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4. 교육구국운동의 추진
  • 2) 구국교육운동의 실태
  • (1) 사립학교의 설립

(1) 사립학교의 설립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고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의 침탈 위기가 높아지면서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애국적 인사들이 교육사업에 종사하거나 교육단체를 조직하여 교육운동은 구국운동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통감부 설치 이전에 나타나고 있었다. 1905년 嚴柱益이 養正義塾을, 李容翊이 普成學校를 세운 것도 국권수호를 위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구국교육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교육단체로는 1904년 9월 설립된 國民敎育會를 필두로 각 지역에 연고를 둔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이들 학회들은 교육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는데 그 목표를 두었다. 1906년 10월 朴殷植 등 10여명의 발기로 설립된 西友學會의 창립 취지문에서도208)≪西友學會月報≫, 창간호<本會趣旨書>, 1906년 12월 1일. 청년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국권의 회복과 인권의 신장에 기초가 됨을 밝히고 있다.

 한편 서우학회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추진함에 있어 교사의 양성이 절실하자 西友師範學校라는 명칭으로 속성사범과 야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때 초대교장으로 취임한 박은식이 사범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이 국가존립의 기초임을 천명하고 있다.209)≪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16일.

 당시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려는 애국지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학회는 앞의 국민교육회나 서우학회와 함께 大韓自强會·漢北興學會(뒤에 서우학회와 통합하여 西北學會가 됨)·皇城中央會·湖南學會·嶠南敎育會·大同學會·女子敎育會·太極學會·大韓興學會·大韓同寅會·大韓學會·關東學會·輔仁學會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여 그 운동을 전국으로 확대하였으며 각 곳에서 강연회나 토론회를 개최하여 국민을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각 학회들은 기관지를 발간하여 국권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신학문을 소개하는 등 국민계몽에 노력하였다. 학회에서 발간한 기관지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大韓自强會月報≫·≪西友≫·≪西北學會月報≫·≪畿湖興學會月報≫·≪大韓協會月報≫·≪湖南學會報≫·≪大韓興學會報≫등이 있다.

 이들 학회들이 주력한 것은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으며, 교육침략을 통한 식민지 지배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통감부에서는 이들 학회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학회령을 발표하여 구국교육운동을 막으려 하였다.

 당시 학회의 구국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학교경영과 교육사업 및 국권수복에 앞장섰던 상황을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학회라는 것도 요즈음에 와서 그 설립이 점차 많아져, 그 이름은 학회이나 사실은 정치상·사회상의 운동을 주로 하며, 교육사업을 從으로 하여 정치와 교육과를 혼동하는 폐단이 심하므로 학회령을 발포하여 각각 설립 인가를 학부대신에게 받도록 하며, 또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엄금하였다(일본외무성,≪일본외교문서≫권 42-1, 1909년 8월 30일, 190쪽).

 학회의 設學運動에 따라 각지에 학교가 설립되고 있는 상황을 黃玹은 그의≪梅泉野錄≫에서 “학교와 사회단체가 나라 안에 가득하였으며 특히 관서지방의 설학 운동이 왕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210)黃 玹,≪梅泉野錄≫권 5, 광무 11년 3월 16일. 또한 당시≪황성신문≫이나≪대한매일신보≫에서도 이와같은 학교의 설립이 自主獨立과 國權恢復의 길임을 주장하며 국민들이 이에 대해 물심 양면으로 협조할 것을 요청하는 기사와 논설을 자주 게재하고 있다.

 ≪황성신문≫은 우리 나라가 약해지게 된 이유를 시세의 변화에 관심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면서 유지들이 구국의 정신으로 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커다란 다행이며 이를 국민들이 적극 협조해야 할 것임을 호소하고 있다.211)≪皇城新聞≫, 1906년 3월 24일.

 한편≪대한매일신보≫에서도 교육운동을 구국운동으로 규정하면서 학교가 크게 일어나는 것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귀중한 일이라고 하면서 교육을 통해서만이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음을 강조하고 국가의 자유독립을 위해 학교를 많이 세워 교육을 진흥시킬 것을 호소하고 있다. 학교가 크게 일어나는 것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귀중한 일이라고 하면서 학교 설립을 주장하고 있다.212)≪大韓每日申報≫, 1906년 1월 6일.

