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5.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
  • 1) 근대 교육 성립기의 교과서

1) 근대 교육 성립기의 교과서

 한국의 근대 교육의 발전은 교과서의 역사에서도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새로운 교과서의 편찬과 사용은 1895년 정부에 의해 신교육제도가 발표되고 이에 따른 각급 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이에 따라 당장 교과서를 새로이 준비해야 되는 일이 닥치게 되었다.

 이에 앞서 1880년대 한국 근대 교육의 성립기에 설립된 민간학교나 또는 선교계통의 학교에서도 각각 신교육의 내용에 맞는 교과서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학교에서 교육내용과 관련된 교과서의 편찬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당시 학교의 교육활동이 교육과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일정한 편제에 의한 학교운영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통 교육에서 탈피하여 근대 교육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교육기관에서 사용되어 온 교재가 아닌 새로운 교재는 필요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교과서를 새롭게 편찬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시기의 교과서 사용은 다음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 하나는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되어 서양의 신문물을 소개하는 도서들 그 자체가 교과서의 역할을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주로 서양인 교사들이 소지한 도서나 직접 그들이 작성한 노트를 교과서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1883년 설립된 元山學舍는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편제되어 각각 經義와 兵書를 필수과목으로 하고 時務의 긴요한 과목을 공통으로 부과하였는데 산술·格致·機器·農桑·鑛採 등이 그것이었으며, 이러한 과목의 교재로 비치된 도서는≪瀛志≫·≪聯邦志≫·≪奇器圖說≫·≪日本外國語學≫·≪法理文≫·≪瀛環志略≫·≪萬國公法≫·≪農政新編≫등이었다.257)愼鏞廈,<우리나라 최초의 近代學校의 설립에 대하여>(≪韓國史硏究≫10, 한국 사연구회, 1974). 이들 도서들이 원산학사의 교과서에 해당되는 도서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6년 설립된 育英公院은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보빙사로 미국에 갔던 閔泳翊이 미국문물의 발전된 것을 목격하고 고종에게 학교의 설립을 건의함으로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미국에 교사파견을 요청하여 길모어(G. W. Gilmore), 벙커(D. A. Bunker), 헐버트(H. B. Hulbert) 등 세 사람의 교사가 1886년 7월에 도착 9월말에 수업을 시작하였다.258)李光麟,<育英公院의 설치와 그 변천에 대하여>(≪韓國開化史硏究≫, 일조각, 1974), 109쪽.

 육영공원의 設學節目 속에 들어 있는<每日學習次第>에는 譯書·습자·學解字法·산학·寫所習算法·지리·學文法 등이 있으며,<所學諸條>에는 大算法·각국언어·諸般學法·捷經易學者·格致萬物(의학·지리·천문·화훼·초목·農理·機器·禽獸), 各國歷代政治(與各國條約及當國用兵之術) 등이 있다.259)李光麟, 위의 책.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보아 이에 필요한 교재는 특별히 거명되지는 않았지만 앞의 원산학사에서 보인 도서들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외국인 교사들이 직접 저술하여 교과서로 사용된 도서들이 있다. 이 가운데 육영공원의 교사 헐버트가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해 순 한글로≪민필지≫를 저술하였다. 이는 학생들이 서양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 호응하여 세계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후에 한문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으며 많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아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민필지≫의 저자인 헐버트는 지리학자인 동시에 역사학자였으므로 이 책의 내용을 통해 세계에 대한 소식에 접할 수 있었다.

 선교계통의 사립학교에서는 우선 성경이 공통적인 교과서로 사용되었을 것임은 당연하다. 또한 서양소식을 알리는 것이 대표적인 교육내용으로서 이에는 자연히 지리와 역사에 관한 것이 우선되었다. 이는 당시 선교계통의 사립학교에서 가르친 과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培材學堂에서 “… 수학이며 내외지리, 역사 등의 신학문을 수학하였는데 … 그 때 한국말로 교수한 과목은 한문과 세계역사와 지리문답이었다”260)배재고등학교,≪培材80年史≫(1965), 103쪽·147쪽.라고 한 것이나, 梨花學堂에서도 1892년의 교과목이 성경·반절·한문·영어·수학·지리·역사·과학이라고 하였고,261)이화여자고등학교,≪梨花80年史≫(1966), 65쪽. 貞信女學校에서도 성경·산술 두 과목 이외에 역사이야기를 구술하였다고262)정신여자고등학교,≪貞信75年史≫(1962), 19쪽.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배재학당에서 역사를 가르친 한국인 교사들은 한문으로 번역된≪쉐필드의 세계역사≫(Sheffield's Universal History)를 교과서로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문으로 번역된 책이 이 책뿐이었기 때문이었으며 이화학당에서는 1890년에≪千名의 偉人傳≫2권과 3권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또한 당시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실태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으로 이화학당의 예를 들어보면 “… 처음서부터 1904년까지는 초청되는 선생에 따라 새로운 과목이 첨가되는 형편이었다. 말하자면 교과과정이 짜여져 각 과목을 담당하는 교사를 초빙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오는 교사가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이 새로 시작되었다 …”263)이화여자고등학교, 앞의 책(1866), 68쪽.라고 하였으니 이런 실정에서 일정하게 교과서가 정해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교과서는 재직하는 교사들이 번역한 책이나 저서를 사용하였다. 정신학교의 경우 “교과서는 선생님만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쓰는 어린이들의 교과서를 앨러즈가 한국말로 번역하여 친히 펜으로 적어 놓은 것을 교과서로 썼다”264)정신여자고등학교, 앞의 책(1962), 59쪽.라고 한 것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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