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에 있어서 국한문체의 수립과 보급을 위하여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은 兪吉濬이었다. 그는 1883년 봄에 漢城判尹 朴泳孝의 권유로 신문 간행을 준비하면서 그 創刊辭와 解說文을 국한문으로 썼다고 한다. 이 신문이 간행되지 못한 탓으로 그의 글은 발표되지 못하였으나 개화기에 의식적으로 국한문을 쓴 최초의 시도로서 기억될 만한 일이었다. 위에서≪한성주보≫가 한문·국문과 함께 국한문체를 사용했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 역시 유길준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1886년에 鄭秉夏의≪農政撮要≫가 국한문의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는데, 저자는≪한성주보≫를 낸 博文局에서 일하고 있었다. 따라서 초기의 국한문체는 유길준 및 박문국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유길준의≪西遊見聞≫이 1889년에 완성되고 1895년에 간행되어 국한문체의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유길준은 이 책의 서문에서 국한문체를 택한 이유로서 ① 말뜻을 평순하게 하여 문자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도 쉽게 알게 하고, ② 스스로 글을 쓰기에 편하고, ③ 우리 나라 七書諺解의 법을 따라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③에 주목한다. 종래 그가 국한문체를 쓴 것은 1881년 일본에 갔을 때 접촉한 후쿠자와(福澤諭吉)의 영향이라고 하는 일설이 있었으나, 위의 ③은 그가 우리 나라 문자생활의 전통 속에서 이 문체를 인식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렇게 시작한 국한문체는 1894년 甲午更張으로부터≪官報≫을 비롯한 공사문서와 거의 모든 학교 교과서에 쓰이게 되고, 그 뒤 대부분의 신문·잡지에 채택되면서 그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한문체가 대표적인 문체로 확립되어 갔으나, 당시에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생각되고 있었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의 몇몇 신문 논설도 이런 의견을 표명하고 있지만, 李能和는 1905년 학부에 제출한≪國文一定意見書≫에서 지금으로서는 국한문체를 사용하는 편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국문체만을 사용하는 것은 백년 이후 시대에나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李光洙에 의해서도 표명되었다. 1910년≪皇城新聞≫에 실린<今日 我韓 用文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純國文인가 國漢文인가” 하면 “순국문으로만 쓰고 싶으며 또 하면 될 줄을 알되 그 심히 곤란할 줄을 알음으로”, 무엇보다도 “신지식의 수입에 저해가 되겠으므로” 우선 국한문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 글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광수가 당시의 국한문은 “순 한문에 국문으로 懸吐한” 것임을 지적하고 그 개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다. 즉 그는 “固有名詞나 한문에서 온 名詞·形容詞·動詞 등 국문으로 쓰지 못할 것만 아직 한문으로 쓰고 그 밖은 모두 국문으로 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개혁은 실제로 1908년에 창간된 잡지≪少年≫등에 의해서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그 뒤 이광수를 비롯한 문필가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이로써 비로소 국한문체가 진정한 언문일치에 접근하게 되었고, 국한문체와 국문체의 차이는 다만 한자어를 한자로 쓰느냐 한글로 쓰느냐의 차이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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