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4. 교육구국운동의 추진
  • 2) 구국교육운동의 실태
  • (4) 역사교육의 확대

(4) 역사교육의 확대

 사립학교의 구국교육운동에서 두드러진 것은 교육내용에서 통감부가 관공립학교를 통하여 축소 또는 폐지하고 있었던 본국사 등 애국교과의 교육이었다. 학교의 설립이 일제의 침략을 막아 내고 국권을 수호할 수 있는 자주독립정신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본국사교육이 중요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이는 또한 이 시기의 사립학교교육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906년 이후 관공립학교에서 역사교육이 축소되거나 삭제되고 있었던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역사 특히 본국사교육을 중요시하고 이를 강조한≪황성신문≫은 1908년 3월 20일자에 ‘朝鮮魂이 稍稍遠來乎’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게재하여 국사와 함께 본국지지와 국문을 국가 또는 민족의 혼으로 보고 이의 교육을 통해 國魂을 길러 나라의 독립부강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교과목의 명칭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관립학교에서는 역사로 표시하고 있었으나 많은 사립학교에서는 본국사, 만국사 또는 외국역사 등으로 표시하였으며 실제로 사용하는 교재이름을 과목의 명칭으로 나타낸 곳도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과목명칭은 역사로 표시하면서도 학년별로 그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대개 특정지역이나 특정시대의 역사로 세분하여 제시하였다. 이를 몇 개 학교의 예로 들어 보면, 배재학당에서 1908년 3월 당시 시간표에 1학년에서 한국역사, 2학년에서 동양역사, 3학년에서 세계역사, 4학년에서 한국역사를 배정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8년 중등과에서 본국역사, 고등과에서 만국역사·근세사·상고사·영국사로 분과하여 교수하였으며, 1903년에서 1909년 사이에 정신여학교에서는 “신앙인의 사표를 길러 내기 위하여 성경에 주력하였고, 일반인의 모범이 될 정신교육에 치중하기 위해 역사를 중히 여겼다”234)≪貞信75年史≫(1962), 118쪽.고 하였다. 1908년 대성학교에서는 예비과에서 東國史略, 1학년에서 동서양역사(상), 2학년에서 동서양역사(하), 3학년에서 역사과목으로 표시하였다.235)≪大韓每日申報≫, 1908년 10월 6일. 1910년 경신중학교에서는 1학년에 본국사, 2학년에서는 중국, 일본과 인도를 포함한 동양사, 3학년에서는 서아시아와 그리스, 로마의 상고사, 4학년에서는 유럽의 상고사와 근세사를 그 내용으로 하였다.

 사립학교에서 역사과목이 중요시된 것은 한국인의 자주독립정신을 양성하는데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관공립학교는 일본인 교사들이 배치되어 일어를 필수과목으로 교수하였으므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의심하여 관공립학교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236)李萬珪,≪朝鮮敎育史≫하(을유문화사, 1947), 85쪽.

 사립학교에서의 역사교육에 대한 관심은 각급학교의 입학시험과목에 역사과목이 포함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1906년 이후 사립학교의 입학시험에서 역사과목의 명칭으로 제시된 것을 보면 역사·본국역사·내외역사·내외국역사·동국역사·내국역사·본국지지역사·본국역사지리 등이다.

 사립학교의 입학시험에서 역사과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관립학교인 고등학교나 사범학교에서 입학시험과목에 역사과목이 제외된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관공립학교의 입학시험에 일어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데 반하여 사립학교 증 상당수의 학교에서 일어가 제외되었던 것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의 교과목의 명칭은 대부분 보통학교령에 규정된 교과목과 거의 같다. 학교마다 가르치는 교과목이 동일하지는 않으나 사립학교의 경우 역사 또는 동국역사로 교과목을 표시한 학교가 상당수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사립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역사교과서의 간행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1906년 이후 관공립초등학교에서 사실상 역사시간이 삭제되었으며, 통감부에서 간행하는 교과서에 역사교과서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간에서 개인의 손으로 역사교과서가 간행되었다. 1906년부터 통감부가 교과용도서 검정제도를 실시하게 되는 1908년까지 2년 동안에 민간에서 간행된 역사교과서는 다음과 같다.

교과서명 편저자 간행연도
동국사략(중등교과) 현 채 1906년 10월
대동역사략 국민교육회 1906년 6월
신정동국역사 원영의, 유근 1906년 12월
대한력 오성근, Hulbert 1908년 1월
초등본국역사 유 근 1908년 4월
대동역사략 유성준 1908년 4월
초등대한역사 정인호 1908년 7월
초등대한력 조종만 1908년 8월

 물론 이들 교과서는 교과용도서 검정제도가 실시되면서 검정무효 또는 학부 불인가도서로 분류되어 어느 학교에서도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제를 받았으며 발매와 반포금지 도서로 압수되기도 하였다.

