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5. 의·식·주생활의 변화
  • 3) 주거
  • (3) 외래건축문화의 영향

(3) 외래건축문화의 영향

 개항을 통하여 외래문물의 자극이 심화되면서, 전래 주택의 단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개량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개화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피력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생각들은 치도론과 설비론, 위생론, 공간이용론, 근대기술교육론 등으로 요약된다.994)김홍식,≪민중건축론≫(한길사, 1987), 237∼239쪽. 치도론은 길을 닦자는 주장과 함께 하수도를 정비하자는 주장이며, 설비론은 주택의 설비를 근대화하자는 뜻에서 상하수설비·뒷간·목욕시설·난방시설 등을 개량하자는 주장이었다. 위생론은 채광과 환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개방적 창호를 만들자는 주장이며, 공간이용론은 다층 건물의 경제성과 공간의 기능별 세분화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한편, 근대적 기술교육의 필요성이 주장됨으로써 1899년 우리 나라의 첫 상공학교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서구의 문물을 그대로 수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래적인 주거양식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기능적·위생적 문제들을 서구 도시나 주택으로부터 대안을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접근방법은 조선후기 실학파의 맥락을 이었다고 평가된다. 다만 이들의 주장은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현실화되기 어려웠다.

 이 땅에 건설된 외래건축들도 그 주체와 자본·기술 등이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 설계와 시공의 과정에서 조선인 참여의 기회가 애초부터 배제되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외국건축의 기술적 방법들이 전수되기 어려웠고, 조선기술자들은 서구건축에 무관심한 채 전래되어 오는 건축방법을 지속하게 되었다. 다만 조선후기부터 지방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전파된 카톨릭 신자들이 한옥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한 경험이 있었고, 개항이후 전교가 자유화됨으로써 카톨릭 교회의 건설은 토착기술자들의 과제가 되었다. 이들은 다중의 예배를 위하여 바실리카(basilica)식 평면을 사용하면서도 그 형태는 목구조의 한식기와지붕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옥의 뼈대로 세우는 한·양절충식의 한옥성당이 이렇게 태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주거의 경우 민중들의 주생활이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지도 않았고, 새로운 건축양식을 시도할만한 경제적 여유가 생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서구건축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다만 이에 자극을 받은 일부계층에서는 그들의 건축을 그대로 수용하여 양식주택을 만들거나 기존의 전통주택을 서양식으로 개조하는 사례를 보여주게 되었다.

 예를 들어 1882년에 개조된 閔謙鎬의 집은 카페트와 커튼·서양가구 등으로 실내를 꾸몄으며, 문턱을 낮추고 들창은 열창으로 고쳤으며, 앞마당에는 정원과 정구장을 만들고, 행랑채에는 사무실과 서재를 양식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한편 1910년대에 지어진 李埈씨 주택이나 尹德榮씨 별장은 외국 건축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는데, 이준씨 주택은 석재를 혼용한 벽돌 2층의 프랑스 르네상스(Renaissance)식 건물로서 일본인에 의해 설계와 시공이 이루어지고, 재료 일체도 일본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일부 귀족·부호계층의 사대주의적 취향이었을 뿐 전반적인 주거문화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중들은 가사제한의 범주로부터 자유롭기는 하였으나 전래되어 오는 건축방법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거 상류계층의 고급 건축요소들이 민중에까지 전파되면서, 기단에 다듬은 돌을 사용한다든지, 굴도리를 사용한다든지, 花盤이나 小爐·翼工을 설치한다든지, 부연을 덧달아 처마를 깊게 내미는 기와지붕을 사용하는 등 보다 권위적·장식적 요소들이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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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개조된 한옥(경운동 민씨댁)
<그림 4>개조된 한옥(경운동 민씨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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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도입된 건축재료 즉, 벽돌·유리·시멘트·철 등도 다량으로 공급되었지만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을뿐 구조나 평면을 바꾸지는 않았다. 벽돌의 경우 마루밑 고막이나 굴뚝 정도에 사용되었고, 유리 또한 대청이나 툇마루에 미서기문을 다는 데 이용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지속성은 1930년대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였던 박길용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인들이 사는 살림집의 현상을 볼 때 생활과 주거가 부조화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 1920∼30년간 조선인의 생활문화는 다른 문화의 자극을 받고서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활용기인 주양식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박길용,<조선과 건축>,≪조선주택잡감≫, 1941).

 즉, 외국문물의 유입은 민중생활상의 필요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민중들의 주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주거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는 볼 수 없다. 관청이나 근대적 교육제도에 의한 학교건축, 기독교의 전파에 따른 종교건축, 자본주의 도입에 따른 상업건축 등과 같이 새로이 발생한 기능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건축양식이 유입되었을 뿐, 주택과 같이 주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건축은 생활상의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전래되어 오던 건축방식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姜榮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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