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3. 근대 교육의 확대
  • 2) 민족사학의 발전과 설립 이념
  • (1) 민족사학의 발전

가. 사인 중심의 사학발전

 갑오경장은 안으로부터의 자각과 충분한 기초작업 위에서 다져진 개혁이 아니라 일제로부터의 정치적 종용과 개입에 의하여 이루어진 개혁이기 때문에 알맹이 없는 혁신에 지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는 뒷날 일제의 한국침략의 발판이 되는 길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갑오경장은 근대화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는 하였으나 新學制의 제정도 실제상의 개혁이라기 보다는 제도상의 개혁에 지나지 못하였다. 이는 黃玹의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다.

학부에서는 학교를 세운다고 하였는데 內部에서는 혁파한다고 하여 한가지 公岾에 硃筆로 이리 고치고 흘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현란하게 하고 있으니 …(黃玹,≪梅泉野錄≫권 6,<言事疏>).

 그래서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공립학교보다 더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민간인 사립학교였다.

 민간인사학은 기독교의 직접적인 영향의 학교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대체로 기독교선교에 의한 학교설립이라는 대세와 당시 사회의 요청인 개화열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개화열은 일본에서 유행되고 있던 ‘개화’,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自强’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당시 개화와 자강은 선진 외국기술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케 하고 文明化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개념으로 共用되고 있었던 것 같다.152)李光麟,≪韓國開化史硏究≫(一潮閣, 1969), 23쪽.

 당시 다수의 지식인들은 개화와 자강만이 나라의 힘을 키울 수 있고, 그 힘을 갖기 위해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1897년 8월 29일에 열린 독립협회 주최 제1회 토론회 주제인<조선의 급선무는 교육>이라는 것도 당시 사회의 캐치프레이즈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각적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계몽활동에 힘쓰는 한편 전국 각처에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물론 이 교육운동은 당시의 긴박한 정세하의 강한 정치적 요구와 결부되어 진행되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는 한말에 전개되었던 우리의 민족주의가 자기발생적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통하여 외부의 힘에 자극되어 일어난 非西歐型의 민족주의임을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를 방위하려는 운동이요, 다른 민족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초보적인 교육기관이 생겼고 이를 토대로 중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는데, 당시 사학의 설립이 도시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방 농촌에까지 파고 들어갔음은 주목할 일이다.

 이 때 독립협회와≪독립신문≫은 소학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어느 정도 정착되면 중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해서 국민에게 고등교육을 시킬 것을 구상하였다.153)≪獨立新聞≫, 1898년 7월 6일. 즉≪독립신문≫은 전국 주요도시에 중학교·실업학교·전문학교를 세우고, 그 다음 서울에 대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전문교육을 시키게 되면 ‘신교육’ 실시의 제1차적 사업이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같이≪독립신문≫이 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까닭은 국가의 전반적 개혁을 민권의 신장에 두었으므로 국민이 신지식을 배우고 세계의 사정을 알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朴殷植 역시 사학의 흥학을 더욱 도모하기 위하여 1905년의≪學規新論≫에서 전국의 市邑鄕村에서는 소학교를 설립하도록 하고 出捐을 많이 하는 국민에게는 포상을 주어 이를 권장하면 사립학교의 설립이 급격히 일어날 것이며, 전국의 각 府에서는 중학교를 설립하고, 國都에는 대학교를 설립하여 학교교육의 단계적 체계를 긴급히 확립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154)愼鏞廈,<朴殷植의 敎育救國思想에 대하여>(≪韓國學報≫1, 一志社, 1975), 75∼76쪽.

 당시 대표적 언론기관인≪皇城新聞≫은 국세를 만회하는 길은 학교설립으로 교육을 진흥시켜서 실력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가령 을사조약 체결전의 이 신문논설을 보면,<論法學校成立>(1905. 2. 17)·<國力振興在敎育發達>(上, 下)(1905. 3. 8, 9)·<賀學校之鬱興>(1905. 3. 24)·<愛國由於開明>(1905. 9. 13)·<學部는 廢止언정 學校는 不可廢>(上, 下)(1905. 10. 5, 6) 등이 있다.

