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4. 교육구국운동의 추진
  • 2) 구국교육운동의 실태
  • (2) 설학취지문의 검토

(2) 설학취지문의 검토

 이들 사립학교의 설립이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은 학교 설립의 목적을 나타낸 ‘設學趣旨文’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설학취지문은 특히 1905년 이후 설립된 학교들의 학교 설립의 목적과 교육이념 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를 발표함으로서 국민들에게 나라의 형편과 일본침략의 실상을 알게 하고 나아가 국민들에게 애국정신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설학취지문이 가장 많이 발표되는 시기는 1908년으로, 이후에는 감소되고 있으나 이는 통감부가 사립학교의 설립을 통제하여 구국교육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사립학교령을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1905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들도 이 시기에 설학취지문을 발표하고 있다.

 설학취지문은 그 명칭이 취지서 또는 취지문이라고 하였거나 단지 취지라고 한 학교도 있다. 이미 설립된 학교를 확장하거나 중건하는 경우에 확장취지문 또는 중건취지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설학을 알리면서 학교에 나와 공부할 것을 권하는 권고서 또는 권유문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설학취지문에 나타난 설학이념을 대체적으로 애국심의 고양, 인재의 양성, 民智의 개발과 문명의 발달, 국권의 회복 등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국권의 회복이다. 이는 당시 한민족이 전개하고 있는 민족운동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서 구국교육운동의 방향이 국권의 회복이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권회복의 내용 속에는 나라의 부강 또는 독립의 기초를 확립하는 의미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취지문에 제시된 표현을 보면 ‘國祚中興’, ‘國力之挽回’, ‘國權을 重恢於列强之中한다’, ‘自修自强之法은 設學에 있을 뿐이다’, ‘救國救民이 唯有敎育一道耳’, ‘國勢之振이 敎育에 따른다’, ‘振興國勢’, ‘回復主權하고 脫去羈絆한다’, ‘國權의 恢復과 生命의 유지’, ‘學校는 富强之礎’, ‘列强과 어깨를 겨누고 國基를 鞏固히’, ‘我韓獨立之基本이 實惟在敎育’, ‘退縮된 國步와 墜失된 人權을 挽回’, ‘나라의 독립의 회복’, ‘國家富强을 이룩하고 獨立之國으로 發展’, ‘挽回我獨立之權’, ‘尊國復權’, ‘復國權之策이 敎育의 發達에 있음’, ‘獨立自由自强之基礎’ 등으로 표현은 각각이나 그 의미는 비슷하다.

 애국심의 고취를 강조하는 내용에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국민의 의무라고 하면서 학교교육이 이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충군애국으로 표현한 것이 많으며 학교 설립 자체를 애국의 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애국심의 고취에 포함된 내용에는 ‘조국의 정신을 환기시킨다’, ‘조국정신을 각성하여 뇌수에 관통시킨다’, 애국심의 고양’, ‘애국정신의 고양(또는 배양)’, ‘국가정신의 고양’, ‘충군지심을 목적으로 한다’, ‘자국의 정신을 기른다’, ‘애국사상을 기른다’, ‘조국의 사상과 정신을 고취한다’ 등의 표현이 있다. 이는 당시의 교육이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당시 교육을 애국교육이라 표현한 것과 직결된다.

 인재의 양성은 교육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강조되고 있다. 즉 옛부터 국가에서는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해 왔으며 그러므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국가의 발전을 이끌어 가야 할 인재의 양성은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어떠한 인재를 양성하는가를 살피는 것은 당시의 시대가 요청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인재양성에 대하여 각기의 취지문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학문을 교육받는 것이다. 서양의 나라들이 부강하게 된 것을 학교가 발달하고 신학문을 교육받은 때문으로 파악하고, 우리도 이와 같이 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열어 나가고 밝은 덕을 길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지능을 계발하고 덕성을 함양하며 건전한 체육을 통하여 人道에 득달하며 善良完美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인재라 할 수 있고 이들이 사회를 개명하고 국가에서 필요로 할 때 쓰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당시의 바람직한 인간상은 신학문을 배워서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덕성이 있으며 건전한 몸과 정신을 지닌 사람으로, 국가가 필요로 할 때 봉사하고 부강하는데 앞장설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한편 인재의 양성과 함께 ‘문명의 발달’이나 ‘民智의 개발’을 함께 제시하기도 하였는데 ‘人才養成 開發新智’ 또는 ‘英才를 키우고 문명을 발달하게 함’이나 ‘培養人才 開發民智’ 또는 ‘人才의 養成 愚民의 開明’이나 ‘人才養成 民智開發’ 등의 주장은 그 예이다. 民智의 개발이나 인재의 양성도 그 궁극적 목표는 국권의 회복이지만 방법적인 의미로서 그러한 표현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취지문이 국권의 회복을 중심이념으로 하면서 특히 인재양성과 애국심의 고양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설학취지문을 통해서 당시 한민족이 추구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념이 국권회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당시 구국교육운동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223)設學趣旨文은≪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것을 대상으로 검토한 것이다. 검토 내용은 다음의 논문에 상세히 제시되었다(金興洙,<韓國近代民族私學의 成立과 敎育內容에 關한 硏究>,≪歷史敎育≫50, 1992). 한편 설학취지문은 당시 민족내부에서 나타났던 근대 교육과 전통 교육의 갈등적 측면과 함께 이의 조화를 이루려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취지문에서는 일반적으로 근대 교육을 신교육으로 표현하고 이를 新學 또는 신학문으로, 전통 교육을 舊學 또는 구학문으로 표현하였는데 대체로 그 구체적 내용은 經傳을 지칭하였으나 도덕이나 예절 또는 舊習이라고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신학은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으로 時務之學이며 기술학문, 또는 실학을 의미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역사·지리·산술·이과·외국어·법률 등의 과목을 지칭하였다.

