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1. 근대 학문의 수용
  • 2) 서양철학의 수용

2) 서양철학의 수용

 우리 나라에서 서구의 철학사상이 알려지기는 천주학의 전래로부터 시작하였다.≪職方外記≫나≪天主實義≫등의 책들 속에는 서양철학에 관계된 것이 가끔 나오므로 단편적이나마 수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를 통해서 전해진 서양철학사상은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스콜라철학이었으며 따라서 그 외의 것은 아주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다.314)송영배,<‘천주실의’의 내용과 그 의미>(≪철학사상≫5,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1995).
허남진<서구사상의 전래와 실학>(≪철학사상≫4, 1994).
금장태·강돈구,<기독교의 전래와 서양철학의 수용>(≪철학사상≫4, 1994).

 서양철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한말에 이르러서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서양철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면서 우리도 이들을 통해 서양철학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哲學’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의 니시 아마네(西周)가 서양어 ‘philosophia’를 번역한 용어로서 이 용어가 중국과 한국으로 유입되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315)백종현,<서양철학수용과 한국의 철학>.
강영안,<현재 한국에서 사용되는 철학용어의 형성배경>.
이기상,<철학개론서와 교과과정을 통해 본 서양철학의 수용(1900∼1960)>(≪철학사상≫5, 1995).
조경란,<중국과 일본의 서양철학 수용>(≪철학사상≫4, 1994) 참조.
서양철학 수용에서 대표적인 몇 사람을 살펴보겠다.

 우선 石亭 李定稷(1841∼1910)은 조선 말의 유학자로서 베이컨과 칸트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316)박종홍,<이정직의 ‘칸트’ 연구>(≪박종홍전집≫5권, 민음사, 1998).
이현구,<개화기 유학자와 계몽운동가들의 서양철학 수용>≪철학사상≫4, 1994).
석정은 1868년 북경에 가서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서양학문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倍根學說’(베이컨 학설)은 언제 쓰여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03년에 간행된 양계초의≪음빙실문집≫가운데 ‘학설’편에 있는 ‘근대문명의 시조:베이컨(Bacon, F.), 데카르트(Descartes, R.)의 학설’ 가운데 ‘倍根 實驗派之學說(亦名 格物說)’을 보고 뜻이 중복되거나 긴 말을 삭제하고 일부 첨가하여 양계초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본다.317)오종일,<실학사상의 근대적 전이-석정 이정직의 경우>(≪한국학보≫35, 1984).

 그는 베이컨 이전의 학설은 희랍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범주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못한 채 궤변과 공상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베이컨철학이론이 나오면서 비로소 실제철학으로 돌아가게 됐다고 파악하여 베이컨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에서는 논리학, 중국에서는 辨學으로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독특하게 三句學으로 소개한 것이다. 석정은 삼구법이란 말과 문자로 표현하는 법에 불과한 것으로 진리를 터득해 이를 서술하면 크게 적용될 수 있으나 만일 문자 등을 빌어 진리들의 소재를 고찰하려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한 일로 파악함으로써, 그 나름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소화하고 ‘삼구법’이란 명칭까지 고안해 낸 것이다. 이정직은 베이컨의 실험, 관찰의 방법을 도입하여 동서철학을 절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칸트철학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그는 칸트의 윤리학과≪실천이성비판≫에 주목하고 자유와 인간존엄사상에 공감하였다. 이는≪음빙실문집≫에 기록된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양계초는 일본철학관에서 석가·공자·소크라테스·칸트를 네 성인으로 받드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칸트를 19세기 학술사의 제일인자로 소개하였는데 이는 일본철학계의 평가에 따른 것이다.318)이현구,<개화기 유학자와 계몽운동가들의 서양철학 수용>(≪철학사상≫4, 1994), 245쪽.

 그러나 이정직의 칸트철학에 대한 소개에는 양계초와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즉 양계초가 칸트의 철학을 불교의 화엄사상과 연결지어 설명한 데 비해 이정직은 주자학을 연결지어 설명한 것이 그것이다. 이정직은 칸트의 자유사상에 대하여 천리의 자연에 따르는 것이 진짜 자유이며 이는 유학에서 말하는 本然之性과 같다고 해석하고 또 칸트의 ‘사람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 자체로 대하라’는 말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지적한 것으로 해석하고 유학에서 仁이 바로 그런 경지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등 유학적 입장에서 서양철학을 절충하려는 나름대로의 고민과 독자성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19)박종홍,<이정직의 ‘칸트’ 연구>(≪박종홍전집≫5권, 민음사), 283∼285쪽.
이현구는 이정직의 서양철학에 대한 논의가 양계초의≪음빙실문집≫자료에 근거하여 초록하고 논평한 것이라면 자료성립 시기도 1903년 뒤가 되어 역사적 의미가 적어진다고 평가한다(이현구, 위의 글, 247쪽).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양계초의 수용입장과 비교한다면 당시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 부족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320)물론 양계초의 경우에도 칸트철학을 소개하면서 인권이나 주권에 대한 근대적 사고의 내용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또한 칸트의 자유개념을 양명학의 ‘良知’ 개념과 대비시킨 것은 양계초의 독창적인 생각이기보다 일본철학계의 철학수용 입장과 연관될 것이다(李威周,≪中日哲學思想交流與比較≫, 靑島海洋大 出版社, 1991, 209∼212쪽).
이현구, 위의 글, 246쪽 참조.

