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5. 의·식·주생활의 변화
  • 2) 음식
  • (3) 외국 음식문화의 전래

가. 서양 음식의 전래

 우리 나라 사람이 서양 음식을 처음으로 접한 경우는, 1800년대 후반 제물포 앞 바다에 온 영국인 홀이 군함에 한국인을 불러 유럽 음식과 포도주를 대접할 때였다. 소통은 중국어와 한자로 하였다고 한다.

 그 후<강화도조약>(1876) 체결 후 일본에 수신사로 간 金綺秀는 그곳에서 서양요리를 먹었다고 한다. 1883년 閔泳翊이 미국파견 전권대사로 처음으로 파견되었을 때 수행한 兪吉濬·尹致昊 등은 물론 미국에서 서양요리를 먹었을 것이다.974)이성우, 위의 책, 228쪽. 오페르트의≪朝鮮紀行≫을 보면 그는 배에 찾아온 조선 사람에게 양식을 대접했으며,975)에른스트 오페르트, 앞의 책, 102쪽. 그 이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양식을 대접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양식을 처음 대하는 조선 사람들이 나이프와 포오크를 익숙하게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였고, 그들이 가져온 통조림이나 식료품을 주었다고 하였다. 1894년 영국 신문에는 빵을 처음 먹어 보는 조선 아이들의 삽화와 한강 빙판 위에서 영국 손님이 조선인에게 서양식 조반으로 빵과 버터를 권하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유길준은≪西遊見聞≫(1895)에서 서양인들이 빵과 우유, 버터, 각종 육류, 그리고 주스나 커피 등을 먹는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976)유길준 著, 채훈 역,≪서유견문≫(양우당, 1988), 268쪽.

 한말 정국이 어지러울 때 고종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특히 독살을 두려워하였다. 이때에 당시 러시아공사 베베르(Karl I. Waeber)의 부인이 음식을 손수 만들어 이중 철제 궤속에 넣고 자물쇠로 채워서 궁중에 매일 배달하여 드시도록 하였다고 하며, 그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관에 머물 때 베베르공사의 처형인 孫鐸(Antoinette Sontag)이 서양 과자와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 대접하였으므로 고종을 비롯하여 궁중에서는 서양식에 점차 익숙해졌다. 손탁호텔에서는 양식을 만들어 상류층에 보급하였고, 외교관과 고관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었다.977)이성우, 앞의 책, 228쪽.

 1887년에 궁중에 초대받은 비솝(I. B. Bishop)여사는 서양식으로 스프를 포함해서 생선, 퀘일, 들오리 요리와 꿩요리, 속을 채워 만든 쇠고기 요리, 야채·크림·설탕에 버무린 호두, 과일 적포도주와 커피 등을 먹었다고 하였다.978)이사벨라 버드 비숍, 앞의 책, 294쪽. 1900년에 독일의 신문기자인 지그드리프 겐테(Sigfried Genthe)는 “황실에서는 밤마다 연회가 끊일 날이 없었으며, 화려하게 장식된 식탁에 최고급 유럽식으로 완벽한 음식이 차려졌으며, ‘트뤼플’과 프랑스산 ‘샴페인’이 나왔다고 하였다”고 하였다.979)김영자, 앞의 책, 299쪽.

 궁중에서는 서양식 책임자로 영국 유학생이었던 윤기익을 임명하여 서양식에 필요한 집기와 요리책을 사들이고, 프랑스에서 일류 요리사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당시 러시아말 통역관이었던 金鴻陸은 시베리아지방에서 유랑하던 金鐘浩를 서양요리 熟手로 불러들여 서양 음식을 만들어 바치곤 했다고 한다. 고종과 순종은 특히 생선 프라이를 즐기셨다고 한다.980)김명길,≪낙선재주변≫(중앙일보사, 1977), 31쪽.

 1910년 고종 탄일 경축연에 서양식 양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음식은 전부 양식으로 준비하였으며 손님들의 포오크와 나이프 소리가 요란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한말 궁중에서는 서양 음식으로 연회를 치를 정도로 서양요리의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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