 이렇게 교육진흥문제가 압도적으로 많고, 더욱이 을사조약체결 후에는 다음과 같이 증가하여 <謝孫秉熙氏熱心敎育>(1905. 12. 14)·<賀圖書館之設立>(1905. 12. 15)·<對慶北觀察使申泰休氏興學訓令警告全省>(1906. 3. 26)·<對申觀察使興學訓令警告實行>(1906. 3. 27)·<賀大同書館之設立>(1906. 3. 28)·<興學詔勅函宜實行>(1906. 3. 29)·<學部敎科書問題>(上, 下)(1906. 4. 5, 6)·<平安道學校振興事業>(1906. 4. 7)·<警告于學校設立之人>(1906. 5. 23) 등이 있다.

 이처럼 신문의 논조들이 교육진흥문제에 거의 전적으로 경주하였고, 특히 경북관찰사 申泰休(조선일보사장 申錫雨의 부친)가 도내의 학교설립을 위하여 도민에게 훈령한<興學訓令>은 1906년 4월 19일부터 3면 잡보란에 연 5일간 게재되고, 이어서 고종이<興學大詔>를 공포하자(1906. 3. 28) 이를 대서특필하는 등 이 신문이 얼마나 학교의 설립과 발전을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155)趙容萬,<日帝下의 우리 新文化運動>(≪日帝下의 文化運動史≫, 民衆書館, 1970), 11∼12쪽.

 閔永煥은 1895년 興化學校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민영환이 34세에 特命全權公使로 미국·영국·화란·오스트리아·독일을 거쳐 페테르그라드에서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돌아와 외국어와 선진기술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영어와 일어 이외에 측량술을 가르쳤고, 科로는 尋常科·特別科·量地科를 두었다.

 1900년 7월 3일자≪황성신문≫에 의하면 “再昨日 2시에 흥화학교에서 방학식을 집행할 새 심상·특별·양지 三科 學員數 130여 인이라”156)≪皇城新聞≫, 1900년 7월 13일. 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周時經도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1906년 6월에 흥화학교 양지과(측량과)에 입학하여 동년 11월 졸업하였다.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토지 측량이 되어 있지 않아서 測量師가 장차 많이 채용될 것으로 예측하고 측량술을 수학하였던 것이다.

 민영환은 흥화학교 설립뿐 아니라 황실의 군악대를 창설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그는 러시아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후 고종에게 군대와 정치의 근대화를 상주했고 또한 군대의 사기앙양을 위하여 서양식 군악대를 창설할 것을 상주하였다. 그의 이 상주가 실효를 얻어 1899년도 예산안에 軍樂隊費가 반영되었고, 다음해에는 군악대창설을 공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지도자를 물색하던중 일본에서 다년간 음악교사로 일한 바 있고 악대도 지휘한 바 있는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와 교섭하여 그를 영접하였다. 그는 악기의 실기와 음악이론에 정통하여 최초의 정식 음악교육가로 일했다.157)李宥善,<西洋音樂·國樂>(≪韓國現代史≫6, 新丘文化社, 1971), 436∼437쪽.

 민영환이 순국한 후 흥화학교 교장에는 林炳恒, 부교장 겸 총무교사에 白象圭가 취임하였다. 백상규는 일찍이 미국의 브라운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그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경제학을 담당하였다. 흥화학교와 때를 같이하여 乙未義塾(뒤에 樂英義塾)이, 1896년에는 閔泳綺가 中橋義塾을 시작하였다. 1899년에는 安昌浩가 그의 고향 江西지방으로 돌아가 漸進學校를 세웠다. 이는 西道에 민간인이 세운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시에 또한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이기도 하다.

