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3. 근대 교육의 확대
  • 3) 여자 교육의 발전
  • (1) 미션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1) 미션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우리 나라 여성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한마디로 ‘人權’없는 女性史와 ‘敎育’없는 女性敎育史를 남기게 했다. 이에 따라서 초대 여선교사들의 기독교적인 사명은 곧 무지와 사회적 억압에 눌려 있는 여성들의 교육과 그 해방이었다. 다시 말하면 교육과 계몽을 통한 여성해방운동이 바로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기독교운동이며 선교사업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女學校 사업은 간접적인 선교사업이다. 이는 공개적인 설교와 종교의식을 통한 직접적인 전도활동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1885년 6월 이 땅을 밟은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부인은 선교사업의 중요한 분야로 한국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1886년 5월경 한 여학생을 상대로 학교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여학교의 요람이 된 梨花學堂이다.

 그는 내한 즉시 女宣敎部 用地로 선교부(남자)가 소유하고 있는 언덕 위의 가옥을 1885년 10월에 매입하였다. 이 부동산은 초가집 열 아홉 채와 빈터였다.179)M. F. Scranton, Woman's Work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Vol. 3, No. 1, 1896, p. 339. 스크랜턴부인은 이 초가집들을 수리하여 1888년 11월부터 사용하였다. 그런데 신교육의 수용과 동시에 근대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할 때, 남학교의 경우는 신학문에 눈이 뜨기 시작한 때라 학생을 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여학교의 경우는 학생을 구하기가 어려워 여러 가지 난관을 겪어야 했다.

 그러므로 1894년 1월부터 1897년 3월에 걸쳐 우리 나라를 네 차례나 찾아온 바 있는 영국인 비숍(I. B. Bishop)여사는 그 여행중 10세 이상의 소녀를 거의 본 일이 없었다고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명성황후조차도 국내 여러 곳은 물론이고 서울거리도 본 일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80)I. B.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 Reprinted by Yonsei University Press, 1970, p. 341.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 기독교계통의 여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의복·침식·학비가 보장된 완전 장학제도였지만 안방(閨房)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閨秀들을 학생으로 끌어들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885년 8월 이전 학교는 이미 개설되어 있었으나 동년 12월까지 입학생이 없었다. 이 사실이 황실에 알려졌던지 스크랜턴부인은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황제는 내가 한국에 온 목적에 대해 소식을 듣고 계십니다. 황제는 대단히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보내 주셨으며 며칠 전 그는 어떤 모임에서 연설하는 가운데 여자학교에 대해 찬성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Heathen Women's Friend, Vol. ⅩⅦ, No. 10, 1886, p. 249).

 스크랜턴부인은 1886년 5월 31일 밤 한 사람의 여성을 학생으로 맞이했다. 그가 근 1년 동안 기다리던 첫 학생이었다. 처음 양반집의 자녀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결국 가난한 집 아이와 고아를 학생으로 얻었다. 당시 선교사들로서는 이들 여학생의 입학은 마치 구원을 얻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화에 한하지 않고, 이 당시 설립된 女學校史 혹은 女學校誌를 읽어 보면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이다.

 뒤에 서술할 貞信女學校·崇義女學校·培花女學校 역시 이화학당과 같이 학생을 구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평양 숭의여학교의 학생은 개교 당시 어린 소녀 10명이었다. 이 소녀들은 여선교사의 무릎에 올라앉아 배워 주는 대로 받아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어린 소녀들은 응석이 심하여 가르치는 것보다 응석을 받아 주는 일이 바로 수업이었다.

