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4. 교육구국운동의 추진
  • 2) 구국교육운동의 실태
  • (6) 애국가와 독립가의 보급

(6) 애국가와 독립가의 보급

 학생들을 중심으로 불려진 여러 가지의 애국가와 독립가는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북돋아 주었으며 이 시기의 민족사립학교의 구국교육운동의 전개에 있어 커다란 흐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사립학교 학생들이 체육 또는 체조시간에 학교 안에서나 또는 길거리에서 행진을 할 때 노래를 함께 불러 발을 맞추어 나갔다. 이 때 부른 노래들은 애국가나 군가 또는 독립가였다. 운동회에서 이들 노래들은 응원가로서 불리워졌고, 애국가나 독립가를 부르는 것은 불운한 국가의 운명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는 방법이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인에게도 전달되었다.

 한국의 근대학교에서 음악이 교과목으로 나타나는 것은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일부 선교계 사립학교의 교과목에 음악이 있었다. 예를 들어 1895년∼1903년 貞信女學校의 교과목은 성경·한문·역사·지지·산술·도화·습자·체조·음악·가사 등으로249)≪貞信75年史≫(정신여자고등학교, 1962), 83쪽.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선교계 학교에서는 성경이 교과목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찬송가가 불려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교과목에 음악이 포함되지 않았어도 찬송가를 통하여 새로운 서양음악이 유행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각지에 세워진 교회에서 불려진 찬송가는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새 음악이 유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선교계 사립학교의 교과목에 음악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은≪독립신문≫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독립협회에서 독립문의 기공식을 거행하는데 그 식순 가운데 배재학당 학생들이 독립가를 부르도록 되어 있었다.250)≪독립신문≫99호, 건양 원년 11월 21일. 학생들이 부른 노래에 대하여 조선가 또는 애국가라고 하였는데 다른 기사에서도 조선가를 부르고 또 식순에 따라 애국가를 불렀다고 하였다.251)≪독립신문≫100호, 건양 원년 11월 24일. 이 기사를 보면 1896년 당시 이미 학생들에게 불려지던 조선가와 애국가라는 노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배재학당 학생들이 독립가나 애국가 또는 조선가를 불렀다고 하였으나 1895년 이후 설립된 각급 관공립학교에서 교과목에 음악이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 보면 음악은 아직 정식 교과목으로 가르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배재학당 등 선교계 사립학교에서 또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합창하게 되면서 찬송가곡에 맞추어 가사를 만들어 불렀을 것으로 본다. 1896년의≪독립신문≫에는 많은 독립가 또는 애국가의 가사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들 가사들이 주로 8·8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에 맞는 곡으로 부른 노래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252)최일수,≪언론 학예 투쟁≫(민족문화협회, 1980)에는 당시의 창가를 찬송가의 번역시를 서양곡에 맞추어 부른 것, 8.8조의 애국가와 경축사, 민요와 가사, 매국노에 대한 격분과 애국심을 고취한 것, 저항적인 경세적 풍자시가와 타령조, 민족혼의 고취와 교훈적인 내용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독립신문≫에는 각지에서 보내 온 독립가 또는 애국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관리가 지은 것도 있다. 이들 독립가나 애국가의 내용은 애국충군과 부국강병 또는 애민애족을 나타낸 것이 대부분으로서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① 대조선 자주 독립 애국하는 노래(≪독립신문≫15호, 건양 원년 5월 9일)

아세아의 대조선이 자주 독립 분명하다 애야 에야 애국할세 나라 위해 죽어 보세 분골하고 쇄신토록 충군하고 애국하세 우리 정부 높여 주고 우리 군면 도와주세 깊은 잠을 어서 깨여 부국강병 진보하세 남의 천대 받게되니 후회 막급 없이하세 합심하고 일심되어 서세동점 막아보세 사농공상 진력하여 사람마다 주유하세

남녀없이 입학하여 세계 학식 배워보자 교육하여 개화되고 개화하여 사람되네

팔괘국기 높이 달아 육대주에 횡행할새 산이 높고 물이 깊게 우리 마음 맹세하세

 ② 인천 제물포 전경택 애국가(≪독립신문≫19호, 건양 원년 5월 19일)