 1901년에는 徐光世 외 수명이 洛淵義塾(뒤에 普光學校)을 창설하여 일어를 가르치고, 잠시 사범과를 두어 교사양성에 힘쓰다가 1916년에 폐교되었다. 1902년에는 牛山學校(懿法學敎)가 설치되고, 1904년에는 尙洞敎會 목사 全德基가 靑年學院을 설치하였다. 본래 전덕기는 숯장수였는데 그 후 목사가 되고 애국지사로서 청년학원을 세운 것이다. 처음에 청년학원은 尙洞 攻玉學校와 기와집 건물을 같이 쓰며 낮에는 공옥학교가 사용하고 야간에는 청년학원에서 중학교 정도의 교육을 하면서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처음에는 기독청년운동이었으나 범위를 넓혀서 누구나 배우며 애국할 수 있는 청년교육을 목표한 기관이었다. 강화도 개화운동의 선구자 李東輝나 수원의 朴勉洙는 청년학원에서 배우고 향리에 돌아가 교육기관을 세워 애국청년운동을 한 사람들이다.158)金世漢,≪周時經傳≫(正音社, 1974), 100쪽. 당시 청년학원은 애국지사들의 총집합소로서 기독교 중견인물을 위시해서 盧伯麟·安泰極·李商在·南宮檍·李東寧·李承晩·申采浩·尹致昊·金九·李儁·崔光玉 등의 인물이 모였으며 新民會의 기관학교로서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하다가 1914년에 폐교당했다.

 1905년 2월에는 嚴柱益이 養正義塾(오늘의 양정중·고등학교)을 창설하였다. 설립자 엄주익은 1904년 軍部協辨으로 도일하여 당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한 후 일본이 서양의 새로운 사조에 접하고 있음에 크게 감명되어, 귀국하여서는 당시 사회의 급선무가 무엇보다도 교육의 보급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여기에 찬동하는 7, 8인의 발기인과 더불어 나라를 구하는 인재를 배양하기 위해서 ‘蒙以養正’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私財를 던져 몸소 塾長이 되어 헌신했다.159)韓基彦,≪韓國敎育史≫(博英社, 1963), 286쪽. ‘몽이양정’이란 올바르게 길러서 깨우쳐 준다는 뜻이다. 설립 이후 3년이 경과되었을 때, 嚴妃는 1907년 5월 慶善宮과 英親王宮에 수속된 전라남도의 함평·무안·광양 및 경기도의 이천·풍덕 각 군 소재의 토지, 총계 약 200만평을 하사하였다.

 1905년 5월에는 李容翊이 교육구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普成學校(고려대학교 전신)을 창설했다. 이용익이 보성을 세운 것은 그가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이듬해이며, 그가 일본으로 간 것은 그들에 의하여 납치되었던 때문이다. 그는 체류중에 일본의 근대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보았고, 귀국할 때에는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입하여 왔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 신교육기관을 창설하고자 한 의도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황성신문≫은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副將 李容翊씨가 일본에 유람하여 일본의 교육제도를 시찰하고 回國時에 각종 서적 3천元 가치를 購來할 계약이 있다 하고 자금을 自辨하여 漢城 내외에 普成學敎 7소를 설립할 계획으로 學部에 청원하고 학교 가옥은 처분을 奉承하여 公廳을 倍有할 터인데 우선 天然亭 앞 俄語學校를 승인하였고 교장은 丁明燮, 金重煥 제씨로 정하고 장차 교육을 크게 발달케 한다더라(≪皇城新聞≫, 1905년 1월 23일).

