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1) 언문일치의 첫걸음
  • (1) 두 문체의 대립

(1) 두 문체의 대립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는 우리 나라의 새로운 학문이 싹튼 시기였는데, 어느 다른 분야보다도 한국어 연구의 싹이 먼저 텄음을 볼 수 있다. 그 때의 연구는 한글과 문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文字문제는 19세기의 90년대에 들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로 등장하였다. 그 이유는 그 때까지 우리 나라에는, 개화기 학자들의 말을 빌면, ‘文二致’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입으로는 우리말을 하면서 글로는 漢文을 쓰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을 해 온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개화와 더불어 갑자기 커진 문자의 사회적 기능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言文一致의 이상을 적극적이고, 전면적으로 추구하는 일이 긴급한 시대적 요청으로 등장한 것이다. 문자개혁의 첫 신호탄은 1894년 11월 21일에 공포된≪公文式≫에 관한 勅令(14조)이었다.

法律과 勅令은 모두 國文을 기본으로 삼되, 漢文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國漢文을 섞어 쓴다(法律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漢文과 國漢文을 들어 어정쩡한 것이 되기는 했지만, 국문(한글)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선언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같은 해 12월 12일에 고종이 종묘에 誓告한 글(≪獨立誓告文≫)이≪官報≫에 국문, 한문, 국한문의 세 가지로 실려 있음은 위의 칙령을 따른 것인데, 국문을 맨 앞에 싣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위에 든 국문, 한문, 국한문 중에서 ‘언문이치’의 장본인인 한문은 뒤로 물러날 운명에 처해 있었고 국문과 국한문이 앞으로 누가 새 시대를 담당할 것인가를 놓고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느 것을 택하거나 한글의 체계와 맞춤법을 정해야 할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어 1907년에 國文硏究所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글체계와 맞춤법의 연구는 자연스럽게 국어의 音韻에 관한 연구를 이끌어 내었다. 가령 ‘ㆍ’자를 그냥 쓸까 없앨까 하는 문제라든가, 받침으로 새로운 글자(ㅈㅊㅋㅌㅍㅎ 등)를 더 쓰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의 해결은 국어의 음운체계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文法은 서양에서 새로 들어온 학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영어 문법을 통해서 이 학문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고 다른 편으로는 일본에서 새로 만든 일본어 문법을 통해서 한국어 문법에 대한 생각이 움트게 되었다. 한국어 문법 연구는 19세기의 마지막 10년간에 시작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야 책으로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개화기 이전의 우리 나라에서 언문일치에 가장 가까운 문체를 지적하라면 아마도 대개는 諺文體라고 대답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로 고전소설과 편지 등 일상생활에 사용되어 일반 서민 사이에 제법 광범한 지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언문일치의 실현을 가장 강렬하게 추구한 개화기에 있어서 언문체 즉 國文體가 응당 대표적인 문체로 됨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 매우 미약한 존재였던 國漢文體가 크게 대두하여 국문체와 대립하였고, 마침내 이것이 도리어 대표적인 문체가 되었다.

 국문체가 대표적인 문체로 채택되지 못한 원인은 이것이 종래 문자생활의 하층부를 담당해 온 까닭에 갑자기 한문이 맡았던 상층부까지를 감당하기 어려운 결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한문체는 한문에 가까웠으므로 이런 결점이 없었다. 사실상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국한문체는 한문에 토를 단 정도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언문일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나, 점차 한문투가 적어져서 한자는 국어 속에 굳어진 漢字語의 표기에만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개화기에 있어서의 문체의 대립에는 매우 심각한 일면이 있었다. 가령 1883년에 나온≪漢城旬報≫는 순전히 한문을 사용했음에 대하여 1886년에 나온≪漢城周報≫가 한문·국한문·국문의 세 문체를 아울러 사용했음은 그 초기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뒤 이 두 문체는 상당한 각축을 벌였다. 신문에서는 일시 국문체가 우세했으나 점차 국한문체가 일반화되어 갔다. 그러나 국문체도 점차 그 기반을 굳히고 넓혀 갔다.

 개화기에 있어서 문체의 단일화 작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국한문체와 국문체의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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