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 지방자치제의 추이
  • 4) 통감부시기의 지방자치정책과 지방자치

4) 통감부시기의 지방자치정책과 지방자치

 광무개혁 이후 1906년까지의 지방자치가 중앙의 집권적 지배체제구축 정책과 지방의 자치확대를 향한 힘이 길항하는 과정이었다면 통감부시기의 지방자치는 일제에 의한 지방자치의 파괴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조선 침략을 꾀하면서 초기부터 지방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직접 지배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려 하였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의도는 이미 갑오개혁 후기의 지방자치정책에서 표출된 바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서의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한 일제는 지방사회의 장악을 위한 본격적인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 4월 7일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주도하에 地方制度調査所가 설치되고 이들 활동의 결과로 지방자치정책의 새로운 방향이 제시된다. 지방제도조사소에는 내무국장 崔錫敏, 탁지부 사세국장 李建榮, 기타 유길준의 동생이자 내부 경찰국장이었던 兪星濬 등이 참여하였고 일본인 가메야마(龜山理平太) 警視와 시오카와 이치타로(鹽川一太郞) 통역관이 촉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8월 중순에 기본적인 조사작업을 종결하고 그 조사·정리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행정제도와 관련하여 행정구역의 개편, 지방자치의 실시, 군수 적임자 선발과 이서층의 정리, 지방세제의 실시 등이 건의되어 있었다.

近日郡守之貪虐은 多半 鄕人이 爲之嚆矢也라 地方情弊가 旣如此則 郡守만 選擇할 뿐 아니라 鄕長을 尤可注意니 鄕弊를 欲矯면 郡守의 賣任을 痛禁하고 鄕長을 欲擇이면 人民의 選擧를 可許니 地方事務는 專在於鄕長之得人如何耳라 鄕長을 得人 然後에 鄕約規程과 鄕會條規를 如何擧辨 而人民自治之權이 將於是乎生矣리니(≪地方制度調査≫, 국립중앙도서관, 한-31-62).

 지방제도조사소의 건의내용은 전체적으로 이전의 자치제도를 그대로 살리되 특히 향장 등 자치기구의 장을 잘 선택하여 그간의 폐해를 막는 데 주안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1906년 9월 이후의 지방자치정책에서는 이러한 조선인 조사위원들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일제는 메이지유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지방통치에 관한 구상을 행정지배를 통한 지방사회의 직접적 장악이라는 차원에서 설정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태에서 조선인 위원들의 청의는 받아들여 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가 선택하였던 제도는 향장제를 폐지하고 郡主事를 설치하는 한편 향회를 해체하고 이에 대신하여 지방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기존의 자치제도를 전면적으로 폐기하는 것이었다.913)이상찬, 앞의 글(1986). 1906년 9월<地方官官制>가 발포되면서 이전에 존재했던 향장의 직이 없어지고 이에 대신하여 군주사가 설치되었다.914)≪법령자료집≫Ⅴ, 칙령 50호<지방관관제>. 언뜻 보아서는 이름만 향장에서 군주사로 바뀐 것 같지만 광무개혁시의 향장이 민선이었던 데에 비해 군주사는 완전한 임명직 행정관료라는 점에서 양자는 확연히 구별된다. 아래<郡主事銘心規則>에서 기존의 좌수나 별감과 같은 자치기구의 장과는 구별되는 군주사의 행동규정을 두고 있는 것도 자치성을 일소하려는 일제의 의도를 잘 말해준다.

郡主事銘心規則

郡主事는 郡守를 補佐하되 持心을 勤愼히 하고 處事를 公平히 하여 政務의 刷新하는 主旨를 認眞實踐할 지며 前日에 座首와 鄕長의 鄙陋한 心法과 行動을 一切 革袪할 事(≪訓令謄錄≫3책, 奎古 4255-10, 훈령 238호).

 일본은 이전의 자치기구를 관제화하려는 경향에 더하여 이제는 군단위 자치기구의 역할을 급속히 약화시키고 대신 군주사와 같은 행정직원을 배치함으로써 집권적 지배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던 것이다. 초기에는 향장에 이어 군주사에 儒鄕층이 오르기도 하였으나 점차 향회 추천 등의 과정없이 통감부가 일방적으로 임면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어 갔다. 1908년부터는 타도나 타군 출신의 군주사가 임용되기 시작하였고 1909년부터는 일본인이 군주사로 임용되기 시작함으로써 일제는 자치기구를 무력화하고 행정지배를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해 갔다.

