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1. 근대 학문의 수용
  • 1) 서양 근대 학문의 세 수용통로

1) 서양 근대 학문의 세 수용통로

 중국·조선·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서로 인접하는 유교문화권에 속한 나라였지만 근대 학문(서학)의 수용 양상은 세 나라가 서로 달랐고 또 그것이 근대에 서로 다른 길을 결정짓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배후에 있는 각국의 유교문화의 성격을 포함한 사상적 체질의 차이에 의해 규정된 측면이 중요할 것이다.295)강재언 저·이규수 역,≪서양과 조선≫(학고재, 1998), 259∼260쪽.

 잘 알려져 있듯이 조선에서는 이미 개국 전부터 실학파 사상가들에 의해 서구사상이 많이 수용되었다.296)다음과 같은 글들이 참고된다.
이원순,≪조선서학사연구≫(일지사, 1986).
이광린,≪한국개화사연구≫개정판(일조각, 1995).
강재언 저·정창열 역,≪한국의 개화사상≫(비봉출판사, 1984).
강재언 저·이규수 역, 위의 책.
강재언,≪조선의 서학사≫(민음사, 1990).
종교적 차원에서는 西敎로 학술적 차원에서는 西學으로 나누어 본다면 서교의 수용에 대한 연구와 서학 중에서도 자연과학이나 서양기술의 수용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근대적인 의미의 인문사회과학의 수용에 대한 연구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서구학문(新學)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개항 전후 개화사상이 대두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1910년 정도까지는 아직 근대 교육제도가 뚜렷이 확립되기 전이고 근대적 서양학문의 수용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철학사상과 사회사상, 인간론, 정치사상 등이 서로 섞여서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수용한 서구 근대 학문의 분야가 분명히 나누어지지 않았고 또 학문분류도 분명하지 않았다.

 한국이 서양 학문을 수용하는 과정은 크게 중국과 일본을 매개로 하는 과정과 직접 서양을 접하는 과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 중에서도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이 정식 국교와 무역을 행하는 상대국은 청나라와 일본뿐이고 서양국가들과의 직접적인 왕래는 없었다. 조선시대의 한국에 알려져 있던 서양지식은 마테오릿치(Matteo Ricci)의 저작을 비롯한 중국주재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쓴 저작뿐이었다. 중국을 경유하여 서양의 지식을 얻는다고 하는 상황은 대개 18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774년 사절에 동행하여 북경에 간 李承薰은 예수회 선교사와 접촉하여 천문학과 수학을 배우고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후 한국 내에서는 신자가 증가하여 이를 탄압하는 정부에 의해서 몇 번의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한편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洋務運動에 관한 저작이 한국에서 읽혀졌다. 역관 吳慶錫은 1853년 이래 북경과 천진을 왕래하며 서양의 부국강병술을 배울 것을 주장하여 아편전쟁 후에 쓰여진 魏源의≪海國圖志≫와 세계지리서인≪瀛環志略≫, 미국인 선교사가 내고 있던 월간잡지≪中西見聞錄≫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서적은 그와 교제가 있었던 실학파 사람들에게 읽혀져서 후에 ‘개화파’의 한 원천이 되었다.297)개국 전의 서양인식과 서양사상 수용에 대해서는 이원순, 위의 책과 강재언 저·정창열 역, 위의 책, ‘제3장 조선에 건너온 서양서목-개국 전의 서양인식과 관련하여’ 등이 참고된다. 그리고 당시에는≪朝鮮策略≫,≪易言≫도 이미 수용되어 읽혀졌으며≪燕巖集≫이 개화파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줬다. 개국 이전의 폐쇄적인 사상적 상황 가운데 개화파 형성에 영향을 준 책 중에 사상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영환지략≫과 ≪해국도지≫일 것이다.298)이광린,<‘해국도지’의 한국전래와 그 영향>(앞의 책).