 학교 설립과 교육활동 등 사립학교의 구국교육운동을 자주 소개한 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에는 거의 매일같이 학교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다. 이들 신문은 수시로 학교설립과 전국적 또는 지역별 학교 숫자를 알리고 있다. 두 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중심으로 학교의 설립상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906년에 인가를 받고 설립한 사립학교는 63개교였으며,213)≪皇城新聞≫, 1906년 12월 19일. 평안북도 龜城에서는 1906년 9월 현재 학교 22개교에 학생수 1,387인, 교사는 22인이었다.214)≪大韓每日申報≫, 1906년 9월 23일. 또한 1907년 4월 학부에서 전국 각지에 설립된 관공사립학교를 조사하였는데 1896년까지 설립된 관립학교는 19개교이며, 1897년 2월부터 1904년 12월까지 공립이 51개교, 1898년 12월부터 1907년 4월까지 사립학교가 183개교라고 보도하고 있다.215)≪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11일.

 이와 같은 구국교육운동의 전개에 대하여 일본인들도 우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통감부측의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구국교육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주시하면서 이들 사립학교의 교육활동이 조련과 불량교과서 사용, 불온한 사상 주입, 정치와 교육의 혼동 등이 전국적으로 크게 번지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216)高橋濱吉,≪朝鮮敎育史考≫(帝國地方行政學會 朝鮮本部, 1927), 298쪽.

 이와 같이 학교의 설립이 크게 늘어나고 민족교육이 확대되어 가자 이를 억제하고 통제와 간섭을 강화하려는 통감부의 교육침략정책이 사립학교령의 발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사립학교령에 의해 학교 설립을 억제하려고 하였으나 사립학교령의 규제범위 안에서라도 많은 학교들이 설립인가를 신청하고 있었다.

 1908년 10월 1일 이전 학부에서 인허한 사립학교는 326개였는데217)≪皇城新聞≫, 1908년 11월 6일. 1909년 5월에는 旣設學校를 포함하여 인가청원 학교가 1,824개교이였다. 이 중에 인가된 학교가 337교, 거부된 학교는 930교, 나머지는 심사중이었다. 10일 후에는 신청학교 1,909개교에서 인가된 학교가 459교였으며 다시 13일 후에는 1,976교의 신청에 774개교가 인가되고 있다.218)≪皇城新聞≫, 1909년 5월 16일, 6월 9일. 이 숫자는 계속 증가하여 1909년 9월에는 인가학교가 1,852교가 되었으며219)≪皇城新聞≫, 1909년 9월 21일. 1910년 7월 말 현재 한국 내의 각급 학교의 총수는 2,237개교였다.220)≪官報≫, 융희 4년 8월 13일과≪대한매일신보≫1910년 8월 7일에 당시 도별로 각급 학교의 통계가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다.

도별 관공립학교 사립학교(종교학교포함)
한성부 19 94 113
경기도 19 183 202
충청북도 6 47 53
충청남도 7 86 93
전라북도 8 75 83
전라남도 14 40 54
경상북도 9 141 150
경상남도 13 98 111
황해도 9 251 260
평안남도 11 417 428
평안북도 10 367 377
강원도 9 37 46
함경남도 14 189 203
함경북도 7 57 64
155 2082 2237

그러나 많은 학교들이 사립학교령이 규정한 규모에 미치지 못하여 신청하지 않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신청을 하지 않은 학교도 다수 있었으므로 실제의 사립학교는 인가된 학교수의 두 배가 넘는 5천여개교나 되었다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견해이다.221)사립학교령에 제시된 학교인가 신청에 필요한 구비요건은 다음과 같다.
학교의 목적 및 명칭, 위치, 학칙, 校地와 校舍의 평면도, 1개년의 수지예산, 유지방법(기본 재산이나 기부금에 대한 서류첨부), 설립자와 학교장 및 교원의 이력서, 교과용 도서명 등.

 1909년 11월 당시 지방의 교육실태를 충청남도의 예에서 보면 보통학교의 경우 공사립을 합하여 112개교이며 학생수는 5,472명이고 교사는 330명이었다. 특히 서당이 686개소나 되고 학생수가 4,096명이며 종래 학습하던 한문과 습자 이외에 본국사와 지지를 함께 가르치고 있었다.222)≪皇城新聞≫, 1909년 11월 13일.

 당시 서당은 학교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또한 그 교육내용 가운데 근대학교에서 교육하는 과목이 포함되었고 특히 그 과목이 애국심을 기르기 위한 본국사와 지지인 것으로 보면 당시의 교육이 민족운동 또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충남에서 예시된 서당의 현황이 다른 지방에서도 비슷하다면 구국교육운동의 폭이 더욱 넓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