 일제는 이렇게 기존의 자치기구를 제도적으로 무력화한 이후 이에 대신하여 새로운 지방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1907년 5월 13일 일본인 재무관과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 재정고문이 초안한<地方委員會規則>이 공포되고 11월까지 각 지역에 지방위원회가 구성됨으로써 기존의 자치기구는 제도적으로 완전히 부정되게 된다.915)이상찬, 앞의 글(1986). 일제는 ‘自治制의 創始·母體·前身’, ‘文明國의 代議機關’ 등의 미사여구를 쓰면서 지방위원회를 발전된 자치기구의 형태인 것처럼 선전하였다.916)≪財務彙報≫13·15호(1907).

 그러나, 조선에 필요한 것은 재무에 관한 사항이므로 따라서 위원회는 탁지부에 소속해야한다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는 지방위원회를 기존의 자치기구를 폐지하는 수단으로 삼았고 궁극의 목적을 징세기구의 장악에 두고 있었다. 실제로 중앙의 훈령에 따라 일본인 재무관리와 한국인 세무관이 각 군을 순회하면서 각지에서 ‘신용·자산·지식’을 가진 자를 선발하였고, 이로써 일제의 지방지배를 매개할 친일적 인사들이 지방위원회를 채우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지방위원회를 새로이 조직하는 한편 기존의 자치기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파괴 정책을 구사하였다. 장성·임실·한산·고령 등지의 자치기구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던 것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한편 같은 해 10월에는<租稅徵收規程>에 징세기구로서 면장을 규정함으로써 면단위에 면장을 두는 면장제를 법제화하였다. 면장제는 이전의 집강을 면장으로 바꾸고 면장에게 징세의 업무를 담당케하는 제도로서 기존의 면단위 자치기구를 보다 명확한 하급행정조직으로 만들려는 조치였다. 세무서에서 지세·호세의 총액을 면장에게 부과하면 면장은 면내 다액납세자로 구성된 5명의 임원과 함께 최종 납부액을 결정하여 납세자에게 납입고지서를 발부하고 그에 의해 公田領收員이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존의 면단위 자치기구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면장-공전영수원으로 이어지는 징세기구의 하부조직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의 운영에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자치기구로서의 성격을 상실한 상태에서 행정실무의 역할만을 담당하는 면장에 지방사회의 유력자들이 취임하기를 꺼려하였고 따라서 전반적으로 면장의 질적인 저급성이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다. 일제가 기존의 자치기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면장제도를 실시하기는 하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면단위 지역 운영의 이원화를 초래하였다. 실제로 각 면에서는 일제에 의해 임명된 면장과는 달리 지역 유력자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운영의 관행이 강하게 존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제는 면장제의 개선을 위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러 논의의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面長職制勅令案>을 제출하였다. 1909년 2월에 제출된 이 안은 면장을 판임관대우로 한다는 내용을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었다. 면장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그 대우를 판임관으로 하는 대신 급료를 국고에서가 아니라 면민이 부담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면단위 자치기구를 무력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조선인의 반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면장의 대우를 개선하고 면장에 유력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고육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제가 근원적으로 조선에서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고 극단적인 집권적 지배만을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통감부의 정책방향은 식민지지배 전기간동안 계속되었고 이를 둘러싼 조선인과 일제와의 대립 길항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 설치 직후에 공포된<面에 關한 規定>과 1917년의<面制>는 이러한 정책방향을 구체적인 제도로 확립시켜 가는 과정이었다.917)김익한,<1910년대 일제의 지방지배 정책>(≪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50, 1996).

 조선후기·한말의 지방자치를 둘러싼 동향은 아래로부터의 자치성장을 일정부분 중앙정부가 수용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지방자치의 발전을 동반하는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갑오개혁·광무개혁기의 지방자치는 중앙정부의 집권화 정책과 자치성의 확대 움직임이 서로 길항하면서 어느 정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여는 지방자치와 집권적 행정체계 형성간의 균형을 깨는 역할을 하였고 결국 군·면·동리단위의 자치기구는 일제에 의해 제도적으로 부정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지방자치의 측면에서 볼 때 일제의 조선강점은 지배정당성을 결여한 이민족 지배였을 뿐 아니라 조선사회의 아래로부터의 근대화를 근원에서 차단하고 기형적인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강요하는 과정이었다.

<金翼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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