 이 같이 이용익이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입한 것은 학교교재를 출판키 위한 인쇄소설립을 이미 머리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서거한 후 손자 李鍾浩가 잠시 학교경영의 책임을 맡다가 1910년 천도교에서 학교경영을 인수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하여서는 이 땅에 수많은 私學이 세워졌다. 일반 국민들 역시 민족의 장래가 청소년의 교육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교육면의 혁신을 가져왔다. 이에 대하여 북한에서 일하고 있던 한 선교사는 이 교육실정을 아래와 같이 보고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교육혁명의 진행중에 처하여 있다. 기독교나 비기독교 기관을 막론하고 학교들이 하룻밤 새에 생기곤 한다. 관찰사가 학교를 시작하고, 군수가 학교를 세우고, 면장이 학교를 시작하고, 동장이 학교를 세우고 있다 … 선생 한 사람을 놓고 서로 빼앗아 가려 한다. 봉급이 올라 갔고, 평양 崇實學校 졸업생이 때를 만났다 … 교육관념이 크게 달라지고 초빙하는 敎員型도 변하여지니 구식 서당의 위신이 떨어지고 한문과 서양과학의 지식을 겸비한 선생들만이 자리를 차지케 되어 있는 현상은 참 흥미있는 일이다(L. G.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Pyen Yong;Union Christian College Press, 1929, pp. 391∼392).

 을사조약 이후 개인이 세운 사립학교를 보면 1906년 5월에는 閔泳徽가 사재를 던져 徽文義塾을 설립하였다. 민영휘는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좌찬성에 이른 한말 관계와 재계를 주름잡던 인물로 그는 청·러시아 세력과 결탁하여 일본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처음 교명은 廣成義塾이었는데, 휘문의숙이란 교명은 고종황제에 의한 賜名이다. 이는 그의 이름 끝자 徽에다가 ‘文’자를 합쳐 명명한 것이다. 동교에서는 부대사업으로 徽文館을 두어 교과서 및 기타 서적까지 출판했다. 1906년 7월에는 南宮檍이 강원도 양양에 峴山學校를 세웠는데, 이는 지금의 襄陽高等學校의 전신이 되었다.

 1906년 9월에는 普成館의 설립자인 이용익이 다시 普成中學校(오늘의 普成中·高等學校)를 설립했다. 초대 교장에 申海永이 취임하여 신입생 240명을 모집하고 동년 9월 22일 서울 中部 礴洞(現 壽松洞)에서 개교하였다. 또 이 해 12월에는 中東學校가 세워졌다. 처음에는 申圭植에 의하여 漢語夜學으로 출발했으나, 뒤에 崔奎東의 경영으로 넘어가 오늘날 중동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중동학교의 설립 경위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관립 한성한어학교 내에 설립한 漢語夜學은 지난 봄에 학부의 인가를 얻어 개막하였으나, 출석 생도가 영성할 뿐 아니라 제반사가 미비하여 개교식의 거행 없더니, 지난 달에 漢語敎官 柳光烈씨와 그 당시 班監 崔興模氏는 某某 學員의 동의에 의하여 日語學 일과를 첨가하고 학원을 모집하니, 생도의 입학이 一增月加하여 출석 생도가 60여 명에 달한지라, 교무를 확장하기 위해 야학의 명칭을 고쳐 中東學校라 명명하고, 교장은 吳在昌씨로 漢語敎師는 柳光烈씨로 日語敎師는 朴在肅씨로 교감은 崔興模씨로 선정하고 지난달 28일에 개교식을 거행하였다(≪大韓每日申報≫, 1907년 1월 5일).

 이 때 최규동은 중동학교의 설비를 갖추고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후일 독립쟁취의 토대를 닦고, 자칫하면 좌절하기 쉬운 민족의식을 이 나라 청소년들의 가슴 속에 불어넣기 위하여 1주일에 50여 시간을 가르쳤다.

 그런데 1907년에 일본은 丁未 7조약으로 황제를 폐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 때≪皇城新聞≫은 나와 국가의 일체감을 강력히 주장하며 나섰다.

오늘의 우리 한국은 열강에서, 諸人種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가, 위험하니 우리 동포여 분발하며 청년들은 일어나서 2천만의 입으로 세계에 큰 소리로 외쳐 4천만의 눈은 이 세태를 주시하라 … 청년들은 시세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고 힘쓰라(≪皇城新聞≫, 1907년 5월 13일).