 정신여학교 역시 엘러즈(Annie Ellers)가 다섯살 난 어린 여자고아 ‘정네’를 가르침으로 시작되었다. 남감리교회가 한국에 들어와 1898년 5월 처음 세운 배화여학교도 선교사인 리드부인이 두 명의 여학생과 세 명의 남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하였다. 그 후 캠프벨(J. P. Campbell)여사가 이 5명의 학생들을 인계받아 학교 이름을 짓고 학생모집에 골몰하였는데 이 최초의 여학생도 선교사 리드 사택에서 수위를 하던 朴씨의 딸이었다. 캠프벨 학당장이 기숙사를 돌아보는데 이부자리 위에 오줌똥을 싸 놓은 어린 소녀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있었다 하니 그 고충이 어떠했는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이 선교 초기 미션여학교에 입학한 여학생들을 보면 대개가 하류계급 자녀가 아니면 고아출신이거나 조혼을 하였다가 과부가 된 사람 또는 시집을 살지 못하고 온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그 불행을 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감당하기가 어려워 학교라는 이름의 광장으로 탈출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이나마 오래 붙잡아 두려고 애를 썼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이화학당은 우리 나라 최초의 여학교가 된 것이다.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났을 때 명성황후는 스크랜턴부인의 노고를 알고 친히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 주고 외무독변 김윤식을 통해 扁額을 보내와 그 앞날을 격려했다. 당초에 스크랜턴부인은 專信學校(Entire Trust School)라 명명하려 했으나 명성황후의 은총 때문에 ‘梨花’로 택하였다. 당시 황실을 상징하는 꽃이 배꽃(梨花)이었는데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성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한국의 배꽃은 프랑스의 나리꽃(百合花)이나 영국 랭커스터(Lancaster)家의 붉은 장미꽃에 닮은 꽃이다.

 그 후 이화학당은 1888년 학생수가 18명으로, 다시 1893년에 30명으로 늘어났다. 1890년대 朴泳孝의 딸이 학당에 와서 스크랜턴부인과 기거하며 공부했다는 것을 보면 당시 학생은 양극의 층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81)梨花女子大學校,≪梨花八十年史≫(1967), 46쪽. 이렇게 이화학당이 설립되어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을 무렵 1893년 제1회 宣敎師公議會에서 결정된 선교정책도 “부인들을 개종시키는 일과 그리스도교 신자인 소녀들을 교육하는 데 특별히 힘쓸 것, 이는 가정의 주부가 후손들의 양육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182)郭安全,≪韓國敎會史≫(大韓基督敎書會, 1961), 68쪽.고 여성교육의 시급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1894년 평양에 正義女學校가 설립되어 지방 미션여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그 후 1897년 선교부의 지방학교 설치에 관한 정책이 결정되자 전국 주요 도시마다 미션여학교가 설립되어 나갔다. 1895년 부산에 貞信女學校(東萊女子中·高等學校 전신), 1896년 평양에 崇賢女學校, 1897년 인천에 永化女學校, 1898년 서울에 培花女學校와 원산에 樓氏女學校 및 목포에 貞明女學校, 1904년 개성에 好壽敦氏女學校와 원산에 進誠女學校, 1905년 군산에 永明女學校, 1906년 선천에 保聖女學校, 신의주에 崇貞女學校와 普聖女學校, 1907년 광주에 須皮亞女學校와 대구에 信明女學校 및 전주에 紀全女學校, 1908년 성진에 普信女學校가 세워졌다. 이 밖에도 함흥에 永生女學校, 재령에 明信女學校, 회령에 普興女學校 등이 설립되었다.

 이 무렵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시설이 잘된 여학교는 북감리교 여자선교부가 경영하는 이화학당이었다. 남감리교 선교부의 培花女學校(The Carolina Institute)는 캠프벨여사가 주관하여 운영했다. 북장로교 선교부 산하의 여학교는 넷이 있었는데 그 중 제일 오랜 학교는 서울 정신여학교였다. 1907∼1908년간 정신여학교는 새 교사를 짓고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가난한 학생들의 생활보조를 하기 위하여 시작하였던 工作部를 없애고 정식 여자중학교로 출발하였다.

 平壤女子中學校는 북장로교와 북감리교의 연합기관으로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수년간 교사가 없어서 병원으로 쓰던 집을 교사로 쓰다가 1910년에야 새 교사를 건축하였다. 세 번째 여자 중학교는 宣川 보성여학교였는데 루이스 체이스(Louise Chase)가 교장이었다. 그러나 교사와 필요한 시설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네 번째 여학교는 부산에 있었다. 일찍이 여성교육에 헌신한 어빈(Bertha K. Irvin)여사의 노력에 의하여 시작된 이 학교는 模範女學校(Model Training School)로 발전하였다. 미국의 세브란스(L. H. Severance)와 갬블(D. B. Gamble)의 기부금을 얻어 1909년 학교건물을 신축하였다. 이로써 이 학교는 그 당시 한국장로교 선교부 소관 여학교 건물 중 ‘가장 좋은 설비를 갖춘 학교’라는 평가를 받았다.183)L. G.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 Pyen Yong:Union Christian College Press, 1929, pp. 399∼400.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