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4. 교육구국운동의 추진
  • 2) 구국교육운동의 실태
  • (5) 체육교육의 보급과 운동회의 개최

(5) 체육교육의 보급과 운동회의 개최

 한국에 근대적인 체육교육이 시작된 것은 1895년 정부가 근대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근대 민족교육이 발전하게 되는 시기이다. 체육은 體操라는 과목 명칭으로 한성사범학교와 소학교의 교과목으로 등장하였으며 이후 설립되는 각급 학교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다.238)≪官報≫, 개국 504년 7월 24일, 학부령 1호<漢城師範學校規則>·<漢城師範學校附屬小學校規程>.
≪官報≫, 개국 504년 8월 15일, 학부령 3호<小學校校則大綱>.

 소학교교칙대강이 제시한 체조과목의 요지는 “신체의 성장을 균제건강케 하며 정신을 쾌활강의케 하고 겸하여 규율을 지키는 습관을 기른다”는 것으로 그 내용은 최초에는 적의한 유희를 하게 하고 점차로 보통체조를 가하되 편의한 兵式체조의 일부를 가르치고(심상과), 이후 병식체조를 주로 가르치도록(고등과) 하였다. 한성사범학교규칙에서는 그 정도를 ‘보통체조 및 병식 체조’라고 밝혀 놓았다. 보통체조와 병식체조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체조가 중요시되었음은 한성사범학교의 교육요지에서 알 수 있다.239)≪官報≫, 개국 504년 7월 24일, 학부령 1호<漢城師範學校規則>13조. 한성사범학교의 교육요지는 1895년 2월에 발표된 교육입국조서에서 德養·體養·智養을 교육의 綱紀로 삼는다고 한 것과 연결되고 있다.240)≪承政院日記≫, 고종 32년 2월 2일.
≪高宗實錄≫, 고종 32년 2월 2일.
≪官報≫, 개국 504년 2월 2일, 조칙<敎育에 關한 件>.

 즉 체육은 신체의 건강과 함께 떳떳한 기상을 기르며, 어려움을 참고 근면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정신력을 기르는데 목표를 두었다. 이와 같은 체육교육의 목표는 각급 학교의 체조시간이 국민체력을 증진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운동의 추진과 민족의 단결을 이룩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더욱이 애국지사들 가운데는 나라의 쇠약이 문약에 의한 것이라는 판단아래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씩씩한 尙武的 기상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체조시간에 군대식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이것이 병식체조로 불리어졌다. 이러한 군대식 체조교육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전개된 것으로 체조교사는 무관학교에서 양성하였으며,241)1896년 1월 11일 정부에서는 武官學校官制를 공포하여 군대의 훈련과 함께 체조교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1904년에는 陸軍硏成學校에서 6개월의 이수과정으로 체조검술과를 부설하여 학교병식체조의 지도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육군연성학교 교장은 뒷날 독립운동에 투신한 대한제국 육군 正領 盧伯麟이었다.

 당시 학교의 체조시간을 통해 전개된 체육의 성격은≪西北學會月報≫에 게재된 내용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서북학회 회원인 李鐘滿이 ‘체육이 국가에 대한 효력’이라는 제목에서 체육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다.242)李鐘滿,<體育이 國家에 대한 效力>(≪西北學會月報≫2-15, 1908. 8), 27쪽. 결국 국가의 자강하는 길은 국민의 체육을 통한 건강한 신체가 그 필수 요인이라는 것이며, 더욱이 필자는 체육은 智育이나 德育에 앞서고 국가에 대한 효력이 이와 같으니 당국은 국가를 위하여 체육을 국민교육화하여 의무적으로 확대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湖岩 文一平도 체육의 필요성을 특히 강조하여 체육은 덕육과 지육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신체가 있은 다음에 정신이 나오는 것으로, 마치 신체는 뿌리이고 정신은 가지라고 비유하였고 체조의 목적은 신체를 단련하여 정신을 발전시키는데 있으므로 체조는 개인의 정신에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운명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였다.243)文一平,<體育論>(≪太極學報≫2호, 1908. 5). 이와 같은 체육교육에 대한 인식은 朴殷植에게서도 보이고 있다. 그는 우리 나라의 전통교육이 지나치게 문약에 빠져 있었다고 하면서 학교에서 체육을 강화하여 강건한 인재를 육성할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민족언론인≪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에서도 학교의 체육교육에 대한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다수의 논설을 게재하고 각 학교의 체육교육에 대한 기사를 소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당시 학교의 체육교육이 국가자강의 길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학교의 체조시간은 단순히 율동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씩씩한 기상을 기르는 수단으로 군대에서 훈련하는 것과 같이 교사의 호령에 따라 전체 학생들이 질서있게 움직이고 행진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체육교사들은 무관출신으로서 의병운동에 참여하기도 한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학생들의 체조시간은 군대훈련의 일부로 인식되었으며 학교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나팔과 북으로 구성된 악대가 있어 이들이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며 학생들은 목총을 메고 군대식 훈련을 받았다. 때에 따라서는 학생들의 이러한 훈련이 길거리에까지 나와 많은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교외로 훈련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과 일본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일도 발생하였다.

