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1. 근대 학문의 수용
  • 4) 사회과학의 수용

4) 사회과학의 수용

 개항 이후 사회과학의 수용에 대한 연구들은 개별과학 분야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한국의 근대정치학은 그 시작에서부터 대상 없는 정치학이었다. 왜냐하면 근대정치학은 일본을 경유하여 그리고 도일유학생을 매개로 하여 주체적 연구대상이 없이 이루어졌다. 유길준의≪정치학≫은 전문적인 정치학 교과서로 기획된 것으로 국가론, 정치사상사 등 다방면에서 정치이론적으로 체계화한 한국 최초의 정치학 저술로 평가될 수 있다.342)유길준, 한석태 역주,≪정치학≫(경남대 출판부, 1998). 근대정치학은 주로 일본을 통해서 수용되었는데 유길준·안국선 등의 정치학은 초기에는 다원주의적 학문의 경향을 볼 수 있으며 1900년 초에 정치학을 전공한 김상연의4≪국가학≫(1906)의 경우는 블룬칠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에 수용된 정치학은 국가학이 주류가 된다.343)안용준,≪개화기 서구정치학의 도입에 관한 연구≫(경남대 박사학위논문, 1998), 208쪽. 서구 정치학의 수용에 관해서는 이 논문과 한석태,<개화기 정치학에 관한 연구>(≪사회과학연구≫4, 경남대 사회과학연구소, 1992) 참조.

 다음으로 우리 나라에 사회학이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였다. ‘사회’라는 단어는 19세기 말에야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된 번역어이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인 文史哲과 달리 사회학은 20세기 들어와서야 우리에게 소개된 대표적인 서양학문이라 할 수 있다. 사회학도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통로를 거쳐 들어왔다. 일본에서 공부한 이인직은 1906년에 월간잡지인≪소년한반도≫에 1호부터 5회에 걸쳐서 사회나 사회학의 제목으로 사회 및 사회학의 정의, 사회의 종류, 사회이론의 중요성, 스펜서의 진화론 등을 소개하였다. 일본에서 Sociology를 사회학으로 번역했으므로 이인직도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는 사회학이 세태학으로도 불렸다고 한다.344)이기준,≪한말 서구경제학 도입사연구≫(일조각, 1985), 238쪽.

 한편 사회학이 중국을 통해 ‘群學’의 이름으로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도 1905∼1906년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군학’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은 1909년에 나온 장지연의≪萬國事物紀原歷史≫였다. 장지연은 이 책에서 ‘군학’이라는 새 학문의 역사와 꽁트, 스펜서의 사상을 소개하였다.345)이준식,<일제침략기 개량주의 사회학의 흐름>(≪사회학연구≫, 1986), 256∼257쪽. 처음에 이렇게 두 낱말로 우리에게 알려졌던 새 학문은 얼마 가지 않아 ‘사회학’이라는 낱말로 쓰여지게 되었다.346)최재석,<한국의 초기 사회학:구한말-해방>(≪한국사회학≫6, 1974).
박영신에 의하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새로운 강자 일본의 번역어인 ‘사회학’이 쓰여졌고 학문과 사상의 중심부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옮겨졌다(박영신,<한국 사회학의 사회학적 역사>,≪사회학 이론과 현실인식≫, 민영사, 1992, 425∼426쪽).

 경제학의 경우, 서구의 체계적인 경제학이 수용되기 이전에 ‘경제학(economics)’이라는 용어가 활자화되어 지식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884년≪한성순보≫를 통해서였다. 이기준은 서구 경제학 도입사를 초창기(1881∼1893), 중기(1894∼1903), 말기(1904∼1909)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초창기에는 유길준·권동진·이종일 등이 일본에 유학하여 경제학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이며 중기는 이 기간에 많은 도일유학생이 경제학을 연구하여 몇 권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하고 경제학교육에 종사할 뿐만 아니라 귀국 후에도 계속 경제학에 관한 글을 발표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말기는 상당수의 도일유학생이 경제학을 연구하여 일본의 기관지에 경제학관계의 전문논문을 발표하고 또한 귀국하여 경제학 교육에 종사한 기간이다.347)이기준, 앞의 책(1985).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의미의 법학 즉 서양법학의 수용은 일본과 중국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즉 한국이 서양법사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일본의 蘭學으로 시작된 명치법 문화와 청말 이른바 양무론의 서적들을 통한 간접 수용으로 시작되었다.348)이원순,<한국근대문화의 서구적 기초>(≪한국사학≫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75∼79쪽 참조. 1895년 최초의 법학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설립되고 법관양성소의 교과목은 법학통론·민법·민사소송법·형법·형사소송법 및 기타 현행법률 등이었으며 그 후에 헌법·행정법·국제법·상법 등이 추가되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영미법학서가 소개된 것은 중국에서 번역된≪만국공법≫이며349)최종고,≪한국의 서양법 수용사≫(박영사, 1982), 404쪽.≪만국공법요략≫(1909),≪國際公法志≫(1909) 등의 국제법에 관한 책자도 발간되었다. 한국 지식인들이≪만국공법≫중에서 흥미를 가졌던 것은 均勢외에도 ‘자주’의 문제가 있었는데 원래 ‘주권’이니 ‘자치’니 ‘자주’라는 말은≪만국공법≫에서 처음 사용된 것이었다.350)이광린,<한국에 있어서의 ‘만국공법’의 수용과 그 영향>(≪한국개화사의 제문제≫), 158쪽.

 한국에서 서양법사상 수용의 특징으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의 양무론과 일본의 난학에서 출발한 명치법 문화에서 간접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이는 서구인문사회과학 수용의 일반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법적인 측면에서 한국이 서양국가와 접촉하는 정치적, 외교적 강도와 순서에 따라 미국의 영향이 제일 빠르고 컸지만 나중에는 일본 법학서를 통해 독일 법사상이 강하게 정착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서양인문사회과학 수용에서 일본의 역할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아 한말의 서양법 수용은 대체로 소극적 보수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서양적 민주주의와 법사상을 독특한 동양적 권위주의와 국가주의로 각색하여 받아들였고 뒤따른 일제하의 일본판 서양법학이 이것을 그대로 계속시켰다는 것이다.351)최종고, 앞의 책, 427∼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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