봉축하세 봉축하세 아국 태평 봉축하세 즐겁도다 즐겁도다 독립 자주 즐겁도다 꽃피어라 꽃피어라 우리 명산 꽃피어라 향기롭다 향기롭다 우리 국가 향기롭다 열매 열라 열매 열라 부국강병 열매 열라 열심하세 열심하세 충군애국 열심하세 진력하세 진력하세 사농공상 진력하세 빛나도다 빛나도다 우리 국기 빛나도다 영화롭다 영화롭다 우리 만민 영화롭다 높으시다 높으시다 우리 임금 높으시다 만세 만세 만만세는 대군주 폐하 만만세 장성한 기운으로 세계에 유명하여 천하각국 넘볼세라

 위와 같은 노래들은253)이밖에도≪독립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양주 이중원 동심가(≪독립신문≫22호, 1896년 5월 26일).
금강 이교익의 글(≪독립신문≫25호, 1896년 6월 2일).
남서 순검 허일의 노래(≪독립신문≫25호, 1896년 6월 2일).
경무학도들 노래(≪독립신문≫44호, 1896년 7월 6일).
양성 김석하 독립문가(≪독립신문≫44호, 1896년 7월 6일).
경상도 봉화 신영택의 성절송축가(≪독립신문≫65호, 1896년 9월 3일).
평양학당 김종섭 애국가(≪독립신문≫66호, 1896년 9월 5일).
배재학당 학도 최영구 애국독립가(≪독립신문≫67호, 1896년 9월 8일).
평양 보통문안 이영언 애국가(≪독립신문≫68호, 1896년 9월 10일).
농상공부 기사 김철영 애국가(≪독립신문≫70호, 1896년 9월 15일).
인천 김기범 경축가(≪독립신문≫71호, 1896년 9월 17일).
농상공부 주사 최병헌 독립가(≪독립신문≫90호, 1896년 10월 31일).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본격적인 구국교육운동이 전개되면서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창가라고도 불린 이들 애국가 또는 독립가는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크게 애창하였으며 운동회에서도 응원가로 크게 유행되었다. 사립학교 학생들이 체조시간에 행진할 때는 군가를 부르며 정신을 통일하고 용기를 기르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윤치호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곡에 붙여 불렀는데 대한제국 이래로 행사가 있을 때는 물론 학생들이나 의병들이 가장 많이 부르던 노래로서 현재에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254)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의 후렴을 그대로 두고 가사를 고쳐 애국가를지었는데, 후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것이 현재의 애국가라고 전해지고 있다.

1. 성자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후렴)

2. 애국하는 열혈의기 북악같이 높고 충군하는 일편단심 동해같이 깊어

3. 이천만민 오직 한맘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상 귀천없이 직분만 다하세

4. 우리 나라 우리 님군 황천이 도우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이들 노래들은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국권회복 등의 사상을 담은 것이 거나 청소년의 기상을 불러 일으키고 자주와 독립을 달성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들이었다.

 1907년 玄采에 의해 간행된≪幼年必讀≫에는 학생들의 자유와 독립의 정신을 고취하는<獨立歌>와 閔泳煥의 순국정신을 기리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마음을 나타내는<血竹歌>가 실려 있어 이와 같은 노래가 유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55)玄 采,≪幼年必讀≫권 3·4.

<독립가 1>

독립하세 독립하세 우리 나라 독립하세 우리 청춘 소년들아 우리 나라 독립하세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어이하여 이지경 노예자취 이지경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어이하여 이지경 卑屈自甘 이지경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어이하여 이지경 淸俄믿다 이지경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어이하여 이지경 世事全昧 이지경 슬프고 분하다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독립가 2>

독립하세 독립하세 우리 나라 독립하세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어이하여 이지경 君臣相忘 이지경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어이하여 이지경 학정하다 이지경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어이하다 이지경 依附하다가 이지경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어이하여 이지경 사람없어서 이지경 슬프고 분하다 우리 대한 나라

어이하여 이지경 愚蠢하여서 이지경

 

<혈죽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우리 국민 슬프도다 國恥民辱 至今生存 우리 무리 무슨 面目

슬프도다 슬프도다 우리 국민 슬프도다 저버렸네 저버렸네 민충정공을 저버렸네 한칼로 殉國하던 精忠大節 그 靈魂 九原冥冥 저 가운데 우리 국민 굽어보네