 사립학교에서 체조시간을 학생의 정신력과 단결력을 기르는 것으로 운영한 구체적 사례를 대성학교와 오산학교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산학교에서는 눈이 쌓인 겨울에 기숙사의 학생들을 소집하여 눈위를 뛰도록 하였으며, 대성학교에서는 더운 여름날 뙤약볕 아래서 공부를 시키기도 하고 밤중에 비상소집하여 험한 계곡을 찾기도 하였다.244)朱耀翰,≪安島山全書≫(三中堂, 1963), 89쪽.

 체육교육을 통한 건강한 인재를 기르고 국민의 단결력을 키워 국가자강의 길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은 학교 내부에서 체조시간에 병식훈련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학부형과 주민들이 함께 참가하는 대운동회나 여러 학교가 모여 연합대운동회를 개최하는 일로 발전하였다. 운동회는 보통 일년에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연합운동회는 지역별로 가까운 학교끼리 모여서 실시하거나 또는 한 道內 각군의 학교가 모두 참가하는 큰 규모의 운동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그 경비는 주로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충당하였다. 인천의 각 학교가 모여 개최한 연합대운동회에는 주민들은 물론이고 술장수와 노동자나 심지어 기생들까지 운동회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였다. 이와 같이 연합운동회는 민족의 정신적 단결과 구국교육의 의지를 나타내는 대표적 행사였던 것이다. 연합대운동회는 사립여학교에서도 개최되었다. 1907년 5월 서울 장충단에서는 진명여학교의 嚴俊源 교장의 발기로 첫 번째 여학교연합대운동회가 열렸다.245)≪韓國女性史≫(이화여대 출판부, 1972), 319쪽. 한편 서울에서는 사립학교뿐만 아니라 관립학교도 포함된 연합대운동회가 연례행사로 열렸다.

 학교의 운동회는 학교별이든 연합운동회든 ‘대한독립만세’라는 구호를 제하고 독립가를 운동회 노래로 합창하였다. 운동회가 학생들의 정신적 단결과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한민족의 애국열정을 분출하는 구국운동의 성격이 뚜렷이 나타나면서 통감부에서는 운동회의 개최 자체를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의 관립과 사립학교가 함께 모여 열리던 연합대운동회는 1909년 4월 대운동회를 끝으로 통감부가 재정난을 내세워 폐지시켰다. 1908년 5월 친일 학부대신 李完用은 관찰사회의에서 운동회가 수업을 폐하고 경비부담으로 학부형이 괴로움을 당하는 등 교육에 해가 된다는 내용의 훈시를 하기도 하였다.246)高橋濱吉, 앞의 책, 137∼138쪽.

 일본인 학부차관 다와라는 평양에서 열린 연합대운동회를 보고 그 심정을 토로하면서 학생들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행진하는 것을 ‘무장적 시위’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통감부에서는 학교의 체조시간에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때에 따라서는 거리를 행진하기도 하고, 또는 야외연습이나 대운동회를 열어 많은 사람이 모이게 하는 것은 치안상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우려하면서 이를 문제삼기도 하였다.247)學部,≪韓國敎育의 現狀≫(1910), 44쪽. 한국의 민족교육을 억압하기 위해 통감부가 1908년 8월에 발표한 사립학교령에서 민족사학을 억압하는 구체적 내용 속에는 사립학교의 체육교육이나 연합운동회를 그 통제대상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었다.248)高橋濱吉, 앞의 책, 307쪽.

 이와 같이 학교의 체육교육이나 운동회가 민족을 단결시키고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정신을 키우는데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게 되면서 이러한 민족체육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체육단체의 조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체육단체는 1905년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1906년 3월 大韓體育俱樂部의 조직을 시작으로 皇城基督敎靑年會 운동부, 1907년 大韓國民體育會, 1908년 會同俱樂部를 비롯하여 大同體育俱樂部와 광학俱樂部 및 무도기계체육부, 1909년 대한흥학회 운동부를 비롯한 사궁회와 소년광창체육회 및 체조연구회, 1910년 청강체육부 등이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이들 체육단체들은 학생이나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체육활동을 보급시키고 학교체육이나 운동회 등을 후원하는 일을 하였다. 학회들의 체육활동에 대한 지원도 활발하였으니 대표적으로 서우학회나 서북학회는 서북지방을 비롯하여 서울이나 경기도지방에까지 학교의 운동회나 연합운동회에 필요한 상품을 제공하거나 기타 행사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구국교육운동의 주요한 흐름인 민족체육운동은 만주 각지의 한민족사회에서도 전개되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한민족 사립학교에서는 군사훈련과 다름없는 체육교육이 실시되었으며, 이는 독립군 전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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