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1. 근대 학문의 수용
  • 3) 사회진화론의 수용

3) 사회진화론의 수용

 개화사상에서 진화론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330)전복희,≪사회진화론과 국가사상-구한말을 중심으로≫(한울, 1996), 104쪽.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과 진화적 역사관은 개화사상에서 중심적인 사고를 이루고 있었다. 진화론적 사상은 1870년대 중엽부터 중국과 일본을 거쳐서 조선에 유입되었으며 19세기 말 이후에 한국사회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서구의 사회이론이다. 19세기 말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이 외세의 침략 앞에 너무나 무력함을 드러냈을 때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침몰하는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우리도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통해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자강운동’을 전개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은 개화파의 유길준이었다. 그의 일본유학 시절 당시 일본에서는 헉슬리의≪Lectures on Origins of Species≫가 伊澤修二에 의해≪生種原始論≫(1879년)이란 명칭으로, 다윈의≪The Descent of Man≫의 제2판이 神津專三郞에 의해≪人祖論≫(1881)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었으며 또한 동경대학의 모스교수의 강연으로 지식층에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유길준은 1880년대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던 시절 일본의 후쿠자와와 미국의 에드워드 모스의 지도를 통해 사회진화론을 접하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수용했다. 모스는 본래 생물학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동물학자로서 유길준에게 생물학적 진화론과 함께 사회진화론을 가르쳤으나 정치와 경제 등 사회문제와 국가문제에 관심이 더 많았던 유길준은 사회진화론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유길준이 일본에 유학했다가 귀국한 직후에<競爭論>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무릇 인생의 만사가 경쟁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크게는 천하국가의 일로부터 작게는 一身一家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쟁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능히 진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생에 경쟁하는 바가 없으면 무엇으로써 그 智德과 행복을 崇進함을 얻을 수 있으며, 국가가 경쟁하는 바가 없으면 무엇으로써 그 光威와 부강을 증진할 수 있으리오(≪유길준전서≫4권,<정치·경제>편 일조각, 1995 참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사회진화론을 단순히 한 국가 내부의 사회에 적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국제사회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 이루어지는 경쟁을 인류사회 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유길준을 지도한 후쿠자와로부터 받은 영향이 상당히 컸다고 여겨진다. 1880년대 후쿠자와는 당시의 세계를 약육강식, 생존경쟁이 지배한다고 보고 그러한 세계 속에서 강자, 적자가 되어야만 국권을 수호할 수 있으며 당시 일본의 급무를 ‘국체보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국가간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국민의 역량을 결집하고 동원해아 한다고 생각했다. 후쿠자와가 이 같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적용한 것은 그에 앞선 사회진화론자인 가토(加藤弘之)의 영향이 컸다.331)박찬승,<한말·일제시기 사회진화론의 성격과 영향>(≪역사비평≫32, 1996, 봄), 342쪽.
이 밖에도 김병곤<사회진화론의 발생과 전개>, 윤건차<일본의 사회진화론과 그 영향>, 조경란<중국에서 사회진화론 수용과 극복>을 게재하여 ‘사회진화론 수용의 비교사적 검토’를 개괄적으로 하고 있다.

 1880년대 개화파의 개화자강론은 이 같이 일본에서 국가주의, 제국주의론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하던 사회진화론의 수용 위에서 만들어졌다.

