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 지방자치제의 추이
  • 2) 갑오개혁기의 지방자치정책과 지방자치

2) 갑오개혁기의 지방자치정책과 지방자치

 제도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말 지방자치정책은 1894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이 소강상태였던 시기에 단행된 갑오개혁은 행정·재정을 포함한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었고 그 가운데 지방제도의 개혁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894년 7월에 공포된 군국기무처의<鄕會에 관한 의안>은 중앙정부가 지방제도 개혁에서 군현 및 면의 자치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가려고 하였는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道臣으로 하여금 地方官에 飭하여 鄕會를 設立하되 各面 人民들이 綜明老鍊한 자 각 1인을 圈選하여 鄕會員으로 삼고 本邑 公堂에 모여 무릇 發令, 醫療 등에 관한 事項으로 마땅히 本邑에서 施行할 일의 可否를 評議하여 公同으로 決定한 後 施行하도록 한다(≪舊韓國官報≫, 1894년 7월 12일,<군국기무처 의안>).

 중앙정부는 지방자치의 주체를 향회로 규정하고 향회에 ‘총명’하고 ‘노련’한 인물들을 선발하여 자치운영의 중추적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향회는 재지사족을 중심으로 하는 ‘향약질서’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커다란 차이는 기존의 향약이 재지사족의 조직이었다고 한다면 향회는 재지사족의 지방 지배력이 약화되고 요호부민 등 새로이 성장하는 계층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1862년 농민전쟁시에 향회는 이미 지방정치의 중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래로부터 향회조직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갑오농민전쟁을 통해 이것이 정치적 힘으로 작용함으로써 결국 1894년 중앙정부는 향회를 지방자치의 공식 기관으로 추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땅히 本邑에서 施行할 일의 可否를 評議하여 公同으로 決定한 後 施行하도록”한 것은 민의 수렴기구로서의 향회의 기능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902)정창렬,<한말 변혁운동의 정치·경제적 성격>(≪한국민족주의론≫, 창작과 비평사, 1982).

 중앙정부가 자치제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1894년 9월의<結戶錢捧納章程>의 기사를 보면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1. 結政은 守令이 實結을 좇아 作夫하고 帳簿를 만들어 鄕員에게 移送할 것(중략).

4. 한 고을의 公錢과 公穀은 다시는 守令과 吏胥層의 손을 거치지 않게 할 것.

5. 한 고을에 鄕會를 設置하여 兼幹人을 公擧하여 文·陰·武·生·進·幼學 등에 구애받지 말고 모두 鄕員이라고 부른다. 鄕員은 大邑에 3명, 中邑에 2명, 小邑에 1명을 둔다.

6. 각 面에서도 역시 兼幹人을 選出하여 面鄕員이라고 부른다. 面鄕員은 公貨를 檢納하고 邑鄕員이 委託한 일을 處理하며 (세금은) 邑에 갖다 내거나 銀行에 輸送한다(중략).

9. 鄕員은 公錢을 檢納한 후 度支衙門에서 파견한 差員의 公文을 기다려 中央機關, 銀行에 公錢을 收納하거나 各面이 직접 銀行에 收納하면 憑票를 받아서 施行할 것(하략)(≪公文編案≫제4책, 奎 18154,<함경도 고원군수에게 보낸 훈령>).

 중앙정부는 앞서 말한 대로 향회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자치 요구를 수용하는 효과를 거둠과 동시에 향회를 통해 그 동안 국가운영의 핵심적 문제가 되었던 재정운영구조상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 하였다. “한 고을의 公錢과 公穀은 다시는 守令과 吏胥層의 손을 거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정부는 수령과 이서층을 재정운영구조에서 제거하고 이에 대신하는 기구로 향회를 이용하려 하였다. 중앙정부는 ‘탁지아문-향회의 향원-면회의 면향원’으로 이어지는 조세 수입의 계통을 새롭게 확립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방자치조직의 건전한 발전과 동시에 중앙정부의 자치조직에 대한 장악력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향원의 계층구성의 관한 것이다. “文·陰·武·生·進·幼學 등에 구애받지 말고”라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듯이 이제 향회는 재지사족이나 신향, 토호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분제 해체 이후의 유동적 계층이동의 양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말 지방자치의 발전 방향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변화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지방자치제도의 큰 가닥을 잡은 중앙정부는 8월 충청도, 경상도, 함경도에 향회를 설치하라는 훈령을 내림으로써 향회를 통한 지방자치제도의 전국적 시행을 서둘렀다.903)≪公文編案≫권 3(奎 18154), 22책.