 취지서 가운데는 신교육이 필요한 이유로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부강하고 발전하게 된 것이 신교육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여 우리가 뒤떨어진 것은 구습에 젖어 신학을 연구하지 못하니 인재가 위축되고 백성들의 지혜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학교에 입학하여 당세에 쓸모있는 교육을 받아 뒷날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될 것을 말하여 신교육을 ‘當世有用之敎’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224)≪皇城新聞≫, 1906년 5월 9일, 잡보<維校請捐書>.
≪皇城新聞≫, 1907년 5월 24일, 잡보<樂一學校趣旨書>.
이상 각각의 학교는 咸北 端川 維新學校와 慶北 靑松 樂一學校이다.

 또한 아직 구습이 많이 남아 있어 신학에 대해 알지 못하니 부형된 자는 고루한 옛 생각을 버리고 개명한 신학문을 열심히 가르치라고 권고하여 구학을 고루한 것으로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구교육의 결점은 진화에 부적하고 투기에 불합하여 無用의 徒勞에 그칠 뿐이며 신교육은 만고의 학을 참고하고 만국의 장점을 취한 최신의 학문이므로 이의 교육은 피치 못할 국민의 의무라고 주장한 것도 있다.225)≪皇城新聞≫, 1908년 6월 3일, 잡보<대숭학교 설립취지서>.

 이처럼 구교육을 고루하고 비실용적인 것으로 보고 세계가 발전하고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구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면서 구교육을 배척하는 취지서가 있었으며, 이러한 계통의 사람들은 경서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교육을 그대로 실시하고 있는 私塾의 철폐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일부 유림이나 의병이 학교 설립을 반대하거나 학교를 파괴 또는 소각하였던 일과 대립된 것으로서 근대 구국교육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보이고 있었던 신구교육의 갈등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시 국내에는 아직 근대 민족교육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보수적인 유림을 중심으로 일부 계층의 인사들이 전통 교육을 고집하면서 교육운동을 방해하는 일이 상당히 광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민족교육운동을 방해하는 이유중에는 당시 근대 교육이 일본침략을 조장한다고 생각하는 애국적인 사람들이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근대 교육을 방해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와 함께 학교의 재원을 둘러싸고 관계자 사이에 이해가 대립되어 나타나는 분쟁도 비일비재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학교 설립을 명분으로 기부금을 강요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학교 재원으로 귀속된 마을의 공동재산을 학교 관계자가 유용하여 분쟁과 소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은 통감부가 사립학교를 간섭하는데 좋은 구실을 주어 마치 사립학교 설립이 기부금 재원을 유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파악하기에까지 이르렀다.226)이는 사립학교령 발표 직후 지방 시찰에 나선 당시 학부대신 李載崐이 “학교설립을 빙자하여 재단에 뜻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 이를 유감으로 여기는 바”라고 언급한 데서 알 수 있다(≪황성신문≫, 1908년 11월 15일).

 한편 학교 설립을 반대하고 이를 방해하는 움직임은 일부 의병부대에서도 이루어졌다. 즉 신교육의 추진을 일제의 침략으로 이해하는 일부 보수적 경향의 의병의 행동이 있었다. 南宮檍이 1906년 강원도 양양에 세운 현산학교에 의병들이 진입하여 학교를 불태웠으며, 1907년에는 충북 단양군에 있는 사립보통학교의 교감 오면상을 살해하였고, 경북 순흥군에는 의병 5∼6백명이 소흥학교의 건물과 집기를 불태운 적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 한국사회의 격변기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반침략적 민족운동과 근대 민족교육의 전개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신구 사회이념의 갈등현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교육적 움직임은 시대적 흐름으로 전개된 근대 민족교육의 구국교육운동으로의 확대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구교육을 名과 實 또는 表와 裏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양자를 잘 조화시켜 교육의 성과를 크게 해야 한다는 취지서도 있다. 즉 신교육이 구교육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 교육이란 다만 옛날의 가르침에 더하여 사람의 지혜를 개진하게 하는 것이므로 옛 성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현실에 맞도록 신교육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227)≪皇城新聞≫, 1907년 8월 31일, 잡보<관동학교 취지서>. 또한 新과 舊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舊가 있어야 新이 있고, 新이 있어야 舊가 있는 것이면서, 舊學은 新學의 근본이며 신학은 구학을 보다 발전시킨 것이니 신구학은 서로 표리가 되고 명과 실이 되어야만 학문이 될 수 있고 문명교육의 본뜻을 얻게 된다고 하여 신구교육을 같이 이끌어 나갈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228)≪皇城新聞≫, 1907년 9월 22일, 잡보<壽昌學校 趣旨書>.

 이처럼 신구교육을 대립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상호보완 및 협조적인 차원에서 통합하여 교육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신구교육의 대립적 내지 갈등적 표출로 일어날 수 있는 민족 내부의 분열을 막아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고 민족의 역량을 증대시키려는 민족적 자각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서양의 문명을 수용하여 문명부강해야 되고 이를 바탕으로 국권을 수호할 수 있다는 인식이 그 바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신구교육의 조화가 이루어짐으로 해서 근대 민족교육의 내용 속에 전통교육의 요소가 남아 있으면서도 신문명을 수용하는 교육내용이 구성되어 민족교육의 전통이 형성되었으며, 구국교육운동의 전개에 있어 민족적 추진력을 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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