 이 시기 사회진화론은 일본을 통해서만 수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유학중이던 윤치호는 1890년대 초에 이 세계를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원리는 정의가 아니고 힘이며 ‘힘이 곧 정의’라는 것이 이 세계의 신적 원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와 연관하여 서구 문명국이 非西歐를 정복하는 약육강식의 현상을 전 인류의 문명화를 위해 신이 선택한 수단으로 보고 서구의 비서구세계에 대한 침략을 도덕적인 투쟁이라고 보았다. 즉 인류의 역사는 서구의 문명국이 비서구의 야만국을 정복하면서 그 문명을 확대해 가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인류사관에 근거하여 ‘서구문명국=강자=도덕적 선, 비서구문명국=약자=도덕적인 악’이라는 독특한 등식을 도출해 내었다.332)양현혜,≪윤치호와 김교신-근대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한울, 1994), 45쪽. 그는 당시의 국제사회를 약육강식·적자생존의 열국경쟁의 사회로 인식하고 이 같이 힘이 지배하는 냉엄한 사회에서 하나의 민족이 독립국가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 강자, 즉 적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조선도 스스로 문명화하여 강자가 되지 못하면 타국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 전망하고 조국이 힘을 길러 적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윤치호는 미국사회에서 강자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권력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회진화론을 흡수해서 그의 세계관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또한 서구의 비서구사회에 대한 정복의 확대를 그리스도교의 신의 축복으로 칭송하는 ‘행복의 神義論’에 취해 있던 19세기 말의 ‘그리스도적 제국주의’ 형태를 그리스도교의 원리적 본질로서 이해하고 수용했다.333)양현혜, 위의 책, 54쪽.

 사회진화론에 기초를 둔 개화자강론은 1890년대 독립협회 시기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독립협회 지도부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법칙이 지배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이 같은 생존경쟁의 때에 애국지사는 반드시 국가를 부흥케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독립신문≫에는 약소국이 되어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개화자강을 강조한 글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그 논설 가운데에는 서구문명 지상주의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제국주의 지배의 불가피론을 펴는 경우도 많았다. 즉 독립협회 지도부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을 비판하는 시각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선망하면서 개화자강을 통해 제국주의의 대열에 가담하려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334)박찬승, 앞의 글, 344쪽.

 이처럼 1890년대 후반부에 사회진화론적 사고는 신문을 통하여 지식인들과 국민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하여 국제사회에 있어서 힘의 메카니즘을 설명하고 서구적 근대화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했다.

 사회진화론은 한국에서 수용되던 초기부터 몇 가지의 특징을 보이는데 하나는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의 관점을 국제사회에만 적용시켜 인종과 국가 간의 갈등과 싸움을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국내사회에는 적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둘째로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을 통해 강자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제국주의의 속성에 대해 비판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들을 정당화하게 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약자가 약자일 수밖에 없는 까닭을 약자의 무능 탓으로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335)전복희,≪사회진화론과 국가사상≫(한울, 1996), 133쪽.

 사회진화론적 원칙인 ‘생존경쟁’과 ‘우승열패’는 1890년대 말 이후 계몽적인 글에서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교과서나 노래에서도 많이 사용될 정도로 대중적인 어휘가 되었으며 다윈의 진화론도 신문과 회보의 다양한 글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336)전복희, 위의 책, 140쪽 참조.

 사회진화론은 90년대 후반 이후 점차 국내에서 확산되게 된다. 이는 1905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이른바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 국권회복운동의 방법으로서 의병투쟁론과 자강운동론이 제기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즉 자강운동론이 강력히 대두했던 데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사회진화론’의 영향이 컸다. 1905년을 전후한 시기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신지식층의 경우에는 주로 일본유학을 통해 사회진화론을 수용했고, 개명유학자의 경우에는 주로 양계초의≪飮氷室文集≫을 읽음으로써 사회진화론을 수용했던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유길준·서재필 등에 의해 우리 나라에 도입되고 특히 1903년부터 양계초의≪음빙실문집≫이 보급되면서 계몽운동을 일으키는 기본 이론으로 정착되었다.