 그러나 이러한 갑오개혁 초기의 방향은 동년 10월 일본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공사가 서울에 들어와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일본인 고문관을 배치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변질되기 시작하였다.904)유영익,≪갑오경장연구≫(일조각, 1990).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김홍집내각은 1895년 3월<內閣官制>를 반포하여 군주권을 약화시킨 뒤 내부대신 박영효 등을 중심으로 제도 개정을 단행해 갔다.905)왕현종,<갑오개혁기 관제개혁과 관료제도의 변화>(≪국사관논총≫68, 1996). 이 시기 중앙정부의 정책방향은 자치조직의 재정간여를 배제하고 일제의 통제권 아래 있는 재무기구를 신설하는 것을 골간으로 하고 있었다. 일제는 갑오농민전쟁을 무력화시키고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킨 후,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던 지방자치정책을 일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1895년 3월과 4월에 각각 공포된<關稅司及徵稅署章程>·<各邑賦稅所章程>·<수입조규>는 이러한 정책방향을 말해주는 제도적 표현이었다. 이들 규정에 의해 각 도에는 관세사가, 군에는 징세서와 부세소가 각각 설치되었다. 결국 이전의 향회가 담당하고 있었던 지방재정관계 기능은 이제 도의 관세사와 군수 및 징세서의 징세주사에 의해 장악되었다. 물론 재정문제와 관련된 신설기관들을 일제가 장악하는 것이 전제되어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향회 그 자체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선 향원의 역할을 박탈하고 다시 군수 및 징세주사나 납세 총대인에게 징세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 자치조직의 기능과 역할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바로 직후인 5월에는 23府制가 실시되어 오랜 세월 유지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었다.906)윤정애, 앞의 글. 23부제는 종래의 大구역제인 8도를 한성·인천·충주·동래 등 22개의 府域으로 세분하고 각 부 밑에 군을 소속시키는 소구역제도였다. 이 지방행정구획제도의 개편 역시 일본인 고문관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일본의 3부 72縣制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 개편에도 다른 목적이 내재하여 있었다. 23부제 시행 직후 9월에는 관세사·징세서가 개설된지 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세사·징세서 및 각 읍 부세소 장정의 시행을 정지하고 군수에게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모두 전담시키는 제도를 복원하게 된다. 이에 의해 각 군에는 세무과가 설치되고 세무주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재정운영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907)김태웅, 앞의 책. 23부제를 시행토록 한 일제는 이제 각 부 및 군의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부·군의 세무과를 장악함으로써 보다 일원화된 지배체제를 구축해 가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1895년 11월 3일<鄕會條規>와<鄕約辦務規程>이 공포되었다.908)송병기 외,≪한말근대법령자료집≫1(국회도서관, 1970), 600∼605쪽. 1894년이래 짧은 기간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 왔던 지방자치제도는 이로써 그 기본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두 법령은 1894년 군국기무처 의안으로 설치되기 시작하였던 향회를 법제화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지만, 앞서 보았던 대로 일제의 작용에 의해 재정운영의 권한을 상실한 상태에서의 법제화라는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었다.

