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3. 근대 교육의 확대
  • 3) 여자 교육의 발전
  • (2) 관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2) 관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독립협회와≪독립신문≫에서 남녀평등의 실현이 민주주의적 제도 수립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인식하고 강조한 것은 그들의 민주주의사상이 단지 정치적 측면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좀더 넓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민주주의사상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민주주의사상은 사회체제의 민주화를 포함한 사회구조 전반의 개혁을 위한 민주주의사상이었다.184)愼鏞廈,≪獨立協會硏究≫(一潮閣, 1976), 628쪽.

 ≪독립신문≫은 당시 전국적으로 정부가 설립한 여학교가 하나도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여성 자매단체인 讚揚會가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하자 이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185)≪독립신문≫, 1898년 10월 13일.≪독립신문≫과 찬양회 부인들의 관립여학교 설립 독려가 주효하여 정부에서는 1899년도 예산에 女學校費 3,750원을 배정하고 또 학부는 동년 5월 여학교 관제 13조를 제정하여 각의에 상정시켰다.186)≪독립신문≫, 1899년 5월 26일.

 그러나 우리 나라 최초의 여학교관제는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의 학부대신은 보수파의 申箕善으로 그는 여자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신교육까지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학문을 야만인의 학문이라 보았으니, 여자교육을 이해하였을 리가 없다. 따라서 관립여학교의 설립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1908년 정부는 칙령 제22호로 여성의 중등교육을 위한<高等女學校令>을 공포하였다. 同令 제1조에 의하면 고등여학교 설립목적을 “여자에게 必須한 고등 보통교육 및 技藝를 授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했다. 남아를 위한 학교법규가 모두 1904년 이전에 공포된 것에 비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동령은 신교육이 수용된 이래 처음으로 여성교육을 위한 법령으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물론 정부가 여성의 중등교육기관을 두기로 결정하고 고등여학교령을 공포하기까지에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자극이 컸다.

 정부는 동령에 의하여 1908년 4월 1일 漢城高等女學校(현 京畿女子高等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魚允迪을 임명했다. 이때 純宗妃는 동년 5월 20일 한성고등여학교에 아래와 같은 徽旨를 내려 격려하였다.

光武 維新 이래 국가문명이 뒤짐을 軫念하시어 신학을 흥하시고, 純宗 등극 후에도 이 뜻을 이어 학교가 蔚興하고 자제가 奪勵하나, 이는 모두 남자에게 그칠 뿐이요, 여자교육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 보통교육은 남녀의 구별이 없는 것이니, 여자는 시집가 남편을 돕고 집안살림을 하며, 자녀를 기르는 책임을 짊어져 한 집안의 행복을 증진하고, 이를 推하여 국운을 裨補함도 큰 것이니, 국가가 어찌 여자교육을 중요히 여기지 아니하리오(≪舊韓國官報≫, 1908년 5월 26일).

 이는 여성교육에 대한 국가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순종비에 의한 女學校勸興勅語가 하사된 후,≪畿湖興學會月報≫에<女學校入學式>이란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한성고등여학교 입학식 기사가 게재되었다.

(1908년)7월 4일 관립한성고등여학교에서 입학식을 거행하였는데 상황을 略聞한즉 일반 직원 및 학도간에 상견례를 행한 후, 교장 어윤적씨가 皇后陛下의 徽旨를 낭독하고 학부대신 및 차관이 각기 勸勉演說함에 학도 부형중 兪星濬씨가 대표로 답사하였다더라(≪畿湖興學會月報≫, 1908년 8월).

 학교편제는 처음 豫科와 技藝專修科 및 本科로 나누어 각각 한 학급밖에 두지 않았다. 본과 및 예과의 수업은 1908년 7월 6일 시작하였다. 예과의 경우 수업연한은 2년으로 보통학교 교과과정 정도를 가르쳤다. 예과를 둔 것은 당시의 사립여학교가 학년 구분 없이 교육을 했고 또 정부가 보통학교 출신의 여학생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서 관·공립 보통학교에 여자학급을 두도록 하는 한편 한성고등여학교에 예과를 설치한 것이다. 本科의 경우 수업연한은 3년으로 입학자격은 예과수료생이나 보통학교 졸업자로 규정하였다.

 전문 24조로 된 학칙 제4조에 의하면 교육과정은 아래와 같다.

① 本科:수신·국어·한문·일어·역사·지리·산술·잇과·도화·가사·수예·음악·체조로 되어 있고, 단 수예 중 자수·편물·組絲·囊物·造花·割烹의 한과목 혹은 數科目을 수의 과목으로 하고 외국어(일어 제외) 및 敎育大要를 수의 과목으로 하여 보탤 수 있다고 하였다.

② 豫科:수신·국어·일어·산술·잇과·도화·음악·체조를 과하였다.

③ 技藝專修科:수신·국어·산술·재봉·자수·편물·조사·낭물·조화·할팽의 한 과목 혹은 數科目으로 하고, 단 일어 및 가사를 수의 과목으로 보탤 수 있다고 하였다.

 위의 교과목에서 보면 一人一技교육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입학 청원서의 양식과 보증인의 자격은 아래와 같다.

               入 學 請 願 書
住所
               姓名
               年  月  日  生
 本人의 貴校 本科·(豫科)·(技藝專修科) 入學하기를 願하와 履歷書를 添聯請願하
오니 許可하심을 望함.
               年  月  日
                  姓名             印
               保證人住
                  姓名             印
               保證人住
                  姓名             印
       官立漢城高等女學校長 姓名             貴下

保證人은 入學者의 父母나 尊親이나 또는 此를 代하여 監督의 責任을 擔當할 者 二人으로 하되 其中 一人은 學校附近에 住居하는 者로 함. 保證人이 其責任을 不務하거나 或은 不適當함으로 認定한 時에는 學校長이 此를 變更함을 命하며 或은 學員의 出席을 停止하는 事도 有함.

 처음 학생모집은 무척 어려웠다. 이 때까지만 해도 우리 국민은 內外法에 따라 여아를 위한 신학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래서 어윤적 교장 자신이 손수 각 가정을 방문하여 학생을 모집하여 無償敎育을 실시했다. 그러나 개교 1년 후인 1909년에 이미 본과 90명, 예과 68명, 도합 158명의 재적생 수를 기록하였다.187)高橋濱吉,≪朝鮮敎育史考≫(帝國地方行政學會 朝鮮本部, 1927), 284쪽. 한편 당시 여성의 인권이란 보잘것이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초기 여학생들은 1909년 民籍法이 제정되기까지 자기의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미션학교 여학생들의 이름은 선교사들이 지어 준 洗禮名으로 대신했다. 한성고등여학교 역시 학생들의 이름이 없어서 어교장 자신이 일일이 이름을 지어 學籍簿에 기재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다음으로 교육방침을 보면 초대 교장 어윤적은 ‘人材養成은 賢母의 손으로’188)京畿女子中·高等學校,≪京畿女高五十年史≫(1958), 3쪽.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魚교장은 교육목표를 부덕함양과 솔선수범에 두어 현모양처를 길러내기에 힘썼다. 그리고 그는 항상 栗谷의 어머니 申師任堂을 본받으라고 가르쳤다.189)위의 책, 4쪽. 위에 언급한 순종비 徽旨도 현모양처형이 교육적 여성상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학교 規則大綱 제2조에서도 “女學生은 別로히 貞淑한 美德을 養케 함이 可함”이라 하여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여성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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