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5. 의·식·주생활의 변화
  • 3) 주거
  • (2) 개항과 서구 건축양식의 유입

(2) 개항과 서구 건축양식의 유입

 조선의 내부에서 사회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서양의 열강들과 일본은 군대를 앞세워 개항을 요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 국가들과 강제적인 국교를 맺기에 이르렀다. 개항이라는 사건은 외국의 여러 문물이 직접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에 따라 일본과 서구에서 발달한 건축문화도 들어오게 되었다. 외국인들은 자국의 외교활동을 위하여 공관이 필요하였고, 새로운 숙박시설인 호텔도 도입되었다. 근대적 교육제도의 도입에 따른 교육시설이나 기독교의 전파에 따른 종교시설 등이 새로이 요구됨으로써 이와 관련된 건축문화가 외국인들을 통하여 직접 유입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부산의 일본 관리관청(1879)을 비롯한 각국의 영사관과 공사관들이 그들의 건축양식대로 지어져 이 땅에 소개되었고, 인천 대불호텔(1885)을 비롯한 상업 건축들과 배재학당(1886)을 비롯한 학교 건축들, 명동 천주교 주교관(1886)을 시작으로 한 종교 건축물들, 또한 서울 전환국(1886)과 같은 새로운 기능의 관청 등이 외국인들의 손이나 감독으로 지어져 그들의 건축방법을 보여주게 되었다.

 한편 주택으로도 새로운 양식들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세창양행 사택(1884)은 회사의 사택으로서 독일인들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최초의 양옥이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사무실·응접실·침실·부엌·식당·오락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외벽에는 회칠을 하고 붉은 기와지붕과 아케이드(arcade:기둥 위에 홍예를 만들어 연속적으로 붙인 시설)를 갖춘 일부 2층의 벽돌건물로서 중국인 大木이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후 기와지붕에 작은 돔(dome:반구형 지붕)을 곁들인 미국공사 알렌(H. N. Allen)의 별장(1890)이 지어졌고, 인천 북성동에는 석조기와의 4층집으로 제임스 존스턴(James Jonston) 별장(1905)이 건립되었다.

건 물 명 시기 자 본 설계 및 시공 재료 및 구조 형 식
일본인 거류지   일본 일본인 2층 목조 일본식
세창양행 사택 1884 독일 중국인 대목 2층 벽돌조 별장풍
제임스 존스턴
별장
1905 영국 독일+중국인 4층 석조기와 유럽식 절충주의
요임관사 1906 일본 일본 목조모사 양옥
안국동교회
목사관
1911 한국+미국 미국+한국+중국인 2층 벽돌조 牔栱 한옥
이준씨댁 1911 일본 일본인 석조혼용 2층 벽돌조 프렌치 르네상스

<표 2>개항기에 건립된 외래주택

*김홍식,≪민족건축론≫(한길사, 1987), 284쪽에서 발췌.

 서구인들은 외교관이나 종교인·상업인 등 소수의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들어왔지만 일본인들은 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적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주자의 양과 팽창속도에 관한 한 다른 외국거주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주일본인은 부산·인천·서울 등 주로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함으로써 도시에 있어서 일본인들의 비율은 급속하게 상승하게 되었다.990)이현종,≪한국개항장연구≫(일조각, 1980), 175쪽.

 이러한 일본인들의 대량 집단이주는 병자수호조약의 결과 일본조계가 설치되어 토지의 점유와 사용이 자유로워진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부산의 경우 1877년 11만 평의 토지가 일본인 소유나 다름이 없게 된다. 이에 1900년에는 1,000여 호에 6,000여 명에 이르는 일본인이 거주하게 되고, 1909년에는 4,284호에 21,697명으로 급증하여 10년만에 3배가 넘는 증가율을 보여주었다.991)윤일주,≪한국양식건축80년사≫(치정문화사, 1965).

 이러한 일본인 이주자의 격증과 함께 이들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실권을 장악해 나감으로써 자유롭게 자신의 주거문화를 유입시킬 수 있었다. 초기에는 인구도 적고 교통수단이 불편하여 자재운반이 어려웠기 때문에 조선주택이나 일본인 목수들이 지은 목조서양관에 거주하였으나 이주자가 급증하면서 일본식 가옥이 대량으로 광범위하게 지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항장에서는 왜식주택의 창궐로 마치 일본의 소도시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992)문홍길,<개화기이후 한국 전래주거건축의 변천에 관한 연구>(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2), 55쪽.

 일본인 거류지에 건설된 일본인 주택들은 당연히 일본인의 자본으로 일본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대부분은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었기 때문에 주택과 상업을 겸한 주상복합건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러한 주상복합의 유형은 보통 2층 건물로서, 1층은 상점, 2층은 주거로 구성된다. 전면폭이 좁고 길이가 긴 택지 위에 계획된 것으로서, 이미 일본의 중세시기부터 ‘町家’라는 이름으로 일본식 도시주택의 유형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생소한 외래 주거형식이 아무런 여과나 수정없이 집단적으로 건립되었고, 이는 도시의 경관을 이국적으로 바뀌게 하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택으로는 한국적 풍토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나타난다. 온난하고 습기가 많은 풍토에서 발달한 다다미와 개방적 성격의 일본식 주택이 한국의 추운 겨울에 적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온돌방을 찾는 일본인들이 많아졌는데,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적응치 못하고 자기의 관습을 유지하나 차차 조선식 온돌 난방장치와 벽을 두껍게 하고 창호의 면적을 비교적 작게 하는 것 등을 모방하여 재래의 일본식 주택과는 매우 차이가 있는 主家양상으로 변하게 되었다.993)최순애,<박길용선생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연구>(홍익대 석사학위논문), 96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유입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국건축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의 필요에 의하여, 그들의 자본으로, 그들의 건축양식을, 그들의 재료와 기술로 설계되고 건설된 것이었다. 즉, 유입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자체의 필요나 의지에 의해서 유입되었거나 우리의 기술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개항과 더불어 거의 강제적으로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외국의 문물이 우리 실정에 맞는지 또는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를 검토해 보거나 비판할 겨를도 없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게다가 개항이후 일제에 의한 식민지 시기를 맞게 되어, 일본인들에 의해 외래문화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 주거문화를 수용하거나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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