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4. 교육구국운동의 추진
  • 2) 구국교육운동의 실태
  • (3) 간도지역의 민족교육운동

(3) 간도지역의 민족교육운동

 국내에서 전개된 구국교육운동은 당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수호 내지 민족독립운동의 기지로서 한민족 이주민의 중심지로 성장해 간 간도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延吉과 龍井에서도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19세기 후반 이후에 계속된 흉년과 과중한 징세를 피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이주해 온 한국인들은 연길과 용정 일대에서 간도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229)≪조선족약사≫(연변인민출판사, 1989), 13∼15쪽.

 이러한 경제적 조건으로 한국인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이주하는 숫자가 많았으며 이는 1905년 이후 민족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 되었다. 그리하여 1905년 이후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이 단순한 경제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이주가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연길과 용정은 간도지역의 한민족 거주지의 중심이면서 민족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연길과 용정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구국교육운동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연변지역에서 한국인 근대학교가 출발한 것은 1905년 대한제국정부에 의해 개교한 北墾島公立小學校이다. 즉 1905년 3월 학부에서 吳在英·金容洽·金聲振·崔定鉉·朴秉輝·盧承龍·李南燮·金重經 등 8명의 부교원을 북간도공립소학교에 임용하였다.230)≪官報≫, 광무 9년 3월 17일.

 당시 국내에서도 각지의 공립소학교에 해당지역의 인사로 부교원을 임용한 것으로 미루어 북간도공립소학교에 임용된 부교원도 현지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간도공립소학교가 개교한 사실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의 관할권을 둘러싸고 청국정부와 대한제국정부 사이에 마찰이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대한제국이 간도지역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려는 의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231)당시 대한제국정부에서는 이 지역 한국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1902년 李範允을 시찰원으로 파견하였으며, 이범윤은 이주한국인의 실태를 파악하고 한국인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의 필요성을 고종황제에게 상주하기도 하였다. 군대파견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1903년 대한제국정부에서는 墾島管理使를 설치하기로 하고 이범윤을 관리사로 임명하였다. 이범윤은 한인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이를 훈련시켰다. 이에 청국정부는 한국의 간도관리사를 소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 문제는 양국 사이의 외교문제로 확대되었다. 이 문제는 쉽게 종결이 나지 않다가 러일전쟁 때문에 잠정적으로 보류되게 되었다.

 한국인의 근대학교가 설립된 일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일본인들이 1906년 초 통감부에서 간도파출소를 두었으며, 간도파출소의 일본인들이 李相卨이 설립한 용정 瑞甸書塾의 애국교육을 방해하기 위해 그 터를 사서 이 곳에 1908년 간도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정도이나232)≪延邊文史資料≫권 5(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1988), 3쪽.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정부에서 관계된 공립학교로는 북간도공립소학교가 1905년에 이미 개교한 바가 있다.

 북간도공립소학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또한 청국으로부터 한국인을 보호하기 위한 주권행사의 의미가 있는 학교로서 연변지역 최초의 근대민족교육기관의 성격을 갖고 있다. 북간도공립소학교의 교육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나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역사적 성격으로 보아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사와 지리 등 애국교과가 중시되었을 것이며, 이는 구국교육운동의 테두리에서 설립되는 서전서숙과 明東學校의 교육내용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233)金興洙,<중국 연변조선족의 근대민족교육에 관한 연구>(≪國史館論叢≫64, 國史編纂委員會, 1995).

 이 지역에서 전개된 구국교육운동은 한국에서 이주해 온 반일애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사립학교를 설립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인들은 이주하여 정착이 이루어지면 후세들의 교육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서당형태의 사숙으로 그 규모도 작고 교육내용도 옛날식의 한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점차 근대적 교육으로 바뀌어 갔다. 또한 망명해 오는 애국지사들이 학교운영에 참여하게 되면서 본국에서 전개되는 구국교육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고취시켜 항일투쟁의 역군을 키우는데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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