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5.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
  • 3) 통감부하의 교과서
  • (1) 일제의 교육침략정책

(1) 일제의 교육침략정책

 1904년 8월 제1차 韓日協約이 체결됨에 따라 이른바 고문정치가 시작되어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이 배치되었는데 학부에는 시데하라(幣原坦)가 學部參與官의 명칭으로 교육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인은 이미 갑오개혁 당시부터 정부에 고빙되어 학부의 교과서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으나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침략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다.

 시데하라는 1906년 4월 초까지 근무하다 귀국하였고 뒤이어 미쓰치 츠죠(三土忠造)가 부임하였으며,269)吳天錫,≪韓國新敎育史≫(현대교육총서출판사, 1964), 123쪽. 4월 말일 參與官附事務官으로 小彬彦治가 도착하였다.270)≪皇城新聞≫, 1906년 5월 4일. 또한 다와라 마고이치(俵孫一)가 통감부 서기관으로 근무하는 학부촉탁으로 배치되더니 1907년 韓日新協約이 체결된 후에는 학부차관이 되어 한국 교육행정의 실권을 잡고 교육침략에 앞장섰다.

 통감부의 교육정책은 한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국인이 일제의 침략과 관련된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근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실용적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통감부는 우선적으로 학제를 전면 개편하였으며 일본어시간을 늘리는 대신 애국교과를 삭제 또는 축소시키고 각급 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배치하였다.

 교사의 부족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일본인 교사의 배치는 처음에는 관공립학교에 국한하더니 점차 사립학교에까지 강제로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1906년 3월 통감부가 설치된 직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 학부참여관 시데하라와 각 학교의 일본인 교사를 일제히 초견하였데,271)≪皇城新聞≫, 1906년 3월 27일. 이를 보면 통감부 설치 이전에 이미 일본인 교사가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본격화되었다.

 통감부는 1906년 13도 관찰부 소재지의 공립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배치하고 1907년부터는 기타 각 지역의 보통학교에 배치하기로 하였다.272)≪大韓每日申報≫, 1906년 9월 8일. 1907년 4월 현재 지방 각 공립보통학교에 25명의 일본인 교사가 배치되었다.273)≪皇城新聞≫, 1907년 4월 3일.
일본인 교사가 배치된 학교는 다음과 같다-울산군, 의주군, 군산항, 동래부, 회령군, 원산항, 나주군, 홍주군, 길주군, 강릉군, 정주군, 마산포, 청주군, 황주군, 경주군, 강경포, 안성군, 개성군, 성주군, 원주군, 상주군, 북청군, 경성군, 서울의 校洞과 安洞.

 1908년 이후에는 보통학교의 교감이 임명되고 있다. 이들 일본인 교사들은 학교의 실권을 장악하고 일본어교육을 강화함으로써 민족교육을 억압하고 식민지교육의 기반을 잡아 나갔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를 교육의 모범을 보여 한국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학부차관 다와라는 말하기를

1교에 반드시 1인의 교원을 두어 교감으로 하며 … 제반 경영의 主腦로 삼아서 韓人 교원을 지도한다(學部,≪韓國敎育의 現狀≫, 1910).

라고 하여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일본인 교사들은 학교운영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 대한 감시나 한국인 교사들의 감시자 역할도 하였다. 특히 학생들에 대한 감시는 민족주의운동을 억압하고 일제 침략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이는 일본인 교감회의에서 이토통감이 한 연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주의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사되는 자는 정치와 종교의 일에 관해서는 피차 평론하지 않는 일이다. 설사 사회의 풍조가 여하하건 一意專心 교육에만 진력하면 되는 것이다(학부,<보통학교교감회의록>, 1908).

 학교교육이 현실문제에 관여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감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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