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3. 근대 교육의 확대
  • 3) 여자 교육의 발전
  • (3) 민간인 사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3) 민간인 사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1894년의 갑오경장이 비록 일본의 간섭이 개재된 타율성을 내포한 것이기는 하나 우리 나라 정부측에서 시도한 개혁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내부로부터의 주체적 시각에 근거를 둔 근대화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개화를 촉구한 일본만 하더라도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관·공립 여학교보다 더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민간인 사립여학교였다. 이는≪독립신문≫의 여성교육에 대한 아래와 같은 논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세상에 불쌍한 인생은 조선 녀편네니, 우리가 오늘날 이 불쌍한 녀편네들을 위하여 조선 인민에게 말하노라. 녀편네가 사나이보다 조금도 낮은 인생이 아닌데 사나이들이 천대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나이들이 문명개화가 못되어 이치와 인정은 생각치 않고, 다만 자기의 팔심만 믿고 압제하려는 것이니, 어찌 야만에서 다름이 있으리요 … 조선 부인네들도 차차 학문이 높아지고 지식이 넓어지면 부인의 권리가 사나이 권리와 같은 줄을 알고 무리한 사나이들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부인네들께 전하오니, 아무쪼록 학문을 높이 배워 사나이들보다 행실도 더 높고 지식도 더 넓혀 부인의 권리도 찾아라(≪독립신문≫, 1896년 4월 21일).

 이러한≪독립신문≫의 여성교육에 대한 독려에 따라 1897년경 민간인 여성의 손으로 서울에 貞善女學校가 설립되었다. 이는 西京人으로 상경 거주하는 金(號 養堂)씨에 의하여 세워졌는데, 그는 1899년 교장으로 취임하여 1903년 3월 19일(음력) 운명할 때까지 가재를 털어 손수 여성교육에 헌신했다.190)丁堯燮,≪韓國女性運動史≫(一潮閣, 1971), 30쪽. 그의 교육열은 임종 때 유언에서 짐작할 수 있다.

내 일개 여자로 우리 대한 여자를 외국과 같이 文明敎育하기를 주야로 천지신명케 축수하였더니 불행히 남은 명이 짧아 九泉에 돌아가니 지극 원통한 한은 내 죽은 뒤에 학교를 누가 敎育할고(≪皇城新聞≫, 1903년 3월 19일).

 1898년 9월 25일 찬양회가 여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서울 承洞 개인집에서 공식집회를 가졌는데, 이 때<여학교 설시통문>을 발표하였다.191)≪독립신문≫, 1898년 9월 9일. 이<여학교 설시통문>은 한국 근대여성사에 있어 최초의 여권선언이라 할 수 있다. 찬양회 부인들은 1898년 12월에 학생을 모집하고 부인회 임원들이 직접 교육을 담당하였다. 학교 이름을 順成女學校라고 칭하였는데, 승동에 위치한 관계로 承洞學校라고 부르기도 하고, 부인회 명칭도 승동부인회라 칭하기도 하였다.192)≪韓國女性史≫Ⅱ(梨花女子大學校 出版部, 1972), 300쪽.

 1905년 소위 을사조약 이후에는 국민의 교육열이 급상승했다. 이는 애국열과 직결된다. 교육구국의 인재요망은 남자교육뿐만 아니라 여자교육에까지 침투하여 비로소 여학교 설립이 활발해졌다. 여성들은 ‘배우는 것이 힘이라’는 신념에서 직접 교육사업에 종사하거나 여성 교육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다. 進明婦人會·女子敎育會·養貞女子敎育會가 그것이다.

 1905년 서울에 太平洞女學校가 설립되고 1906년 4월 進明女學校가 세워졌는데 이는 慶善宮과 英親王宮이 희사한 토지 200만 평을 기초로 설립되었다. 교명을 ‘進明’이라 한 것은 ‘進德啓明’이라는 뜻이며 초대 교장으로 嚴俊源이 취임했다. 처음에 진명은 이화학당 출신의 황메레(黃袂禮, Mary Whang) 학감과 서양인 교사로 구성되었다.

 1906년 5월 淑明女學校(초기 교명은 明新女學校)가 설립되었다. 이 역시 영친왕궁의 토지 1천여 정보의 희사를 기초로 세워졌는데 초대 교장으로 李貞淑여사가 취임했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처음 여학생 4명을 상대로 수업을 시작했는데 이들 여학생은 황실의 상궁이었다. 황실 안살림의 개화를 시도하고자 한 엄비의 뜻을 받든 것이다. 이 중에서 憲宗妃의 趙상궁은 숙명여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래서 일반 민간에서는 ‘박동학교’라고 하여 퍽 부러워 하였다고 한다. 숙명은 姉妹校 진명과는 달리 설립 당초부터 일본식 교육 즉 일본의 學習院을 지향했기 때문에 일본인교사로 구성되었다.