 개화사상이 대두되던 1870년대나 1880년대에 있어서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주요 외국서적은 거의 모두가 중국의 서적이나 그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저술이었다.299)이광린, 위의 글, 38∼46쪽. 이와 같은 사실은 1890년대나 1900년대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서적의 영향이 점차로 확대된 것은 사실이다.300)이재선,≪한국개화기 소설연구≫(일조각, 1993), 29∼33쪽.

 ≪해국도지≫같은 책은 이미 崔漢綺나 金正喜 그리고 나중에 朴珪壽 등이 읽게 된다. 서양에 대한 이들의 이해는 과학기술에는 좋은 반응을 보이지만 사상에는 종래 유학자들이 배척하던 불교 정도의 수준이라 판단하여 유학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중국을 방문하여 새로운 사상을 체득하게 된 박규수와 姜瑋는 귀국하자 주위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국제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역설하였다. 박규수는 兪吉濬에게 위원의≪해국도지≫를 주면서 오늘날에는 外洋事, 즉 국제문제에 대해서도 알아야 된다고 말하자 유길준은 이로부터 분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국도지≫는 위원(1794∼1856)이 1844년부터 1852년까지 100권으로 완간한 저작으로 서양의 역사와 지리를 중점적으로 소개한 일종의 세계지리서이다. 그런데 이 책이 동아시아 삼국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청에서는 서양의 기술을 채용하자는 洋務論이 흥기하고 페리의 내습(1853)으로 혼란에 빠진 일본은 결국 개국론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개화파가 출현하는데 한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301)이광린, 앞의 책, 2쪽. 말하자면≪해국도지≫는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사회에서 代替經書의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302)최원식,<신소설에 나타난 개화의 두 모습>(≪역사비평≫34, 1996), 142쪽.

 1860년 후반기부터 한국사회에 나타난 신사상은 1881년에 이르러 ‘自强’과 ‘開化’로 표현되게 된다. 자강은 당시 청국에서 유행되던 말이었고 개화는 일본에서 유행되었던 말인데, 함께 한국에 들어온 셈이다. 그러나 점차 자강보다는 개화에 더욱 매력을 느껴 한국사회에서 개화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급진파에서는 자기그룹을 개화당이라 부르고 온건파를 사대당이라 불러 구별하였다.303)이광린,<개화사상의 형성과 그 발전>(≪개화파와 개화사상 연구≫, 일조각, 1989), 35쪽.

 1880년대 조선에 유입된 중국책과 잡지는 역사, 지리, 자연과학, 정치와 법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당시 수용된 인문사회과학 쪽의 중국서적으로는 역사지리서적인≪해국도지≫·≪영환지략≫·≪地球說略≫·≪普法戰記≫등과 정치·법률서적인≪朝鮮策略≫·≪萬國公法≫·≪興亞會雜事詩續≫·≪易言≫, 신문잡지 종류인≪申報≫·≪萬國公報≫·≪中西見聞錄≫·≪格致彙編≫등이 있었다.304)더 자세한 내용은 이광린, 앞의 책(1995), 38∼46쪽. 1883년 5월(음력 3월) 경에≪역언≫이 복간되고 한글 번역본까지 간행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1897년이 되어서야 중국에 비로소 소개되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이미 1880년대에 다윈의 진화론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사회진화론적인 ‘생존투쟁’·‘우승열패’는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한국에 유입된 일본서적의 수는 매우 적었고, 그 영향력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305)이광린,≪한국개화사연구≫, 39쪽.

 중국에서도 서양의 기술 뒤에 숨은 서양의 제도와 정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청일전쟁의 패배 뒤였고 그리하여 자강론에서 변법론으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에서 嚴復이 헉슬리의 이론을 번역한≪天演論≫(1898)과≪群學肄言≫(1903), 양계초의≪飮氷室文集≫(1903)이 들어와 조선에서 널리 읽혀졌다.

