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3. 근대 교육의 확대
  • 4) 고등교육의 성립
  • (1) 민립대학의 설치운동과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가. 민립대학의 설치운동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세계의 進運을 알게 된 우리 민족은 식민지적 전문학교 교육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1922년 우리의 民度를 측정할 수 있는 출판계만 보더라도 한국인의 손에서 나오는 월간잡지 및 수양 기관지만 서울에 18종이 있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국채보상시의 한국인이 아니오, 지방과 당파의 분쟁으로 허덕이는 민족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적수공권이라도 총칼 앞에 나갈 수 있는 민족이었다. 민족적 생명이 지속하는 때까지는 민족적 자립에 필요한 학술적 근거와 시설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간에 民立大學 설치운동이 민중적 운동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일본에서는 1920년 日本東洋大學 분교를 서울에, 또 1922년 日本帝國女子專門學校에서 분교를 설치해 줄 것을 사이토(齋藤) 총독에게 의뢰하였다. 또한 총독부에서도 1922년 서울에 京城帝國大學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 무렵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도 민족교육의 최고기관인 대학이 이 땅에 없다는 것은 민족발전에 크나 큰 손실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민립대학은 꼭 있어야 되겠다고 후원하고 나섰다.197)≪東亞日報≫, 1922년 2월 3일. 그리하여 1922년 11월 李商在를 대표로 발기인이 구성되어 朝鮮敎育協會에서 ‘朝鮮民立大學期成會’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23년 3월 29일에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총회가 3일간 개최되었다. 이 때 발표된 민립대학 발기취지서는 3·1 독립선언서에 비길 만한 정도로 우리에게 문화적·정신적인 유산을 주는 내용의 글이기도 하다.198)≪東亞日報≫, 1923년 3월 30일.

 민립대학 발기총회에서 의결을 본 설계내용은 제1기에 자본금 400만원으로 대지 5만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과 대강당 1동을 짓고, 한편으로 교수를 양성하며 科는 法科·文科·經濟科·理科의 4과를 두게 되었다. 제2기는 300만원으로 工科를 신설하고 理科와 기타 각 과를 충실히 하는데 두었다. 제3기에 자본금 300만원으로 醫科와 農科를 설치하게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전 민중이 일치단결하였으므로 이에 당황한 총독부에서는 처음에 京城醫學專門大學 분교로서 조선민립대학의 설립을 허가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제 강점자들의 압력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1926년 초 다시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이 부활하였다. 당시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최근에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 운동을 부활시켜 확실한 결과를 지을 필요가 있다 하여 시내 각 방면의 유지 20여 인이 모여 계속 토의한 결과, 우선 민립대학기성회 간부 제씨와 협의하여 보기로 하고 李鍾麟·朴勝喆·崔元淳·具滋玉·韓基岳·安在鴻 제씨를 대표로 기성회의 在京한 간부 수씨를 방문하고 간담적으로 협의한 결과 동 간부측과도 의사가 대개 소통되었으므로 운동을 부활시킬 방책에 대하여 신중히 연구중이라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멀지 않아 구체적으로 실현될 터이다 하며 추후로 洪性偰·李甲成 양씨도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다(≪東亞日報≫, 1926년 3월 6일 및≪朝鮮日報≫, 1926년 3월 19일에도 이와 같은 기사가 구체적으로 보도되었음).

 그러나 이 운동 역시 총독부의 압력과 자금난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이었던 李昇薰은 오산학교를 확장하여 그 곳에 농과대학을 세울 계획을 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재단법인을 만들기 위하여 宣川으로 吳致殷을 찾았다. 오치은은 安昌浩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울 때에도 많은 돈을 희사하였으며 평소부터 민족운동에 열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이승훈은 백방으로 재단을 만드는데 노력하는 한편 농과대학 설립의 전제로 오산학교 과목에 농과과목을 많이 넣게 하고 학교농장을 확장했다. 그리고는 평양으로 李勳求를 찾았다. 당시 이훈구는 미국에서 농학을 연구하고 崇實專門學校 교수로 있던 때였다. 이승훈은 이훈구로부터 농과대학을 세움으로써 우리에게 이익이 있는 것과 또 학교인가를 얻는 데도 실과계통이 다른 계통보다 수월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1926년 총독부에 농과대학 인가를 신청했으나 이 해 일어난 6·10 만세운동으로 무위에 그쳤다.

 한편 민립대학기성회 회금보관위원이었던 金性洙는 독자적으로 민립대학을 세울 뜻을 품고 1년 9개월 동안 歐美大學의 규모와 시설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의 기본방침이 한국인에게는 대학설치를 허가하여 주지 않는데 있었음으로, 대학설립의 허가를 포기하고 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하여 그의 포부를 실현할 결심을 굳혔다. 당시 보성전문학교는 1926년 뉴욕 주식시장의 주식가격 폭락을 발단으로 일어난 세계적 대공황과 이에 따르는 한국농촌의 궁핍 및 사이토총독의 가혹한 수탈정책 등으로 보성재단에 참가하였던 한국인 지주들이 몰락하게 되자 보성재단은 심한 재정난에 빠져 학교경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199)普成財團의 분규 및 재정난은 1925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朝鮮日報≫, 1925년 12월 3일). 이에 김성수는 1932년 추수 5천 석 이상 수확되는 토지를 출연하여 경영난에 봉착한 보성전문학교를 협조함과 동시에 서울 시외 안암동에 교사를 신축하였다. 또한 1935년에는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 金 3천원으로써 普成 30周年記念事業으로 대강당과 도서관을 세우는 등 보성전문학교를 민족주의의 정신을 가진 튼튼한 기반 위에 구축하였다. 그러니 김성수는 민립대학기성회에서 달성하지 못한 일을 普專에서 달성한 셈이 되었다. 다시 김성수는 1940년경에 초지를 관철하여 보성전문학교를 한국 초유의 민립대학으로 승격시킬 것을 추진했으나 총독부는 이를 허락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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