 바로 이해 2월에 島山 安昌浩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하여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고 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교육 유세를 하게 되었는데, 그 강연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여러분 우리들은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이제 이방인이 이 땅의 주인인 양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모두 개화한다면 그들은 이 땅을 강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도덕은 의지의 표현입니다. 勇於公戰하고 怯於私鬪하는 우리가 됩시다. 조국 回天의 妙는 덕·체·지의 三育입니다. 勇於公戰하고 怯於私鬪하는 우리가 됩시다. 여러분. 학교를 세워 務實力行하는 인재를 키워 봅시다.

 안창호의 이 같은 강연을 들은 각 곳의 군중들은 저마다 교육을 통한 인격완성과 국권회복에 대한 자신감을 지니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우선 평양에 大成學校를 세우게 되었다.

 대성학교 설립에는 鐵山의 吳熙源이 5천원, 평양의 金鎭厚가 3천원, 선천의 吳致殷이 2천원의 거금을 희사했다. 대성학교 개교일에는 입학생이 90여명에 달했으며, 내빈이 1천여 명 참석했는데,160)≪大韓每日申報≫, 1908년 9월 30일. 한때는 크게 발전하여 입학 지원자가 500∼600명이 몰리는 때도 있었다. 1910년부터는 夏期 師範講習所를 부설하여 그 소장을 張膺震에게 맡기고 소학교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161)≪大韓每日申報≫, 1910년 1월 16일.

 李光洙는 그의 작품≪無情≫에서 대성학교 成校長의 연설을 통하여 아래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여러분 … 여러분의 조상은 여러분과 같이 마음이 썩지 아니 하였고, 여러분과 같이 게으르고 기운없지 아니 하였소. 평양성을 쌓은 우리 조상의 기상은 웅대하였고, 을밀대와 부벽루를 지은 우리 조상의 뜻은 컸소이다(李光洙,≪無情≫前篇, 耕眞社, 1954, 134쪽).

 다시 이광수는 주인공인 형식과 세 처녀 사이의 대화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아래와 같이 강조하고 있다.

과학! 과학! 하고 형식은 여관에 들어와 혼자 부르짖었다. 세 처녀는 형식을 본다.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과학을 주어야 하겠어요. 지식을 주어야 하겠어요 …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 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李光洙,≪無情≫後篇, 耕眞社, 1954, 220∼221쪽).

 당시 대성학교 학생이었던 金瀅植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1907년 大成學校 설립의 소식이 세상에 전파되자, 이를 聲援支持하는 소리는 全朝鮮을 흔들었으며, 입학 지원자는 조수와 같이 밀리어 불시에 5, 6백 명의 청년이 모이었다 … 그 당시 학교의 과정은 중등학교라 하지마는 지금의 중등학교 보다는 훨씬 고등이어서, 4학년 과정은 어떤 전문학교의 정도와 대등하였고, 학교의 설비도 중등학교로서는 유례가 없을이 만큼 완비하였었다(朱耀翰,≪安島山全書≫, 三中堂, 1963, 89쪽).

 이 때 李昇薰이 평양에서 안창호를 만난 것은 그의 생애의 일대 전환기가 되었다. 자기 주택을 지으려던 건축 자재를 모두 五山學校를 짓는 데 썼다. 그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대하여 깊이 깨달은 바 있어 定州 향리로 돌아와, 우선 1907년 8월에 초등교육기관으로 講明義塾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강명의숙만으로 도저히 만족스런 민족교육을 전개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여 중학교 건립을 목표로 활동한 결과 동년 12월에 다시 오산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우는 데는 당시 평안도관찰사 朴勝鳳의 후원이 컸다. 박승봉이 정주 일대의 유림들을 불러 향교재산을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일부를 떼어 오산학교에 기증하라고 권고하였더니 그들은 순순히 그 재산을 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러나 박승봉이 그 직을 떠나게 됨에 따라 1908년 유림에서는 자기네들이 오산학교를 맡아 경영하겠다고 나섰다.

