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 지방자치제의 추이
  • 3) 광무개혁기의 지방자치정책과 지방자치

3) 광무개혁기의 지방자치정책과 지방자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내각이 무너짐으로써 정국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가기 시작하였다. 2월 11일에 내려진 고종의 조칙은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가 새로이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정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해 갈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909)≪高宗實錄≫권 34, 건양 원년 2월 16일. 정책의 기본을 舊本新參에 두고 있었던 이 시기 정책의 기저는 지방제도의 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앙정부는 1896년 8월 우선 23부제를 폐지하고 전통적인 8도제에 기본하는 13도제를 시행하였다.910)윤정애, 앞의 글. 13도제에서는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한성·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덕원·경흥에는 따로 府를 두었고 제주에는 牧을 설치하여, 총 13도 8부 1목 332군의 지방행정구역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지방제도 정비는 행정구획 조정에 그치지 않고 중앙 파견 지방관의 상하명령체계를 체계화하는 차원에서도 진행되었다. 도에는 勅任 3등 이하의 관찰사 1인, 부에는 奏任인 부윤 1인(한성부만 칙임 3등 이하의 판윤), 목에는 주임의 牧使 1인, 군에는 주임의 군수 1인을 두게 하였고, 관찰사는 내부대신의 감독을 받고 다시 군수를 감독하는 상하 명령체계를 명확히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23부제의 시행 및 관세사의 설치로 행정·재정의 이원화 등 복잡하였던 행정체계가 일원화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방자치의 면에서는 기본적으로는 향회조규체제를 그대로 둔 채 그 성격상의 변화를 기하는 차원에서 변화가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시기의 정책은 구본신참을 기저로 하면서 중앙집권적 근대화의 추진을 목표로 전개되고 있었다. 지방자치의 구본신참은 역시 구래의 자치기구의 기본성격을 어느 정도 살리는 것이었다. 갑오개혁기의 향회조규체제는 향회를 제도화한 반면 그것을 관제자치기구로 만들려는 의도를 강하게 지니고 있어, 구래의 자치기구와는 달리 행정기관의 장이 자치기구의 장을 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향회조규>의 기본틀은 그대로 두면서 향회의 장을 별치하는 방식으로 자치제도 문제를 풀어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군단위에 새로이 향장이라는 직을 두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1896년 8월<地方官吏職制>를 반포하고 여기에 향장의 직을 규정하였다.911)≪舊韓國官報≫4책, 제400호, 건양 원년 8월 10일. 향장은 지방자치기구의 장으로서 한성부를 제외한 각 부와 군에 1명씩을 두도록 하였다. 향장을 포함한 군단위의 직제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1>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향장은 군수를 비롯한 다른 행정관리와는 달리 일종의 활동비로 여겨지는 월 6원의 월봉을 받는 특수한 직책이었다. 중앙정부는 행정기구의 계통적 질서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향회조규체제에서는 군수가 겸하게 되어있던 향회의 수장을 향장이라는 직명으로 새로이 독립시켰던 것이다. 이는 자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향회조규체제보다는 다시 일보 진전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구본신참을 내세우면서 구래의 질서를 일정부분 체제내로 포섭해 내려는 중앙정부의 의도가 잘 표출되는 대목이라 하겠다.

구분 1등군 2등군 3등군 4등군 5등군
인원수 연봉 인원수 연봉 인원수 연봉 인원수 연봉 인원수 연봉
郡 守 1 1000 1 900 1 800 1 700 1 600
鄕 長 1 72 1 72 1 72 1 72 0 0
巡 校 6 288 6 240 5 240 4 192 2 96
首書記 1 96 1 84 1 84 1 84 1 84
書 記 8 576 7 504 7 504 6 360 4 240
通 引 3 108 3 72 2 72 2 72 2 72
使 令 8 288 8 216 6 216 6 216 4 144
使 傭 4 144 4 72 2 72 2 72 2 72
使 僮 3 108 3 72 2 72 2 72 1 36
客舍直 1 12 1 12 1 12 1 12 1 12
鄕校直 1 12 1 12 1 12 1 12 1 12

<표 1>1896년 각 군 등급별 인원수와 연봉 (단위:元)

*김태웅,≪개항전후∼대한제국기의 지방재정개혁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7, 173쪽.
≪議奏≫64책, 건양 원년 7월 24일,<地方制度에 關한 請議書>.

 이러한 점은 향장이 조선시대 향약의 좌수와 같은 존재이며 좌수·별감이 있던 향청에서 집무함을 강조하고 있는 아래 자료의 문맥에서도 잘 나타난다.

鄕長은 前의 座首라 郡守를 補佐하고 郡民을 總代하여 官民間에 一切 公務를 承接하고 現在는 郵遞事務를 兼任하니 鄕長의 職權이 甚要할뿐더러 各項 慣例와 關係한 民邑의 일을 悉由座首하여 郡守에게 建白도 하며 인민에게 佈議도 하는 고로 各郡 郡衙의 次에 原來 鄕廳이 있으니 즉 鄕長의 執務의 場所라(≪地方制度調査≫, 국립중앙도서관, 한-31-62).

 위의 표현은, 향회조규체제에서 군민을 총대하는 역할이 행정 수장인 군수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좌수와 같은 인물을 명칭만 향장으로 바꾸어 구본을 살리고 자치성을 제고시키려고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된다. 나아가 향장으로 하여금 군민을 대표하여 민간의 일체의 공무를 처리하고 군수에게 민의를 전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체사무까지 겸하게 하여 그 직권을 강화시켰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아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향장의 자격은 해당구역내에서 士民과 吏額에 관계없이 7년 이상 거주자로서 聲望과 才諝가 있는 자였고, 해당 지역민들이 회의·투표를 통해 추천한 자를 군수가 최종 임명하도록 하였다.