 또 1906년 7월에는 秦學新·金雲谷·金松岩·金湖山 등에 의하여 여자교육에 찬성할 의무와 부인사회의 문명을 개진할 목적으로 여자교육회가 조직되었다.193)朱耀翰·鄭英助,≪保護條約時期의 學會 및 團體運動≫(大成文化社, 1965), 16쪽. 여자교육회는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고,194)≪皇城新聞≫, 1906년 11월 1일. 이 해에 여성의 문명을 개진할 목적으로 養閨義塾을 설립하였다.195)朱耀翰·鄭英助, 앞의 책, 16쪽. 이 학교는 뒤에 京城女子學校로 바뀌고, 다시 德壽小學校로 개편되었다.

 이 때≪萬歲報≫역시 일반교육은 물론 특히 여성교육에 유의하여 여자교육 단체를 조직시키기 위한 협찬뿐만 아니라 여성 문화단체와도 밀접한 연락을 취하였다. 1906년 11월 2일자에는 아래와 같이 여성교육이 급선무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 대한 여자가 남자 압제력을 받고 深閨에 禁錮하여 인도상 결점을 담아 가진 감정을 융해하고 일반사회에 同等權制를 극복코자 할지면 첫째 교육에 있다(≪萬歲報≫, 1906년 11월 2일).

 1907년에는 明進女學校와 女子普學院, 1908년에는 東媛女子義塾·普明女學校·養正女學校·養源女學校, 1910년에는 養德女學校 등이 세워졌다. 이 중에 趙東植이 1908년 4월에 야학으로 설립한 동원여자의숙(오늘날의 同德女子中·高等學校) 그 때 서울 苑南洞에 金仁和의 同德女子義塾이 있었는데 김여인 자신이 이를 경영해 나갈 능력이 없어서 1909년 4월 동원여자의숙과 병합했다. 병합당시 교명으로 ‘東媛’·‘同德’ 중 동덕이 그 뜻으로도 좋고 또 여성교육에 적합한 이름이라 하여 同德女子義塾으로 재출발했다. 교명 ‘同德’은≪논어≫에 나오는 ‘同門修德’에서 인용한 것이다.

 물론 이들 민간인 사립여학교도 앞서 살핀 미션여학교나 관·공립여학교와 마찬가지로 각 가정을 호별 방문하여 학생을 모집하였다. 학생이 학교에 나오면 공책·연필·교과서 등을 무상으로 공급해 주어 계속 나오도록 신경을 썼다. 이 때까지만 해도 민간인 여학교의 학생 모집은 20여 년 전의 이화학당 시절과 다름이 없었다. 학교 당국은 부녀자들이 읽기 수월하게 쓴<勸學宣傳文>을 휴대하였다. 그 내용은 “귀한 따님 학교에 보내십시오”, “여자도 배워야 합니다”, “무식하면 짐승이나 같습니다” 등의 표어로 서두를 시작하는 글로서 선진국 여성들의 교육실태를 예시하고 과거 우리 나라 전통적 풍습의 그릇됨을 지적한 것이다.

 이 같이 당시 여학생은 구하기도 어렵고, 또 구해 놓아도 하루가 멀다 하고 빠져 나가기 일쑤였다. 힘들여 모집한 학생이라도 데려오면 도망치곤 하는 일이 어찌나 심한지 학교를 운영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여학생들이 입고 다녔던 의복을 비롯한 쓰개치마에 대해서도 당시 신문들은 한국 여자옷이 개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황제에게 그 개량을 진정했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196)≪帝國新聞≫, 1906년 5월 31일·1907년 6월 19일.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학생들의 가정에서 신교육을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 근본은 내외법 때문이었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식 여학교는 ‘기생학교’라는 이름을 들었다. 장래의 기생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다. 현재 재학생 중에 기생이 많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직도 옛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네의 딸을 학교에 보내기를 꺼려 나온 말이다.

 더욱이 그 때의 學齡이라는 것은 10세 이상 15세 내지 17, 18세이었으니, 그런 과년한 딸을 백주에 길에 내놓고, 더욱이 새파란 남자 선생한테 글을 배운다든가 하는 일은 가문을 더럽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러한 내외법과 사회적인 沒後性 때문에 여학교에서는 오늘날처럼 학제를 시행할 만큼 정기적으로 학생의 입학이 가능한 사회 형편이 못되었다. 그리고 요즘처럼 일정한 연중 수업시간은 없고 또 일정한 방학도 없었으며 농번기가 방학이었다. 물론 요즘처럼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도 없고, 하고 싶은 과목을 할 때까지 하였다. 敎授法 역시 서당식이었고 또 학년과 학기의 구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졸업이라는 것도 없었다. 적당한 혼처가 나면 시집가는 것이 곧 졸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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