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1. 근대 교육의 성립
  • 1) 근대 교육 성립의 역사적 배경
  • (3) 선교사의 교육활동과 교육평등의식 계몽

(3) 선교사의 교육활동과 교육평등의식 계몽

 조선사회가 근대 서구의 신학문과 신교육을 수용하고 한국 근대 교육이 성립, 발전되는 과정에는 천주교와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공헌이 또한 지대하였다.

 조선에 제일 먼저 입국한 서양선교사들은 천주교 신부들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천주교 신부들은 한국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한국인 신도들을 마카오 등지에 유학시키거나 국내에 신학교를 비밀리에 설립하고 라틴어와 신학을 교수하기도 하였다.020)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崔奭祐 譯註(≪韓國天主敎會史≫中, 분도출판사, 1980), 269·341·384쪽. 천주교는 조선왕조의 척사정책에 의해 심한 탄압을 받으며, 비밀리에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중심으로 성서를 읽히기 위해 신도들에게 글을 가르침으로써 천대받고 있던 민중을 일깨우고 있었다.021)李忠浩,<舊韓末 天主敎會의 敎育活動>(≪歷史敎育論集≫4, 1983), 63쪽.

 이들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은 조선의 척사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 점차 학교교육체계로 이행되어 갔다.022)천주교계통의 초등학교가 1893년에 京畿道 華城郡 峰潭面 旺林里에, 1895년에는 江原道 橫城郡 書院面 六里에 세워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韓國天主敎中央協議會,≪韓國天主敎年鑑≫, 1956, 233∼249쪽).

 천주교가 개항 이전부터 선교자체에 역점을 두고 조선사회에 침투하여 비밀리에 敎役者 양성과 신도교육을 도모했던 것과는 달리 개신교는 1880년대 중반 선교활동에 앞서 교육과 의료활동을 내세워 선교기반을 구축하여 갔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1882년의 조미수호조약체결과 보빙사 민영익의 1883년 미국방문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민영익을 만났던 가우쳐(John. F. Goucher)의 권고에 따라 일본에서 선교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ay)는 1884년 여름 조선에 입국하여 김옥균의 도움으로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의 윤허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매클레이의 보고가 선교본부에 전달되자 이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 N. Allen), 언더우드(H. G. Underwood),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스크랜턴(M. F. Scranton)부인 등이 선교활동을 위하여 조선에 입국하였다. 이들은 조선정부가 척사정책을 취하여 직접적인 기독교의 선교활동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의료활동과 교육사업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알렌은 미국공사관 의관의 직책으로 조선에 체류하는 가운데 갑신정변에서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함으로써 신임을 얻어낸 뒤 1885년 4월 광혜원을 설립하고 의료활동을 전개하다가 1886년 3월에 이르러 16명의 학생을 뽑아 의학실습교육을 실시하였다. 아펜젤러는 1885년 여름부터 두 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1886년 6월 고종의 도움으로 培材學堂을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한편 집으로 찾아오는 소년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1886년 5월 고아원을 세워 교육사업을 병행하였다(→경신학교). 한편 1885년 6월 입국한 스크랜턴 부인은 1886년 5월 한 부인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여자교육기관인 梨花學堂을 창설하였다. 이들 선교계 학교의 등장은 조선의 개화정책과 미국 기독교계의 선교정책의 화합물이었다.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조선인들은 그 정치적 입장에 따라 대응을 달리하였다. 변법개화파였던 김옥균·박영효 등은 기독교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서구의 신문물을 수용함으로써 국민을 일깨워 부강한 근대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교육과 의료사업을 전개하고 기독교를 선교하려는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협력하였다023)孫仁銖, 앞의 글.

 그러나 이들은 甲申政變으로 실각하였고 선교사들의 조선내 활동에 크게 기여할 수는 없었다. 선교사들은 보다 개방적인 변법개화파들이 실각하고 기독교의 선교에 대하여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동도서기주의적·양무론적 개화파들이 정부를 주도하는 가운데 조선에 입국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초기 2, 3년 동안 선교활동을 삼간 채 의료활동과 교육만을 내세워 활동을 개시하였다.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은 고종과 민비의 적극적인 배려로 정착되었다. 고종과 민비는 선교사들이 소수의 학생들을 상대로 교육을 시작하자 교명을 지어주고 하사금을 주어 격려하였다. 그것은 서구문물을 하루 빨리 수용하여 부강한 국가를 이룩하고자 하는 의욕의 표출이었다. 서구의 새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어를 아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되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 이들 선교사들을 찾게 되었고 선교사들은 이들을 상대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어떻게든지 교육사업을 통해 조선에 활동기반을 구축하려고 했던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평등사상으로 신분과 문지에 관계없이 학생들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배재학당에는 자연히 신분이나 문지가 미약하여 육영공원 등에 입학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찾아들었다고 생각된다. 배재학당과 더불어 여자교육기관인 이화학당, 불행한 처지의 고아와 소년들을 상대로 교육을 시작한 고아원학교(뒤의 경신학교)는 교육을 통해 신분평등과 남녀평등 사상을 전파하고, 민중의 신교육에 대한 열망과 평등의식, 민권의식을 싹트게 하는 기지가 되었다.024)培材學堂,≪培材八十年史≫(1965).
梨花女子高等學校,≪梨花九十年史≫(1975).
경신중·고등학교,≪경신사≫(1991).

 그러나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이 순탄하게 이루진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내의 수구세력은 기독교사상의 유입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의 고아원과 학교운영을 방해하였다.025)The Foreign Missionary, Vol. 451, No. 5, p 224(1886. 10). 또한 청나라 역시 미국세력의 진출을 견제하고자 이를 부추김으로써 한때 미국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은 위기에 처하였다.026)The Korean Repository, Vol. III. No. 1, 1896, 1, p. 6. 또한 조선정부의 척사정책과 민간인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상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선교사들이 은연중 선교활동을 함으로써 反宣敎師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서양의 ‘器’만을 수용하려고 했던 조선정부는 선교사들의 지방에 대한 선교활동을 파악하고 1888년 4월 미국 공사에게 정부가 승인한 자 이외의 학당설립을 금하도록 요청하였다.027)≪舊韓國外交文書≫10권, 美案 1, 耶蘇敎傳道禁止의 件(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353쪽. 이 요청을 받은 딘스모어(Dinsmore)공사는 평안도지방을 순회 전도 중이던 언더우드를 소환하여 이러한 금령이 내려진 원인은 “당신들의 경거망동한 순회전도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차후 이러한 사태가 재현될 경우 기독교 선교가 아주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028)L. 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 New York Fleming H. Revell, 1918, p. 70. 이에 선교사들은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나 조선사회가 동요를 일으킴으로써 선교기회가 확장되어 간 1894년경까지 선교활동을 자제하면서 기왕에 설립한 광혜원·배재학당·이화학당·경신학교를 중심으로 의료와 교육활동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결국 이들 개신교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은 1890년대 이후 한국근대 교육의 성립과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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