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2. 근대 교육의 발전
  • 2) 근대 학교의 설립
  • 다. 개항장 상인 및 유지 신사들의 사립학교 설립

다. 개항장 상인 및 유지 신사들의 사립학교 설립

 문호개방과 대외통상의 확대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무엇보다 상인세력이었다. 이들 상인세력이 외세와 주로 부딪히는 곳은 자연히 開放地·開市場·雜居地·開港場 등으로 일컬어지는 통칭 개항장이었다. 개항장은 외국선박이 도착하고 외국상품이 들어오고 외국어와 외국의 풍속과 복장이 혼효를 일으키고 고유의 것이 도전을 받는 곳이었다. 이 곳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설정되고 치외법권이 인정되어 부분적으로는 외국의 식민지화된 곳이었다.104)李鉉淙, 앞의 글, 18∼26쪽.

 문호개방 이후 인천·부산·원산 등 개항장에는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해 온 객주·여각들을 비롯해 대소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자연히 외국상인들과 접촉하며 무역활동을 전개하였다. 개항 초기 외국상인들은 전관거류지에서 10리를 넘는 지역에서는 행상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상거래는 개항장에 한정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언어도 불통했고 내륙의 상거래 관습에도 익숙하지 못하였으므로 부득이 개항장의 객주와 여각·거간·통역 등을 통해 상품을 판매하고 물화를 수집할 수밖에 없었다.105)趙璣濬,<開港場의 民族商人>(앞의 책), 34∼37쪽.

 그러나 이들 외상들은 治外法權·沿海測量·任自貿易 등 조약·조항들을 내세워 경제침투를 강화하였다. 이들은 이 곳에 점포를 개설하고 은행지점들을 설립하고 상업회의소 등을 조직하여 경제활동을 증대시켰다.106)韓㳓劤,<開港後 外國商人의 浸透>(≪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 一潮閣, 1970), 45∼55쪽. 이에 국내의 私商都賈·객주·여각·상회 등은 통역과 더불어 이들 외국상인과 이해관계에 따라 화응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였다.107)韓㳓劤, 위의 책, 121∼232쪽.

 이 곳 개항장은 능력 여하에 따라서 새로운 富를 획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즉 외국어의 통달, 상업거래와 무역지식, 만국공법과 통상약장 등 법률이해, 물화의 수집능력과 洋貨에 대한 분별력 등이 곧 부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리하여 이 곳에서는 관료·유생·상인 등 재래의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상업에 투신하는 자들이 증가하였다.108)韓㳓劤, 위의 책.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였다.109)≪皇城新聞≫, 광무 7년 12월 15일, 잡보<報請設校>. 그리하여 개항장의 상인과 유지 인사들은 돈을 모아 신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개항장 원산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로 논급되고 있는 원산학사가 1883년에 설립되었고,110)愼鏞廈,<우리나라 最初의 近代學校設立에 대하여>(≪韓國史硏究≫10, 1974). 부산에서는 개성학교(부산상고 전신)가 1895년 설립되었다.111)≪釜商 八十年史≫(부산상업고등학교 80년사편찬위원회, 1975). 인천에는 정부가 1895년 관립 인천외국어학교를 설립하였으나, 광무 4년경에 이르러 유지 인사와 상인들이 인천거류 외국인들의 협조도 얻어 修齊學校(博文學校前身)를 설립하였다.112)≪皇城新聞≫, 광무 4년 9월 15일, 잡보<仁港創校>.
≪皇城新聞≫, 광무 4년 10월 6일, 잡보<改稱博文>.
러시아와의 통상장정이 체결되어 개방된 경흥부에도 사립 俄語學校가 설립되었고,113)≪皇城新聞≫, 광무 5년 3월 19일, 잡보<報得其當>. 鏡城에도 사립 咸一學校가 설립되었다.114)조기준, 앞의 책, 373∼375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