 사립학교의 역사시간에 역사교과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소학교과서는 역사교과서의 대용이 되었다. 이는 1906년 통감부에서 제정한 보통학교령시행규칙에 보통학교에서 역사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고 독본시간에 교수한다고 하였으므로 소학교과서가 역사교과서를 대신하기도 한 것이다. 이 소학교과서를 대표하는 것이 1907년 6월 玄采가 지은≪幼年必讀≫이었다.

 ≪유년필독≫은 당시 사립학교에서 역사교육이 구국교육운동의 방안이었음을 알려 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2책 4권으로 된 본서는 국한문 혼용이지만 한자 옆에는 한글을 병기하여 남녀노소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초등용으로 편찬되었으나 그 내용은 다른 초등용 교과서에 비해 수준이 높은 편으로 이는 초등용 교과서뿐 아니라 일반인도 읽게 하려는 편찬자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237)玄 采,≪幼年必讀≫권 1, 凡例.

 1908년 통감부에서 그 동안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는 구국교육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과용도서 검정제도를 실시하게 된 가장 중요한 배경은 본국사교과서가 애국교육 및 민족교육의 일환으로 사립학교에서 구국교육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교과서를 교육현장에서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구국교육운동의 주요 내용이었던 역사교육은 역사인식과 역사서술의 방법론에서 아직 전시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면은 있으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의 애국심이 국권수호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하도록 그 기반을 제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1907년 당시 일본의 중의원 의원이었던 오다케(大竹貫一)의 한국교육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평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육의 실정이 어떠한가 하면 한국의 언어로 소학교 교과를 만들고 있다. 그뿐인가 그 내용은 대단히 재미있는 내용이 많이 있다. 즉 충군이니 애국이니 자주독립이니 하는 말이 진지하게 교육되고 있다(≪帝國會議誌≫2510, 1907년 2월 3일, 大竹貫一의 발언).

 이는 당시 사립학교의 교육 실정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통감부의 교육침략은 바로 이러한 면을 그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1908년 제정한 사립학교령은 바로 사립학교의 역사교육에서 강조된 애국교육을 막으려는데 주안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사립학교령을 제정할 당시 통감부의 사립학교에 대한 방침을 설명하기 위하여 당시 일본인 학부차관 다와라 마고이치(俵孫一)가 한성부내 사립학교 및 학회 대표자를 소집한 자리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연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학교교과서에 부적당한 것이 많이 있다. 다수의 사립학교의 경우를 보건대, 그 사용하는 교과서에 부적당한 것이 적지 않다. 심한 경우에는 유해한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수가 많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슨 까닭으로 이것을 유해하다고 하는가. 이제 그 일례를 든다면, 교과서 가운데 현시의 정치문제 또는 사회문제를 편찬한 것이 많음을 본다. 즉 한국 정부의 상황을 분개하는 기사를 편찬하고, 현시 한국정부의 상태를 변경하려면 각인이 피로써 이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같은 문자를 散見한다. 이것이 학교 교과서로서 과연 적당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한국의 장래를 위하여 과연 무해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학부,<學部次官演說筆記>, 1908, 5∼13쪽).

 통감부의 일본인들은 사립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가 한국의 현실정치 사회문제를 다룬 내용이 많고, 이는 학생들이 학문연구에 지장을 줄 뿐이며 한국이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한국의 발전을 위하여 이를 바로잡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무너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괸심을 가지는 것은 한민족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서 이를 논의하는 것은 역시 필연적인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학생들의 활동을 소요라고 하면서 浮華輕佻하고 불평을 일삼는 것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결국 이의 원인이 교과서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학부차관 다와라는 사립학교령이 교과서를 규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새로 중점을 교과서에 두었다. 사립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과서 가운데 심히 불량한 것, 한국의 현상에 비추어 심히 위험한 것이 매우 많다. 이에 대하여 사립학교령은 상당히 취체를 엄중히 하여 한국의 國是, 國情 또는 進運에 부합되지 않는 교과서는 절대로 구속하고 학부 편찬 또는 검정 이외의 도서에 대하여는 사용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학부,<學部次官演說筆記>, 1908년, 5∼13쪽).

 결국 일제는 숫적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의 사립학교에서 그들의 침략정책에 반대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교과서의 사용을 중지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애국심을 배양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던 역사교과서는 대부분 사용이 금지되거나 또는 압수, 소각되는 피해를 보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