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3. 근대 교육의 확대
  • 2) 민족사학의 발전과 설립 이념
  • (2) 민족사학의 설립이념

(2) 민족사학의 설립이념

 우리 나라가 역사적으로 근대화 과정에 들어선 것은 갑신정변·동학농민전쟁·독립협회·갑오경장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갑오경장은 대내적으로는 동학농민전쟁과 대외적으로는 청일전쟁 등 대내외적인 큰 사건에 뒤이어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것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고 침략적인 것으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타율적으로 시도된 內政改革이었다.

 그러기에≪독립신문≫은 ‘獨立’이란 낱말을 사용하며 776회에 걸쳐 논설을 게재하였는데, 이중 정치분야 271회, 사회분야 162회, 사상분야 147회, 교육분야 98회, 경제분야 59회, 문화분야 39회였다. 즉≪독립신문≫의 4년간에 걸친 논설의 주안점은, 첫째 자주 독립 및 自强精神의 앙양, 둘째 외세 침투의 배격 등으로 집약되었다. 독립협회 초대회장 安駉壽도≪獨立協會會報≫창간호 서문에서 그 설립목적을 ‘독립’의 성취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174)≪大朝鮮獨立協會會報≫, 1896년 11월 30일. 그러니≪독립신문≫이나 독립협회가 지닌 개화사상의 다양한 合意를 한데 묶어 구조적으로 파악한다면 ‘독립’이라는 상징개념에로 수렴되는 근대 민족주의의 理念像이 가치포괄적인 최상의 목표로 부각됨을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민족사학의 설립이념도 일제의 도전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타났다. 그러기에 이 시대 사학의 흥성은 놀라왔다. 민족사학의 설립정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선진제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개화사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 정신에서 세워졌다. 말을 바꾸면 민족보전과 근대지향이라는 두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구한말에 우리가 근대지향의 개화운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동시에 민족보전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그러기에 항시 근대화라고 하는 경우에는 으레 그것은 민족보전이나 발전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민족의 발전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물론 근대지향이라고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상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시 사학의 설립 이념의 특이성은 이 중 어느 하나만을 추구하지 아니 하고, 양자를 복합적인 일체로 보았다는 점이다.

 실로 개항 이래 한국근대사는 다양한 역사적 변동의 소용돌이였으나 그 속에서 전개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운동은 근대적인 ‘국민국가’형성을 위한 민족주의운동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민족주의운동이란 기왕의 中華主義的 事大秩序인 천하 안에서 종속적 지위를 가진 ‘나라’를 유지,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력균형의 원리에 따르는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생존’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서구 근대국가와 같은 ‘주권국가’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뜻한다.175)차기벽,≪한국 민족주의의 이념과 실태≫(까치사, 1978), 176쪽. 따라서 이는 근대의식에 따른 자주 독립의식을 강하게 발아시켰으며 아울러 서구문명에 대한 새로운 의식과 근대화 운동의 기초역량 비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기에 처음에 민족사학의 설립이념은 선진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개화사상에서 출발하였는데 일제하에서 점차 ‘교육구국’의 인재양성이라는 민족적 요망에서 설립되었다. 구한말의 서세동점과 일제침략, 특히 일본에 의한 청일전쟁·갑오경장·러일전쟁·을사조약 등은 각각 다른 각도에서 한국인에게 심각한 반성과 커다란 각성을 일으켰다. 이 때 뜻있는 사람들은 남의 나라 군대들이 우리 땅에서 제 마음대로 싸워도 말 한마디 못하는 無爲無能을 통탄했다. 또 허울좋은 독립과 갑오경장은 우리의 뜻에서 된 것이 아니고 일제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고, 행정기구의 개편, 신교육제도의 이면에도 일제의 마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식민지주의 및 제국주의시대를 당하여서는 개화와 독립이 같은 목표의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점이 인식되었다. 그 이유는 개화없이 자주독립은 이루어질 수 없고, 또 자주독립을 해야 참된 개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화·자주독립이란 결국 국민적 자립이며 국가의 자강이다. 자강이 독립의 전제로 인식된 것임은 “자강한 뒤에라야 독립은 가능하고 자강하지 않으면 독립은 있을 수 없다”176)≪大朝鮮獨立協會會報≫, 1897년 5월 31일.는 주장이다. 자주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듯이 자강도 자주독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자기발전의 계기로 삼아 自守·自立을 모색하여 ‘自强的 民族主義’를 확립하려고 했다.

 그들은 열강의 도전에 대항하여 이를 막고 나라의 독립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루 속히 개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주부강한 나라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 방법은 먼저교육을 진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화지식층 사이에서는 ‘교육의 힘으로 민족적 단결심을 발휘시키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물론 여기에서의 ‘교육’은 구학문의 폐단을 지적하고 신학문의 장점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요청에 응하여 민족사학이 설립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초·중등 교육기관이 모두 근대교육을 빨리 펴서 젊은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만이 나라를 개화하고 또 구국의 터전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다. 대체로 1905년 소위 을사조약 이전에 설립된 사학은 개화의 요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다시 말하면 개화라는 이름의 근대화를 실천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그리하여 이들 학교에서는 개화된 선진제국의 문물과 기술을 습득하고, 또 부국강병의 實을 일으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우리가 근대교육을 통해 신학문을 흡수하고 있을 무렵 뜻하지 않은 군국일본의 침략이 다가왔다. 이에 1905년 이후부터 설립된 사학은 민족자본에 의하여 교육구국의 급선무로서 인재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사학의 설립자들도 모두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지닌 지도층이었다.

