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3. 근대 교육의 확대
  • 1) 통감부의 교육 침략
  • (2) 동화정책의 방법으로서의 보통학교 확장

(2) 동화정책의 방법으로서의 보통학교 확장

 일반적으로 열강의 식민지정책의 유형을 보면, 영국이 원주민의 반항을 감소시키고 그 통치의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원주민의 관습·문화·사회조직을 이용하는 간접통치-自治政策-를 택했다면, 프랑스는 ‘同化政策’에 의거하는 직접통치방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프랑스형을 모방하여 직접통치적 동화정책의 원칙을 채용했지만 프랑스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同化’라는 미명 아래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하려 했다는 점이다.147)이에 대해서는 孫仁銖,≪韓國近代敎育史≫(延世大 出版部, 1971), 88∼97쪽 참조. 이는 합병 후 그들의 식민지교육정책에 잘 나타나 있다. 실로 우리 민족의 말살을 위한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은 그 어느 식민주의국가보다 무자비했다.

 우선 이 시기 통감부는 그들 최대의 종국적 施政目標인 동화정책의 한 방법으로 관·공립 보통학교를 확장하였다. 초대통감 이토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이른바 施政改善을 위한 借款의 도입이다. 그는 1906년 3월 500만원(실수금 450만원)을 가져 왔는데 그 사용계획을 보면 학교신축을 위한 수리비로 보통학교에 34만원, 중학교에 16만원, 도합 50만원을 교육시설에 투자했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관·공립 보통학교가 설치되었다.

第1期(1906) 官立9校, 公立 13校

 官立-校洞 齋洞 養賢洞 養士洞 仁峴 水下洞 貞洞 梅洞 安洞

 公立-水原 公州 忠州 光州 全州 晉州 大邱 春川 平壤 寧邊 海州 咸興 鏡城

第2期(1907) 公立 27校

 開城 仁川 安城 淸州 江景 洪州 南原 群山 木浦 羅州 濟州 慶州 尙州 東萊

 馬山 蔚山 黃州 鎭南浦 定州 義州 安州 原州 江陵 元山 北靑 城津 會寧

第3期(1908) 公立 9校

 靈岩 古阜 鎭南(慶南) 密陽 溫陽 宣川 驪州 江華 間島

(小田省吾,≪朝鮮敎育制度史≫, 朝鮮史學會, 1923, 71∼72쪽).

 이 같이 1906년에 22개 보통학교가, 이듬해에는 27교, 1909년까지 도합 60개 학교가 신설되었으며, 학생 총수는 11,237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렇게 통감부가 관·공립 보통학교를 확장한 것은 우리에 대한 민심수습책과 아울러 점진적인 동화정책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즉 한국의 아동들로 하여금 그들의 식민지정책에 무조건 복종하는 인간상을 형성하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학부는 이 때 관·공립 보통학교에 대해 수업료를 징수하지 않고 교과서를 비롯한 학용품까지 무료로 지급하였으나 학생 모집에 적지 않은 곤란을 겪었다. 그 이유는 일본인이 동화정책으로 세운 관·공립학교에 대한 불신에 있었다. 특히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는 자제를 공립학교보다 도리어 설비가 불비하며 수업료를 징수하는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148)學部,≪韓國敎育≫, 11쪽.

 이상 언급한 각급 학교의 교육정책을 그들의 본국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 본국에서는 1872년 이미 의무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전국적으로 53,760개의 소학교, 256개의 중학교, 8개의 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5년뒤인 1877년에는 취학율이 남자 53.5%, 여자 22.5%에 달했으며, 이 해에 東京大學은 法·文·理·醫學部를 갖춘 종합대학으로 출발했다.149)金龍德,≪韓國史의 探究≫(乙酉文化社, 1971), 169∼170쪽. 그러니 이것은 통감부의 한인에 대한 교육정책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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