 특히≪음빙실문집≫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 梁啓超의 변법자강사상은 서양의 천부인권론, 사회계약론, 사회진화론적 근대사상과 함께 조선 말기의 애국계몽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서양의 근대사상은 물론 단편적으로는 이미 1880년대부터 개화사상에 강한 영향을 주고 있었지만 특히 유길준의≪서유견문≫과≪독립신문≫그리고 양계초의≪음빙실문집≫등에 의해 조선의 계몽사상가들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린 감이 있다.306)양계초는≪음빙실문집≫(하)에서 루소의 학설을 매우 자세히 소개하고 홉스, 로크, 흄을 그리고 몽테스키외의≪법의 정신≫을 자세히 해설하여 소개하였고 또한 벤담도 언급했다. 또한 그는 블룬칠리(Johann Caspar Bluntschli:伯倫知理)의 학설이 국가유기체설에 기초를 둔 것이며, 국가유기체설은 루소의 공화정치론과는 대립되는 흐름임을 자세히 해설하여 소개했다. 이 때문에 이미 전제군주제를 혐오하고 공화정을 동경하고 있던 한말의 사상계에는 독일 낭만주의보다 루소, 로크 등의 계몽사상이 더욱 중요한 서구의 정치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검토된 것으로 보인다(신용하,≪박은식의 사회사상연구≫, 서울대 출판부, 1982, 59쪽 참조). 그러나 1900년대 후반기에 국권회복과 내정변법을 당면의 과제로 하고 있었던 조선의 계몽사상가들의 강한 관심은, 서양의 근대사상 그 자체보다 그 논리를 도입하여 쌓아 올린 양계초의 변법자강사상에 있었던 것 같다.

 1876년 일본은 군함을 파견하여 강제적인 함포외교로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했다. 오경석은 조선측 전권비서를 맡았지만 일본사절로부터 철도와 전신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이렇게 하여 급속히 서양문명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던 메이지(明治)維新 후의 일본이 새로 조선의 서양문명 도입경로가 된 것이다.307)上垣外憲一,≪일본유학과 혁명운동≫(진흥문화사, 1983), 13쪽. 즉 실학사상을 기반으로 한 선구적인 개화사상이 청말의 중국서적들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면 그 후의 개화사상은 일본서적을 통한 것과 실지로 견문하는 것으로 비롯하여 얻어진 것이다.

 일본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자본주의국가로서, 구미 자본주의제국의 사정을 알기 위해, 또 유신 이래 단기간에 걸쳐 근대적 발전을 이룩한 경험을 알기 위해서 개화파 인사가 일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金玉均 등 개화파의 일본에 대한 대외활동의 길을 튼 사람은 李東仁이었다. 이동인은 처음에는 劉鴻基와 친분이 있어서 그의 소개로 김옥균 등과 사귀게 되었다. 이동인이 東本願寺 부산별원을 통하여 근대화되고 있는 일본에 주목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878년경부터이다. 이렇게 해서 유홍기는 신세계를 볼 수 있는 두 개의 눈을 가지게 되었으니 하나는 오경석을 매개로 한 청국을 통해서요 다른 하나는 이동인을 매개로 한 일본을 통해서이다.

 이동인은 부산에서 입수한≪萬國史記≫나 세계 각국의 도시와 군대의 규모를 찍은 사진, 瑤池鏡(萬華鏡) 등을 김옥균 등에게 보여주고 당시 불온서적이던≪만국사기≫등을 동지들 사이에 서로 돌려가며 읽었다. 김옥균과 朴泳孝가 사재를 처분해서 여비를 조달하여 외국사정에 관한 문헌이나 자료를 구입하도록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며 이는 민간인으로서의 최초의 여행이자 국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최초로 만난 사람이 또한 이동인이다.308)강재언,≪韓國近代史硏究≫(한울, 1982), 70∼71쪽.
강재언·정창렬역, (앞의 책, 1984), 196∼197쪽.