 우리 나라에서 서양철학을 서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강의를 통해 직접 접한 최초의 인물은 유길준(1856∼1914)이다. 그는 개항 후 최초의 서구유학생으로 일본의 慶應義塾과 미국에서 서양사상과 서양철학을 접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또한 근대 학문을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소개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유길준은≪서유견문≫에서 인문과학·사회과학·자연과학의 각 분야에 관하여 개념적인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는 농학·의학·산학·정치학·법률학·격물학(물리학)·화학·철학·광물학·식물학·동물학·천문학·지리학·人身學·博古學·언어학·병학·기계학·종교학에 걸친 근대 학문을 종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그 때까지 오로지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규범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던 구학문으로부터 현실의 사회적 실천에 유용한 지식을 추구하는 신학문에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사회전체의 과제로서 제시할 수 있었다(윤건차,≪한국근대교육의 사상과 운동≫, 청사, 1987, 136쪽).

 유길준은≪서유견문≫제13편에서 泰西學術의 내력을 말하면서 도덕학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있으며 窮理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베이컨이 博洽한 지식과 재조를 가지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학업하는 조목’에서 다른 학문과 더불어 철학을 들면서 “此學(철학)은 지혜를 애호하야 이치를 통하기 위함인 고로 그 근본의 심원함과 功用의 廣博함이 界域을 立하야 한정하기 불능하니, 人의 언행과 倫紀며 百千事爲의 動止를 論定한 자라”321)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편,≪유길준전서≫1권 (일조각, 1995), 371쪽.라고 정의하고 있다. 유길준이 철학을 ‘功用의 학’이라 하고 ‘百千事爲의 動止를 論定하는’ 학문이라고 말한 것은 당시 일본과 미국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이 성행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李寅梓(1870∼1929)는 일본의 이노우에(井上圓了)가 저술하고 중국 羅伯雅의 한역으로 된≪哲學要領≫과 프랑스의 李奇若(불어원명 미상)저 중국 陳鵬의 한역으로 된≪哲學論綱≫그리고 중국 양계초의≪飮氷室文集≫에 수록된 여러 학설 등을 참고하여≪希臘古代哲學攷辨≫이라는 서양 고대철학사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322)이인재에 대해서는 박종홍<이인재론-처음으로 서양고대철학사를 소개 비판한 유학자>(≪박종홍전집≫5권, 민음사), 424∼434쪽. 이인재가 참고한 책들의 저자와 漢譯者에 대해 박종홍이 제시한 내용에 대해서 해당 서적의 내용을 직접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김종석,<이인재의 사상과 역사적 의의:서양철학 전래 초기 유학계의 동향에 관한 일 고찰>(영남대≪철학회지≫17).
≪희랍고대철학고변≫은 고대 그리스철학의 소개와 그의 비판으로 되어있다.323)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12년 이전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이현구, 앞의 글, 249쪽 참조). 이인재에 의하면 철학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철학은 세 부분이 있는데 그 하나는 논리학이고 그 둘은 형이상학이라 하고 그 셋은 윤리학이라 한다. 比龍少飛阿(필로소피아)라는 것은 원래 희랍말로는 叡智에 대한 사랑, 예지를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것을 번역하여 철학이라고 하는데 이 철학은 삼라만상의 法理를 연구하며 사물의 원리와 존재를 풀이하는 것이다. 과학이란 사물 가운데 하나의 이치만을 연구하는 것이며 그 실용을 찾는 것이라면 백과의 학이 어찌 철학에 기초하 않겠는가(이인재,≪고대희랍철학고변≫, 성곡집, 附哲學攷辨, 한국학문헌연구소편, 서울, 아세아문화사, 1980, 385∼386쪽;강영안,<현재 한국에서 사용되는 철학용어의 형성 배경>,≪철학사상≫5, 33쪽에서 재인용).

 이인재는 이어서 哲學史論이라 하여 간단한 개요를 이 책의 처음과 끝부분에 적고 있다.324)더 상세한 내용은 박종홍·이현구의 앞의 글 참조. 여기서 ‘철학’이란 용어는 물론이고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존재’ 등의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들 용어들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번역되어 사용되다가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다시 한국으로 재수입된 용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張志淵·서재필 등과 같은 계몽운동가들의 서양철학 수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그런데 이들의 경우 그 저작의 특수성 때문에 서양철학 수용에 대한 명료한 경로와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계몽운동가 일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서구사회사상의 유입은 뚜렷하다.