 향회는 군·면·동리의 지역단위별로 大會·中會·小會라는 三級 향회로 나뉘어 구성하도록 규정되었다. 소회는 尊位와 해당 里內 매호 1인으로 구성하고, 중회는 執綱과 해당 면 소속 각 리의 존위와 각 리에서 임시로 선출한 2인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대회는 군수와 각 면 집강, 그리고 각 면의 公擧人 각 2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각급 향회는 교육·호적·지적·위생·社倉·도로·교량·식산흥업·공공산림·堤堰 洑港·기타 제반 세목과 납세·환난의 구휼·공공복역·제반 稧會·新式令飭 등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었다. 논의사항은 향회에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였으며 최종 재결권은 면집강과 군수·관찰사에게 부여하였다. 향회의 수석은 존위·집강·군수가 맡으며 차석은 부역을 많이 담당하는 上等戶民이 맡도록 하였다.

 <향약판무규정>에서는 면·리任의 직능과 명칭·보수 등을 규정하였다. 즉 리에는 존위·서기·頭民·下有司 각 1인을 두고, 면에는 집강·서기·하유사·面主人 각 1인을 두어 면리의 호구·산업조사의 임무를 맡게 하고 그 경비지출은 面里內에서 해결하도록 하였다.

 존위는 소회에서 반상에 관계없이 선출되어 1년 임기로 리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임무를 위배하였을 때는 소회원이 회동하여 이유를 두민에게 고하고 상급 면에 보고한 후 임기에 상관없이 경질할 수 있었다. 서기는 존위의 명을 받아 리의 장부기록과 보고문건을 관장하였다. 서기 역시 존위와 마찬가지로 1년 임기로 리회원이 공동으로 정하되 임무에 위배되었을 때는 경질할 수 있었다. 두민은 里內에서 나이가 들고 세상일에 밝은 사람으로 정하고 존위 유고시에 그 사무를 대신 담당하였다. 그리고 리내 사무상 고증이 어려운 사안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면집강은 군수의 명을 받아 면의 대소 사무를 관장하고 소속 존위들을 감독하였다. 1년 임기로 면내 各里 존위와 공거인이 공동 회의하여 반상에 관계없이 선출하였다. 임무에 위배되는 일을 하였을 때는 해당 면리의 존위와 공거인이 회의하여 군에 보고한 후 임기에 구애받지 않고 다시 선임할 수 있었다. 서기 역시 그 기능과 권한은 리의 서기와 동일하였다. 면주인은 군과 소속 각리에 공문을 발송하는 역할을 하였다.

 1895년 11월 단계의 중앙정부의 지방자치정책은 이상과 같이 향회의 조직 구성이라는 점에서는 구체적 제도정비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정확하게 의미해석을 해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정책은 1894년 7월의 정책과는 여러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재정문제와 관련하여 언급한 대로 1895년 11월의 제도는 1년여간의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자치성이 상당히 후퇴한 형태로 귀결되었다. 특히 대회의 장을 군수가 겸직한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갑오개혁 초기의 정책과는 달리 중앙정부와 일본이 자치기구를 관제화하려는 강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각급 향회에 여러 기능을 부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행정기구의 장을 보좌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향약질서’ 하에서도 수령과 별도로 좌수·별감이 존재하였고 이들의 이원화된 구조가 지방정치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에 그 나름으로 역할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상기해보면 대회의 장을 군수가 겸직한다는 것은 향회의 자치성을 부정하고 행정기구의 보좌역할로서 ‘자치기구’를 설정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향회조규>·<향약판무규정>은 관제자치기구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면 이하의 단위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면과 동리의 경우 향회의 長을 곧 해당지역의 행정 수장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형식적으로는 향회라는 자치기구의 틀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면 행정기구로서의 집강·서기·下有司, 동리 행정기구로서의 존위·서기가 제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회와 소회는 이들 집강과 존위의 자문기구로서밖에 역할할 수 없었고 이는 결국 집강과 존위가 각각 행정기구화하는 전단계였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1894년 7월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재정구조 안정화라는 중앙정부의 필요가 맞아 떨어져 시작된 지방자치제도는 일본의 간여, 갑오농민전쟁의 패퇴, 중앙정부의 점차적 보수화로 인하여 관제자치기구의 형성을 예고하는<향회규칙>·<향약판무규정> 체제로 정착되어 가고 말았다. 이러한 귀결은 이후에도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한말의 자치제가 외세에 의해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큰 물결속에 휘말려 가는 전주곡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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