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1) 언문일치의 첫걸음
  • (2) 국한문체

(2) 국한문체

 개화기에 있어서 국한문체의 수립과 보급을 위하여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은 兪吉濬이었다. 그는 1883년 봄에 漢城判尹 朴泳孝의 권유로 신문 간행을 준비하면서 그 創刊辭와 解說文을 국한문으로 썼다고 한다. 이 신문이 간행되지 못한 탓으로 그의 글은 발표되지 못하였으나 개화기에 의식적으로 국한문을 쓴 최초의 시도로서 기억될 만한 일이었다. 위에서≪한성주보≫가 한문·국문과 함께 국한문체를 사용했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 역시 유길준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1886년에 鄭秉夏의≪農政撮要≫가 국한문의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는데, 저자는≪한성주보≫를 낸 博文局에서 일하고 있었다. 따라서 초기의 국한문체는 유길준 및 박문국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유길준의≪西遊見聞≫이 1889년에 완성되고 1895년에 간행되어 국한문체의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유길준은 이 책의 서문에서 국한문체를 택한 이유로서 ① 말뜻을 평순하게 하여 문자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도 쉽게 알게 하고, ② 스스로 글을 쓰기에 편하고, ③ 우리 나라 七書諺解의 법을 따라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③에 주목한다. 종래 그가 국한문체를 쓴 것은 1881년 일본에 갔을 때 접촉한 후쿠자와(福澤諭吉)의 영향이라고 하는 일설이 있었으나, 위의 ③은 그가 우리 나라 문자생활의 전통 속에서 이 문체를 인식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렇게 시작한 국한문체는 1894년 甲午更張으로부터≪官報≫을 비롯한 공사문서와 거의 모든 학교 교과서에 쓰이게 되고, 그 뒤 대부분의 신문·잡지에 채택되면서 그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한문체가 대표적인 문체로 확립되어 갔으나, 당시에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생각되고 있었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의 몇몇 신문 논설도 이런 의견을 표명하고 있지만, 李能和는 1905년 학부에 제출한≪國文一定意見書≫에서 지금으로서는 국한문체를 사용하는 편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국문체만을 사용하는 것은 백년 이후 시대에나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李光洙에 의해서도 표명되었다. 1910년≪皇城新聞≫에 실린<今日 我韓 用文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純國文인가 國漢文인가” 하면 “순국문으로만 쓰고 싶으며 또 하면 될 줄을 알되 그 심히 곤란할 줄을 알음으로”, 무엇보다도 “신지식의 수입에 저해가 되겠으므로” 우선 국한문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 글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광수가 당시의 국한문은 “순 한문에 국문으로 懸吐한” 것임을 지적하고 그 개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다. 즉 그는 “固有名詞나 한문에서 온 名詞·形容詞·動詞 등 국문으로 쓰지 못할 것만 아직 한문으로 쓰고 그 밖은 모두 국문으로 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개혁은 실제로 1908년에 창간된 잡지≪少年≫등에 의해서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그 뒤 이광수를 비롯한 문필가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이로써 비로소 국한문체가 진정한 언문일치에 접근하게 되었고, 국한문체와 국문체의 차이는 다만 한자어를 한자로 쓰느냐 한글로 쓰느냐의 차이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