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5. 의·식·주생활의 변화
  • 3) 주거
  • (1) 갑오개혁과 주거문화의 변화

(1) 갑오개혁과 주거문화의 변화

 1894년의 갑오개혁은 관리등용에 있어서 반상구별의 철폐, 문무존비의 철폐, 공사노비의 혁파, 천민계층의 면천 등 중세적 양반체제의 신분질서가 해체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적 사회체제의 동요는 이미 18세기 이후부터 시작되었으며, 갑오개혁은 그 동요의 공식적 종결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왕권과 지배질서의 약화를 배경으로 소농경제의 성장과 부농·부상층의 대두, 양반호구의 격증과 상민호구의 격감, 노비호구의 실질적 소멸987)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한국사특강≫(서울대 출판부, 1991), 203쪽.은 이미 봉건적 신분질서가 해체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대 양반호(구) 상민호(구) 노비호(구)
1729
1765
1804
1867
26.29(19.39)
40.98(32.11)
53.47(43.67)
65.48(67.07)
59.78(49.57)
57.01(50.83)
45.61(33.88)
33.96(18.27)
13.93(31.04)
2.01(17.06)
0.92(22.45)
0.56(14.66)
100(100)
100(100)
100(100)
100(100)

<표 1>울산지역 시기별·신분별 호구 비율표 (단위:%)

*정석종,≪조선후기 사회변동연구≫(일조각, 1983), 249∼250쪽.

 이 과정에서 중세적 신분체제를 배경으로 하는 주거문화 또한 서서히 변질되어 갔음은 당연한 일이다. 우선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와 형태를 제한하던 家舍規制가 점차 그 구속력을 상실해 감을 볼 수 있다. 태조 4년(1395)부터 시작된 조선시대의 가사규제는 수 차례의 개정을 거쳐 성종 9년(1478) 완성에 이른다.≪朝鮮王朝實錄≫에는 가사규제의 위반사례가 자주 등장하며 그때마다 강력하고 세부적인 개정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말부터는 이와 관련한 기사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더 이상 개정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에 가사규제가 그 효력을 상실하여 유명무실해 진 것을 반영한다고 해석되어 왔다.988)이호열,≪조선전기 주택사 연구≫(영남대 박사학위논문, 1991), 121∼122쪽. 여하튼 갑오개혁은 신분차별의 철폐와 함께 가사규제의 공식적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사규제의 폐지는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경제력에 따라 자유롭게 주택을 조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게 되었다. 특히 농민층에서 경제력을 축적한 부농이나 부상들은 과거 고급관료계층에서나 할 수 있었던 주택의 규모와 형상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과거 권위건축의 요소들이 폭넓게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방의 부농·지주들은 규모의 제한없이 엄청난 규모의 주택을 만들었고, 필요 이상으로 큰 사랑채나 루마루를 건립하였다. 長臺石 基壇이나 包作, 두리기둥과 굴도리, 附椽 등 私家에서 사용되기 어려웠던 건축요소들이 경제력만 있으면 흔히 사용될 수 있었다.989)이러한 요소들은 일제시기 집장사들이 건립한 도시형 한옥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이러한 요소들은 고급주택임을 표현하기 위한 권위적 요소의 모방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 사대부의 생활문화가 배경이 되었던 주거규범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농민출신의 부농들에게는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주거설비와 공간에 더욱 치중하였다. 이에 그들의 주택은 평면이나 배치형식상으로 그 지역의 중농·자영농 계층의 모습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들은 사대부가의 생활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 격식과 규범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생활의 편의성을 추구하였다.

 함양의 허삼둘 가옥은 이러한 실용주의적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옥은 상량문에 의하면 1918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옥의 살림채는 과거 경남지방의 상류계층 주택에서 보기 드문 ㄱ자형 건물로서 부엌이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부엌도 사각형이 아닌 모서리를 죽인 마름모꼴의 형상이며, 양쪽 툇마루도 부엌부분에서 넓어져 마름모꼴의 형상을 갖추었다. 중앙의 부엌에서 양쪽 날개부분으로 난방을 할 수 있다는 장점, 양날개에서 부엌으로의 접근성을 증진시키고, 사각형의 규범적 형태에서 벗어나 면적에 따라 자유로운 형상을 만들었다는 점 등은 실용적 이유로 형태의 규범을 과감하게 벗어난 사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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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허삼둘 가옥의 살림채 평면
<그림 1>허삼둘 가옥의 살림채 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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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화의 경향도 보여진다. 과거 사대부가의 주택이 우람한 구조체와 엄격한 규범으로서 권위를 표현하고, 절제와 검약의 선비정신을 표출하는 데 비해 이 시기의 상류주택들은 섬세한 공예적 장식으로 경제력과 계층성을 표현하려 했다. 구조부재들은 보다 가늘고 유약해지고, 창호면적은 보다 넓어지면서 내부공간이 밝고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다양하고 섬세한 살무늬의 창호들이 많이 사용되며, 문에는 갖가지 무늬의 쇠장석들이 흔히 사용되었다. 이러한 장식성의 추구는 小木공예와 금속공예의 발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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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청도 운강 고택의 쇠장석
<그림 2>청도 운강 고택의 쇠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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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부가의 주택이라고 하더라도 노비제의 해체에 따라 솔거노비들의 거처였던 행랑채가 약화되고, 수장공간과 대문간을 갖는 대문채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행랑채와 살림채 사이를 遮蔽시키는 장치들도 비교적 허술해져 간다. 살림채 영역에 수장공간이나 작업공간이 들어서서 영역의 규모가 커지고, 개방화되는 것도 경영형부농으로 전이해가는 사회적 변화에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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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대정리 신씨 고가의 포작
<그림 3>대정리 신씨 고가의 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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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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