슬프도다 슬프도다 우리 국민 슬프도다 국치민욕 우리 무리 일점보답 무엇인가

자유 국권 뺏기었소 금일 노예 이 아닌가 이 나라 무슨 나라 파란과 애급이지

이 나라 무슨 나라 인도와 월남일세 슬프도다 슬프도다 우리 국민 슬프도다

四䕺九幹 저 대보소 三十三葉 완연하이 청청한 저빛 또있는가 우리국민 경계로세 정혈이 모였네 천지조화 忠憤이 이로다 신인감동 만국이 同淚하고 세계가 掀動일세

 이러한 노래들은 당시 사립학교의 교가로 많이 애창되고 있었는데 이의 대표적인 것으로<育英學校의 唱歌>에서 찾아볼 수 있다.

太極肇判하온 후에 海東朝鮮 생겼어라 삼천리 강산이요 이천만 생령이라

육대주가 羅列중에 대한 이름 당당하다 어화 우리 학도들아 대한 二字 생각하세

英米法德 서에 있고 露西亞가 북에 있네 大和國이 동에 있고 우리 대한 其中일세

슬프다 우리 대한 독립 二字 어데 간고 독립이여 독립이여 우리 동포 양식일세

可憐토다 우리 동포 양식없이 어이 살고 찾아가세 찾아가세 독립 독립 찾아가세

(≪大韓每日申報≫, 1907년 7월 17일).

 또한 독립가나 애국가와 함께 소년들의 민족정신과 항일 적개심을 기르려는 노래로 불리어진<少年男子歌>도 있다.

무쇠골격 돌 근육 소년 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 나라에 소년의 활동 시대 다다랐네

萬人 敵對 연습하여 후일 戰功 세우세 絶世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皇城新聞≫, 1909년 3월 21일).

 독립가와 애국가류의 노래들 이외에도 청년학생들에게 널리 애창된 노래 가운데는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권고하는<勸學歌>가 있었다.

학도야 학도야 젊은 학도야 벽상의 괘종 소리 들어 보시오

한 소리 두 소리 가고 못 오니 인생의 백년 가기 주마같도다

 한편 1895년 이후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여 1907년 8월 1일 군대가 강제 해산된 이후에는 해산된 군대의 일부가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부대가 조직화되고 또는 무장화되어 보다 강력한 의병전쟁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와 같이 의병전쟁이 전개되면서 학생들에게<의병의 노래>가 널리 불리어져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의병전쟁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오라 오라 돌아오라 倡義所로 돌아오라 만 만일 오지않고 왜적에 종사하여

불행히도 죽게되면 황천에 돌아가서 무슨 면목 가지고서 성황 선조 뵈올소냐

 이 때 불려진 노래로는 의병장 柳弘錫의 며느리로서 여자의 몸으로 직접 의병전쟁에 뛰어들어 싸웠던 尹姬順이 지은<안사람 의병 노래>가 여러 곡 전해오고 있다.256)<안사람 의병 노래>가운데 대표적인 가사를 들어본다.
아무리 왜놈들이 포악하고 강성한들 우리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나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힌들 왜놈시정 받을쏘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 나라 성공하면 우리 나라 만세로다 안사람들 만만세라.

 이상과 같이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학생들에게 불려진 애국가나 독립가는 점차 일반국민들에게도 확산되어 갔으며, 의병항쟁이 전개되면서 의병들은 독립가나 애국가와 함께 의병가도 불렀다.

 이 시기에 창가로 불린 이러한 노래들은 구국교육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물론 일반국민들에게 애국심과 독립심을 고취시키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에 대해≪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은 논설에서 이러한 노래를 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룰 것을 내세우고 있다.

然卽 학교의 用歌가 단지 일시의 정신을 유쾌하게 하며 혈기를 通暢케 할뿐 아니라 抑亦不知不識間에 기질을 변화하며 심지를 전이하는 대능력을 具有한 자인즉 此도 역시 교육자의 주의할 바이다(≪大韓每日申報≫, 1908년 7월 11일).

 그러나 1906년 이전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한 학교에서는 음악이나 창가를 배우는 교과목이 아직 편성되지 않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일반인에게 번져 갔던 것이다. 1896년대≪독립신문≫에 발표되었던 독립가나 애국가가 각지의 학생이나 관리 또는 일반인이 스스로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1906년 민족교육을 억압하기 위하여 교육침략정책을 추진하던 통감부는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애국가와 독립가를 부르는 것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조처의 하나가 학교에서의 음악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는 1906년 이후 통감부에 의해 관공립학교의 관제가 새로 제정되면서 각급 학교의 교과목에 빠짐없이 음악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다.