各郡 鄕長은 該郡 區域內 士民과 吏額을 勿拘하고 聲望과 才諝가 素著한 人으로 郡守가 選擇하되 該郡 大小民이 會議 投票하여 다수를 從하되 本郡에 入籍 居住한지 未滿 七年한 人은 應選치 못함(≪日省錄≫, 건양 원년 6월 28일).

 구본을 따르되 갑오개혁이래 이미 반상에 구애되지 말도록 하는 신분철폐의 원칙과 대소민의 회의·투표로 향장을 택하게 하는 선출원칙은 근대화 정책의 방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96년 단계에서의 지방자치정책이 자치기구의 자치성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아래 전개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향장을 별치함으로써 군수가 자치기구의 장을 겸직하였던 제도를 개선하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향장은 군의 직제에 포함되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별정직 공무원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조선시대 좌수·별감과 같이 독립성과 지역성이 강한 존재는 아니었다. 중앙정부는 구본에 따라 자치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살리면서 내용적으로는 향장 자체를 지방행정기관의 관리로 만듦으로써 향장의 장악, 향장을 통한 자치기구의 장악이라는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던 것이다. 민의 추천과정을 거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군수가 향장을 임명하게 한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지방자치정책의 방향성은 면리 단위에서도 관철되고 있었다.

一. 面長(혹은 執綱이라 부름)은 該面內 聲望解事理하는 士族 中 老成人으로 本郡守가 選定하고 該面內 各洞 民人이 聚會하여 圈點選定도 함.

一. 面任(또는 風憲이라 함)은 郡守의 命令을 이어 所管 面內 各 洞長에게 指揮하며 凡係 徭役 賦稅 등 事項으로 各 洞長 洞任을 牽率 蕫飭하며(중략)

一. 該 面內 民人의 家座成冊과 戶口帳籍을 面任이 官令으로 各 洞長에게 轉飭하면 各 洞長은 各 民人에게 知委하여 洞長이 面任에게 거두어 給하고 面任은 모두 모아 官에 냄(≪地方制度調査≫, 국립중앙도서관, 한-31-62).

 ≪지방제도조사≫에 나타난 면·동리 관련기사를 보면 우선 면에는 면장을, 동에는 동장을 두게 함과 동시에 면임·동임을 두어 조세·호적 등의 행정업무를 담당케 했음을 알 수 있다. 지방행정의 체계를 이전에 비해 계통적으로 정리한 중앙정부는 지방자치의 측면에서도 면장·동장의 위치와 역할을 명확히 한 위에 행정조직의 계통 역시 면임·동임을 통해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로써 내부-관찰사-군수-면임-동임으로 이어지는 일원적인 지방행정계통이 확립되었고, 또한 면·동리 단위에서의 자치제도 역시 이전보다는 안정된 제도적 기반위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1896년 단계에서의 지방자치정책은 기존의 동리·면·군단위의 향회조직을 그대로 살리면서 향회의 수장을 동장·면장·향장으로 독립시키는 대신 이들을 행정관리화하는 방향에서 전개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갑오개혁시의 지방자치정책과 비교해 볼 때 이 시기의 정책은 자치성의 부분적 인정이라는 측면에서 조금 진전된 성격을 나타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광무정권이 추구하였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의 구축이라는 틀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지방자치정책의 성격은 중앙집권적 행정조직의 체계화라는 과제와 자치제의 발달이라는 측면이 서로 길항하면서 발전해갈 수 있는 여지는 남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후술하는 통감부 시기의 정책기저와 비교한다면 아래로부터의 근대화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남기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통감정치에 들어가기 직전인 1905년 단계의 일이기는 하지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金星圭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측면은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912)김태웅, 앞의 책.

 그는 지방사회 운영의 근간을 향약에서 구하면서 군과 면·동리에 향약을 설치하고 군향약에는 도약장 1인을, 면향약에는 면약장 1인과 면임 1인을, 리향약에는 두민 1인과 존위 1인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향회와 都鄕會, 大鄕會를 별도로 설치하여 자치기구에 대한 민의 참여도를 높이는 구상도 제출하였다. 여기서 향회는 도약장과 각면 약장이 회동하는 會를, 도향회는 도약장과 각리의 두민·존위가 회동하는 회를, 대향회에는 도약장과 각면 약장과 각리의 두민·존위 및 각리 해사인이 모두 회동하는 회를 의미한다.

 이 향회는 중앙정부가 취한 지방자치정책보다 자치성을 더욱 가미한 것으로 군수와 수서기 등의 지방관리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김성규가 시행한<民弊民瘼矯革章程>을 보면 도약장과 각면 약장은 향회를 열어 군수와 서기, 수교 등의 위법을 관에 고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그래도 시정이 안될 때에는 대향회를 열어 이를 다시 관에 고할 수 있었다. 그래도 시정이 안되면 관찰사와 내부, 평리원까지 상소하도록 되어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군수의 향회에 대한 관여를 애초부터 봉쇄하여 민의수렴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말한<향회조규>는 물론 향장제를 실시한 1896년 단계의 자치정책과 비교해보아도 일보 진전된 것으로 평가해 모자라지 않다. 또한 대향회 등을 통하여 지역의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관권을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구비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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