 이는 1905년 5월에 이용익이 세운 普成學校(고려대학교 전신)와 1906년에 세운 普成中學校의 설립이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보성의 건학정신은 인재를 배양하여 국가의 기초를 완성하고 국민의 지식을 발달케 하여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바로잡으려는 데 있었다. 이용익의 생애는 철두철미 왕실에의 충성과 일본세력에의 반항에 있었다. 이는 그가 1907년 1월 海蔘威에서 “我死後에 韓國主權을 회복하기 전에는 運柩以歸치 말라”고 유언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남궁억도 이 때 “國權更生의 길은 오직 하나 교육밖에 없다”177)金世漢,≪翰西 南宮檍先生의 生涯≫(翰西 南宮檍先生記念事業會, 1960), 136쪽.는 민족주의정신에서 峴山學校와 그 뒤에 牟谷學校를 설립하였다.

 안창호 역시 한말의 침체된 국운 속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운동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전개했다. 다시 말하면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해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면 다른 무엇보다 교육이 제일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의 말을 빌면, “한국 민족전체를 개조하려면 그 부문의 각 개인을 개조하여야 하겠고, 각 개인을 다른 사람이 개조하여 줄 것이 아니라 각각 자기가 자기를 개조해야 한다”178)安秉煜,≪民族의 스승 島山安昌浩≫(興士團本部, 1971), 7쪽.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1899년에 점진학교와 1907년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점진학교는 점진적으로 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그 설립 목적이었다. 그가 친히 지은 교가 속에도 그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문하되 낙심말고    하겠다 하세 우리 직무를 다

(朱耀翰,≪安島山全書≫, 三中堂, 1963, 32쪽).

 또 대성학교의 설립정신은 그의 민족개조론에 따른 것으로 ‘점진적으로 大成하는 인물’을 양성하여 민족운동의 중심세력을 구축함에 있었다. 그는 민족운동의 인재와 국민교육의 師傅를 양성할 목적으로 평양을 비롯한 서울·대구·광주 등지에도 똑같은 대성학교를 세울 계획이었으니 평양의 대성학교는 그 제1교요 표본교였다.

 그리고 대성학교의 교육방침은 아래 네 가지에 두었다.

첫째, 건전한 인격의 함양

둘째, 애국정신이 강한 민족 운동자 양성

세째, 국민으로서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육성

네째, 强壯한 체력의 훈련

(吳天錫,≪韓國新敎育史≫, 現代敎育叢書出版社, 1964, 205쪽)

 안창호는 이 교육방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평소 그의 신념대로 ‘務實力行’과 ‘主人精神’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무실역행은 공리공론을 하지 말고 우선 나 한 사람부터 성실한 사람이 됨으로써 민족중흥에 새로운 힘이 될 수 있음을 이름이다. 무실이란 實을 힘쓰자는 뜻이니 실이란 眞實·誠實·참 그리고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안창호는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하여 참되기를 가르쳤다. 약속을 지키는 것, 집합시간을 지키는 것이 모두 성실 공부요, 약속을 어기는 것,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은 허위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고 참된 것이 무실이기 때문에 참의 정신·참의 실천·참의 도덕으로 우리 민족을 교육시켜 갱생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가 말한 역행은 行을 힘쓰자는 것이다. 역행은 힘써 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행하기를 힘쓰자는 말이다. 즉 공리공론의 허식적인 명분론을 버리고 實踐窮行하기에 노력하자는 것이다. 이 실천주의는 재래의 文弱을 비판하고 강장한 기풍을 숭상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대성학교에서는 德·體·知 三育을 중히 여겼다. 덕육과 체육을 지육보다 먼저 내세운 것은 바로 이 역행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 역행은 큰 목적이 눈 앞에 실현되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고, 오늘에 할 수 있는 일은 오늘에 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 가정을 고치는 일, 허위를 버리는 일, 민족운동의 동지를 구하는 일 등은 모두 오늘에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였다.

 그의 무실역행의 정신은 1909년에 조직된 靑年學友會의 4대정신에도 잘 나타나 있다. 務實·力行·忠義·勤勉의 세 덕을 더 가했다. 그래서<靑年學友會歌>를 지은 崔南善은 그 가사에서 “務實力行 등불 밝고 깃발 날리는 곳에, 우리들의 나갈 길이 숫돌 같도다”고 하였다.

 五山學校 역시 대성학교의 정신과 같이 민족운동의 인재, 국민교육의 師傅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이다. 1907년 12월 24일 개교식 때 李昇薰은 오산학교의 설립정신을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지금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온 강토를 원수인 日人들에게 내어 맡긴다는 것은 차마 있어서는 아니 된다 …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귀중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 나는 일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를 모르고 있으니 그들을 깨우치는 것이 제일 급무다. 우리는 우리를 누르는 자를 나무라기만 해서는 안된다. 내가 못 생겼으니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냐. 옛 聖人의 말씀에도 ‘人必自侮而後 人侮之 ’라고 하였다. 내가 오늘 이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을 가르쳐 만분의 일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 일심 협력하여 나라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한다(金基錫,≪南岡 李昇薰≫, 現代敎育叢書出版社, 1964, 90쪽).

 민족사학은 처음 신문화 또는 개화의 방법으로 설립된 것이었으나 1905년부터는 그 양상을 달리하여 교육구국의 이념하에 세워졌다. 즉 그 설립이념의 공통된 점은 모두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새 지식을 계발하여 국권을 찾는 데 두었다. 민족사학의 교사 역시 독립운동의 지사요 애국자로서의 긍지와 신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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