 1906년 8월 27일 일제히 발표된 각급 학교의 시행규칙에 나타난 교과목에서 음악교과의 명칭과 그 요지 및 학과 정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범학교

음악:가사 악보 중에 高雅純正하여 교육상에 裨益이 있는 것으로써 연습케하고 겸하여 음악의 명칭과 기호의 요약과 가사의 의의를 知得케 한다.

(본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와 악기 사용법

(예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

(속성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 및 악기 사용법

 2. 고등학교

음악:가곡을 창함을 지득케하여 美한 興韻을 感發하고 심정을 고결케 하며 겸하여 덕성 함양에 資賴케 함을 요함이라.

(본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 單音復音

(예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

 3. 보통학교

창가:평이한 가곡을 창케하여 미감을 양하고 덕성의 함양을 資함으로 요지를 함이라.

(학과정도):단음창가(≪官報≫, 1906년 8월 31일, 9월 3일·4일)

 4. 고등여학교

음악:음악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득케하여 미감을 양하고 심정을 고결케 하며 겸하여 덕성의 함양에 資케 함을 요함.

(학과정도):음악은 단음창가를 교수하고 편의로 輪唱歌와 복음창가를 交하여 악기 사용법을 교수함이 가함(≪官報≫, 1908년 4월 10일)

 이들 학교들의 학교령이 1909년 4월에 일제히 개정되고 7월에 시행규칙이 다시 발표되는데 이 때의 교과목명과 교수요지 및 그 정도를 나타낸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범학교

음악:음악에 관한 지식기능을 득케하여 미감을 양하며 덕성 함양에 資함으로써 요지로 함.

(학과정도):음악은 단음창가를 위하고 가사 악보가 고아하며 교육상 비익이 유한 자에 就하여 연습케 하며 또한 악기 사용법을 교수함이 가함.

(본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 및 악기 사용법

(예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

(속성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

 2. 고등학교

창가:가곡을 창함을 득케하며 미감을 양하여 덕성을 함양함에 資함으로써 요지로 함.

(학과정도):창가는 단음창가로 하되 고아하여 교육상 비익될 가사 악보를 택하여 교수함이 가함.

 3. 고등여학교

음악:음악에 관한 지식기능을 득케 하며 미감을 양하며 심정고결히 하고 겸하여 덕성 함양에 資함으로써 요지로 함.

(학과정도):음악은 단음창가를 위주하여 교육상 비익이 유한 가사 악보를 택하여 교수하고 또 편의로 복음창가를 가하며 악기 사용법을 교수함이 가함.

(본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와 복음창가, 악기 사용법

(예과의 학과정도):단음창가

 4. 보통학교

창가:평이한 가곡을 창함을 득케 하고 미감을 양하며 덕성 함양에 資함으로써 요지로 함.

(학과정도):창가는 단음창가를 교수하되 가사 악보는 평이 雅正하여 학도의 심정을 쾌활 순미케 할 자를 요함(≪官報≫, 1909년 4월 20일, 7월 9일).

 이상의 각급 학교의 음악과목의 실태를 보면 1906년에는 교과목명을 보통학교는 창가로 하고 사범학교와 고등학교 및 고등여학교는 음악으로 하였는데, 1909년 개정된 것을 보면 사범학교와 고등여학교는 음악이었으나 고등학교와 보통학교는 창가로 되었다. 특히 고등학교에서 교과목명을 음악에서 창가로 바꾼 것이 특이하다. 이는 당시 교과목의 명칭으로 음악이나 창가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악교육의 요지를 대개 ‘美感을 기르고 德性을 함양하며 고결한 심성을 갖게 한다’로 정리되는데 이는 당시 학생들에게 번지고 있던 애국심이나 항일민족의식을 차단하기 위하여 애국가나 독립가 및 의병가 등을 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명분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통감부의 일본인들은 학생들이 애국가와 독립가를 부르는 것을 학생들의 반일사상을 표현하며 국권회복의 정신이 깃들은 것으로 받아 들여 사립학교에서 부르는 이와 같은 노래를 ‘불량의 창가’로 규정하여 단속을 하였다.

<金興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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