 장지연(1864∼1921)은 황성신문 사장으로 있으면서 그 신문의 1909년 11월 24일자 논설인<철학가의 眼力>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무릇 철학이란 窮理의 학이니 각종 과학공부의 所不及處를 연구하야 明天理淑人心하는 고등학문이니…우리도 세계의 서적을 박람하며 세계의 학리를 廣求하야…세계철학가의 일부분을 점하면 또한 代의 國光을 발표하는 價格이 有한 줄로 사유하노라

 장지연은 서양철학을 적극적으로 공부할 것을 권면하고 그 스스로≪萬國事物紀原歷史≫를 저술하고 여기에서 “서양철학은 희랍의 탈레스(地利斯)에서 시작하니 피타고라스에 이르러 비로소 철학으로 발전하여,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점차 완성되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이룩되었다. 16세기에 영국 철학자 베이컨(Bacon, F., 倍根)이 실험철학을 일으키니 이로부터 고대철학이 바뀌어 근세철학을 이루었고, 같은 영국학자 로크와 스펜서 등이 모두 이 학파에 속하였다. 또 독일에 칸트·피히테·셸링·헤겔 등과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형이상학으로써 각각 주장을 세워 서로 다투었다”고 간략히 정리하고 있다.325)단국대 동양학연구소,≪張志淵全書≫권 2, 단국대 출판부, 1979), 237∼610쪽에
≪만국사물기원역사≫가 수록되어 있고 이 책의 118∼119쪽(전집으로는 352∼353쪽)에 인용한 것과 같이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단 이 인용은 한자식 이름을 대부분 생략했고 현대 우리말로 바꾸었다.

 서재필(1864∼1951)은 한국의 볼테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계몽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326)이광린,<서재필의 사상>(앞의 책, 1979), 93쪽.

독립을 이야기 할 때 자유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그런데 만약 사람이 하고자 하는 자유가 행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자유는 일반적으로 선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는 개인과 사회를 위해 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자유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최대다수에 대한 최대의 善이라고. 스피노자(Spinoza)가 말하기를,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자유스럽다고 생각한다’고 하였고 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말하기를 ‘자유스러운 사람이란 자기자신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양자의 주장은 모두 틀린 것은 아니나, 후자는 어떤 경우에 틀렸다고도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은 그 사회, 그 시대, 그 국가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 자유에 대한 정당한 정의를 내릴 때 나타나게 된다(≪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7일, 영문판;이광린,<서재필의 사상>,≪개화기연구≫, 110쪽 재인용).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서재필이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럽 사상가들의 글을 읽었고 또 그 글로부터 영향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최대다수의 최대 善은 영국의 공리주의자 벤담의 사상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외에도 서재필은 영어로 18세기 계몽주의사상가 이를테면 로크·루소·몽테스키외의 저서도 읽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저서를 통해 계몽사상 예컨대 합리주의, 자연법사상, 진보의 관념 등을 습득하고, 미국 민주주의사상도 철저히 익혔을 것이다.327)이광린,<‘해리 힐맨’ 고등학교를 찾아서>(≪개화기 연구≫), 127쪽.
―――,<서재필의 개화사상>(앞의 책, 1979), 138∼139쪽.

 서재필이 또한≪독립신문≫에서 특별히 강조한 문제는 민권, 법치주의, 주권수호 등이었다. 민권이란 국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지켜야 된다는 것이었고 법치주의란 나라가 나라 다우려면 법으로 다스려야 하고 또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권수호란 열강이 호시탐탐 한국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마당에 국민들은 정신을 차려 주권을 지켜야 된다는 것이었다.328)이광린,<개화사상의 형성과 그 발전>(앞의 책, 1979), 37쪽.
이광린은 서재필의 개화사상의 핵심을 실용적 학문론, 천부인권론, 법치주의론으로 파악한다(이광린,<서재필의 개화사상>, 앞의 책, 1979, 139∼147쪽).
서재필의 경우는 서양철학의 수용이 현실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으므로 주로 계몽적 차원에서 그리고 정치사상적 수준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개인 수준에서의 서양철학 수용 외에 가톨릭신학교에서 철학(신학)수업이 있었으며, 1905년에 평양에 숭실학당이 설립되면서 대학부가 설치되었고 여기서 서양인 선교사 번하이젤(Bernheisel:片夏薛)이 철학과 심리학, 논리학을 강의한 일이 있고 김하정역≪심리학교과서≫(1907년, 普成館 刊)가 현존해 있다.329)조요한,<한국에 있어서의 서양철학 연구의 어제와 오늘>(숭전대 철학회,≪思索≫3, 1972).

 우리는 서구철학의 수용이 초기에는 서양선교사들의 한문저술을 통해서 이루어지다가 점차로 청말 중국학자들의 저술 혹은 번역서를 그리고 나아가 일본의 철학서가 중국에서 한역된 것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나중에는 일본을 통해 그리고 미국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살펴보았다. 대체로 개화사상이 먼저 중국에서 다음으로 일본을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구미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음을 볼 때 철학의 경우는 그 수용과정에서 더욱 완만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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