 한국의 계몽운동에서 사회진화론은 국가유기체설과 이론적으로 결합되어 발전되었으며 이 두 이데올로기의 결합은 계몽운동에서 다음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첫째, 국가는 사회진화론적 싸움, 즉 생존경쟁의 단위로서 강조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적자생존에 의해 발전할 수도 있고 자연적 도태에 의해서 멸망할 수도 있다. 둘째, 국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일깨우면서 국민을 통합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그런데 국가유기체론도 사회진화론이 한국에 수용된 과정처럼 일본과 중국을 통해 수용되었다. 특히 블룬칠리의 국가유기체론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일반국법(Allgemeines Staatsrecht)≫은 1896년 중국에 와 있던 미국의 선교사 마틴(W. A. P. Martin)에 의해서≪公法會通≫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발행되었고 이 중국어판은 같은 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서문을 붙여 발간하여 한국의 외교정책에 이론적인 도움을 었으며 1897년 제정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337)전복희, 위의 책, 157∼158쪽. 당시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국가유기체론을 블룬칠리의 저서를 직접 읽고 접했다기보다는 양계초의≪음빙실문집≫을 통해서 또는 일본의 가토의 저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연관하여 당시 지식인들이 가졌던 국가와 개인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파악은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개인의 권리신장에 대해 특별히 중점을 두는 경향으로 민권을 국권의 기반으로 보고 국가생존을 위해 민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경향이며,338)警世生,<人權은 國權의 基礎>(≪大韓學會月報≫4호, 1908), 18쪽.
전복희, 위의 책, 170쪽.
다른 하나는 민권보다 국권에 더 비중을 두는 경향으로 이것이 당시에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국권에 대한 강조는 당시 조선이 처한 시대적 위기, 즉 패망의 위기로부터 국가를 구출하기 위하여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한 국민통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민권의 중요성과 그 신장을 주장하는 민권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이를 국가의 근대화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국계몽운동이 보여주는 이러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서 야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339)전복희, 위의 책, 183쪽.

 첫째, 한국에서는 수많은 사상과 가치가 수용 초기부터 부국강병이라는 목적 아래 수용되었다.

 둘째, 서로 다른 사상적·역사적 배경을 갖는 서구사상과 가치가 한꺼번에 수용되자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것들의 사회적 맥락이나 사상사적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시의 한국적인 이해와 필요에 띠라 단편적이고 선택적으로 수용했다.

 셋째, 때때로 서구사상을 유교사상의 이해를 기반으로 파악하는 일종의 절충주의적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사회진화론과 민권사상이 원형적으로 서로 대립되는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애국계몽운동에서 서로 보완적으로 결합 수용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사회진화론이 제기되는 정치적 정세의 문제와 수용 주체의 입장에 따라 사회진화론이 갖는 의미도 변화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진화의 주체를 국가로 봤을 때와 민족으로 봤을 때는 큰 차이가 있다. 국가의 진화를 생각했을 때는 엉뚱하게도 경부선 철도가 일제에 의해 부설되는 침략상황을 진화로 보는 등의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고 또 국가가 1910년 망했을 때는 진화의 주체가 없어졌으므로 진화론의 근거가 없어졌으니 변절해 가게 된 이론적 함정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된다. 1905년부터 국가의 운명과 더불어 계몽주의자가 점차 변절해 갔던 것은 그것을 말한다. 그러나 진화의 주체를 민족으로 봤을 때는 국가는 망해도 진화의 주체인 민족은 있으니까, 梁起鐸·朴殷植·申采浩처럼 독립운동의 길을 택할 수 있었다고 보이는 것이다.”340)조동걸,<일제식민지시대 국내 독립운동의 이해와 과제>(≪일제식민지시대의 민족운동≫, 한길사, 1988), 39쪽.

 그런데 사회진화론의 주체를 국가가 아닌 민족으로 볼 때에도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신채호·박은식 등의 민족주의가 논리적으로 제국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주체를 이동하면 제국주의란 민족주의가 대외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독립협회와 애국계몽기의 민족주의가 갖는 한계성은 분명 진화론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사회진화론적 사고에 기반한 자주독립사상, 부국강병의 자강사상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를 그대로 시인하는 것으로, 침략하는 자보다 침략 당하는 자가 더 어리석다는 결론을 함축하고 있다. 이 점에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했던 신채호가 일제하에서 맑스주의를 수용했다가 다시 무정부주의 수용으로 발전해 나간 것은 매우 중요한 시사를 준다.341)신용하,≪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한길사, 1984) 참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