능도 하였다. 현실을 비추어 보면 문명국인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법제의 정비를 위한 준비론도 등장하였다. 개화기 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수용된 서구법은 법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의 변화와 제국주의, 특히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양면성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왔다.898)鄭肯植,<開化期 西歐法의 受容과 意義>(≪법제연구≫8, 한국법제연구원, 1995), 39∼47쪽.

 그리하여 법제의 근대화는 명분상으로는 한국의 개화와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은연중 일본의 침략정책의 수단으로 되어 진실로 한국인의 권익을 위한 법으로 인식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단시간 동안에 쏟아져 나오는 신식 법률들의 양산은 한국인의 법률에 대한 무지와 불신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06년에 창간된≪경향신문≫에<법률문답>이라는 고정난을 설치하여 한국인에게 법률을 알리고 법을 잘 아는 것이 권익을 지킨다는 법률계몽운동을 전개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崔鍾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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