 이 때 이승훈은 유림이 학교경영이 목적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단연 향교토지를 반환하고 자기소유 토지 전부를 내놓고 또한 동지들의 도움을 얻어 학교를 계속 경영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어디를 가나 오산학교를 위하여 가고, 일을 하여도 학교를 위하여, 말을 하여도 학교를 위하여 꿈을 꾸게 되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學校狂·敎育狂이라고까지 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오산은 개교 2주년을 맞을 때에 학생 수가 10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오산학교와 대성학교는 같은 뿌리에서 내어 뻗은 두 줄기 푸른 가지였다. 대성학교는 안창호의 망명과 함께 興士團으로 모양을 바꾸었고 오산학교는 줄곧 學園으로 남아 일제의 사나운 서리와 비바람을 맞으면서 뻗어나간 것이 다를 뿐이다.

 또 1907년 12월에는 李東輝에 의하여 江華邑에 중학교 과정인 普昌學校가 세워졌다. 그는 이 밖에도 강화군내에 21개의 소학교와 支校를 설립하는 한편, 開城普昌學校·長湍普昌學校·豊德普昌學校·金川普昌學校·安岳普昌學校·咸興普昌學校·忠州湖興普昌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여하튼 이동휘는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윤치호·안창호 등과 손을 잡고 개성·평양·원산 등지에 170여 교, 강화도에 만도 73개교에 달하는 학교를 세웠다.

 이밖에 1907년에 설립한 사학으로 李鳳來의 鳳鳴校, 柳一宣의 精理舍, 李鍾浩의 鏡城中學校, 金九가 책임자로 있은 楊山小學校 등이 이름을 떨친 학교들이다. 이 중에서 유일선이 서울 倉洞에 세운 정리사는 수학과 물리학을 주로 가르쳤다. 이 때 周時經은 이 정리사에 입학하여 1909년 12월까지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면학도였다. 낮이면 攻玉學校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일요일 오후에는 국어 강습회를 열고, 학부의 국문연구소에 나가면서 밤이면 정리사에 나가 배웠다. 그의 우리말의 독창적인 분석은 수리학적 두뇌의 산물이라 하겠다.

 1908년 2월에는 전북 김제군에서 이 곳 출신의 선각자 金洪植의 주동으로 같은 마을 김해김씨 문중에서 뜻을 모아 新明學堂(그 뒤 교명은 致文學校)이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뒤에 김홍식의 집안 아저씨 金致文이 2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매년 1천 5백여 섬의 소유농지 소작료수입을 운영비로 들여 항일정신과 함께 신학문을 농촌 자녀들에게 심어 주었다.

 이 때 독립운동가인 金東三도 경북 안동군 임하면에서 전국 유림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1908년에 協東學校를 세워 동지들의 추천으로 교감이 되었다. 이 학교는 3·1운동 때까지 유지되어 많은 인재를 길러 내었다. 한편 김동삼은 1909년에 동지 朴重華·南亨祐·安熙載 등과 힘을 모아 비밀 청년단체인 大東靑年團을 결성하고 영남 일대의 단원가입과 교양선전에 정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한편 1908년 9월에는 張志暎·閔橿 등에 의하여 昭義學校가 설립되었는데, 그 뒤에 이 학교는 東星商業學校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09년에는 金鴻亮의 발의로 楊山小學校 자리에 중학교를 설치하고 교육문화운동의 진폭을 넓혀 놓으니 황해도 일대의 뜻있는 청소년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 들었다.

 이러한 私人중심의 학교 설립자나 교사는 모두 개화운동의 선각자요, 독립운동의 志士요, 애국자로서의 민족적인 긍지와 신념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는 이들을 통하여 자주성과 주체의식을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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