 초기 개화파의 사상형성에는 내재적·외재적 요인이 있으나, 대부분의 논자들에 의하면 외재적 요인 중 일본의 후쿠자와가 미친 사상적 영향을 거론한다.

 1876년 개항 후 최초로 일본외교사절이 된 金綺秀가 보고한≪일동기유≫에는 “그들의 학문은 경전을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부국강병을 받들고 있다”, “군사나 종사에 모든 서양의 방법을 쓰고 있다” 등의 내용을 싣고 있다.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이 일본으로 떠났다.

 유길준은 후쿠자와가 저술하여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던≪서양사정≫·≪학문의 권장≫·≪문명론의 개략≫등을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서양사정≫·≪만국공법≫등은≪서유견문≫에 많이 인용되었고≪서유견문≫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이≪서양사정≫에 나타나고 있음에서 잘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내용이 거의 전재된 부분도 있다.309)김봉열,≪유길준 개화사상의 연구≫(경남대 출판부, 1998), 38∼39쪽.
≪서양사정≫이≪서유견문≫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광린,<유길준의 개화사상-서유견문을 중심으로>(≪한국개화사상연구≫, 일조각, 1979) 참조.

 다른 한편 당시 慶應義塾에서는 미국인이 지은≪The Element of Political Economy≫등의 영어원서를 교재로 영어교습을 하기도 하였고 또한 외국어에 능한 교수들이 스펜서·몽테스키외·토크빌 등 사상가의 책을 소개하는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유길준은 특히 정치·경제학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310)이광린, 앞의 글(위의 책), 52쪽. 또한 그는 후쿠자와의 책 외에도 당시 일본에서 널리 읽혀진 가토(加藤弘之)의≪입헌정체론≫·≪국체신론≫, 나카에 죠민(中江兆民:1847∼1901)의≪민약역해≫등의 정치사상 관계 저술도 읽어 보았을 것이다.311)유영익,<갑오경장 이전의 유길준-1894년 친일개혁파로서의 등장배경을 중심으로>(≪한림대논문집≫4, 1986), 75쪽.

 앞에서 서술한 것들 외에도 개화사상에 영향을 미친 서구의 책으로는 루소의≪사회계약설≫이나 몽테스키외의≪법의 정신≫, 아담 스미스의≪국부론≫등이 있는데, 개화사상가들은 이러한 저서를 직접 읽지는 않았고 주로 일본서적을 통해 이러한 사상조류와 만났을 것으로 추측되고 이러한 사상과 직접 부딪혔던 시기는 1890년대 이후라고 볼 수 있다.312)신용하,<19세기 한국의 근대 국가형성 문제와 입헌공화국 수립운동>(≪한국의 근대국가 형성과 민족문제≫, 문학과 지성사, 1986), 64쪽.
≪독립협회회보≫2호(1896. 12. 5)에서는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자연법사상, 몽테스키외의≪법의 정신≫과 삼권분립설이 소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직접적으로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의 서구사상 수용은 1910년 까지는 매우 드물었지만 尹致昊와 兪吉濬·徐載弼 등의 미국 유학생과 朴定陽 등의 ‘親美開化派’를 통해 서구사상 수용이 이루어졌음은 잘 알려져 있다.313)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이광린,<미국 유학시절의 유길준>(앞의 책, 1995).
―――,<서재필의 개화사상>(앞의 책, 1979).
―――,<서재필의 사상>(≪개화기연구≫, 일조각, 1994).
유영렬,≪개화기의 윤치호연구≫(한길사, 1985).
한철호,≪친미개화파연구≫(국학자료원, 1998).

 우리는 서구사상의 수용이 초기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한문저술을 통해서 이루어지다가 점차로 청말 중국학자들의 저술 혹은 번역서를, 그리고 나아가 일본의 철학서가 중국에서 한역된 것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나중에는 일본을 통해 그리고 미국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역사적 맥락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